매일신문

[권영재의 대구음악유사]쥐나 개나 마이크

권영재 전 대구적집자 병원 원장

공공장소에서 보통 사람들은 마이크 한 번 잡기 힘 든다. 그래서 일단 마이크 한 번 잡으면 좀처럼 놓지 않는다. 예전 서민들은 마이크 잡기는커녕 구경조차도 흔치 않았다. 학교 교장 선생님이나 방송국 아나운서, 쇼 무대 사회자, 약장수 정도는 되어야 마이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요즘은 쥐나 개나 마이크 든다. 좁은 회의실인데도 마이크를 쓰고 마니아들은 가정집에서도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른다. 일본에서 가라오케가 들어 온 뒤 서민들도 쉽게 마이크를 드는 세상이 되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공평동 있던 중앙국민학교는 미군에게 징발 당한다. 저학년은 경북의대 응급실 앞 공터에 판잣집을 지어 이사를 가고 고학년은 신천가에서 노천 수업을 하게 되었다. 인근에 있는 수창학교는 한국군에게 쫓겨나 전매청 담배창고에서 수업하였다. 나는 이때 마이크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이런 난장판인데도 아침 점심 조회가 있었다. 조회 때 훈시를 하는 교장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을 듣는 학생이 있다고 믿는 걸까? 오랜 의문이다. 어린이에게 해줄 말이 그렇게 많아서일까? 아니면 잡은 마이크를 놓기 싫은 걸까? 어느 교장 선생이라도 그들의 훈시는 길고도 지루하다. 수십 년 학교 다니며 많은 조회를 하였지만 신기하게도 기억에 남는 교장 선생님 말씀은 하나도 없다. 지루한 조회는 끝없이 이어진다. "에또" 하면서 말을 이어가고 "끝으로" 하면서 또 연설은 이어진다. 가관인 것은 "어디까지 했더라" 하며 앞에 했던 자신의 말을 까먹기도 하는 것이다. 더운 운동장에서 약한 어린이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훈시는 끝이지 않는다.

교장 선생의 번들거리는 이마와 반짝짝 머릿기름을 발라 올린 마이크 머리가 역겨웠다. 교단 양 옆에 자리 잡고 있는 스피커는 경복궁 해태 마냥 그 다리를 고추 세우고 앉아 잡음 내었다. 때로는 소리가 안 나기도 하고 삐이익 하고 유리창 긁는 소리를 하며 어린 학생들의 심신을 고문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학교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중앙국민학교도 공평동으로 원 위치했다. 경대 병원 앞에 있던 임시 교사는 동덕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원래의 학교로 돌아온 뒤 새로운 마이크 공해가 추가로 시작이 되었다. 교장 선생의 횡설수설은 여전하고 매일 두 시간 수업마치면 운동장으로 학생들을 모아 체조를 시켰다. 체조 전에 행진곡이 나오고 다음 체육 교사가 지르는 고함 소리, 구령 소리가 또다시 공해를 만들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주민들의 민원도 있었을 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노동조합이 없었는데도 선생님들이 옳게 행동해 존경받던 시절이다. 그 덕에 매일 체조 시간에 정은락 선생이 구령을 붙이고 악을 써도 공평동 주민들은 참아주었다.

희게 반들거리는 마이크를 보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렸다. 가래 낀 목소리를 들으면 교장 선생의 훈시가 연상되어 어지러웠다. 커서 군대 가니 거기에 또 다른 교장선생들이 있었다.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들 여러 '장님'들이 사병들을 모아놓고 긴 연설을 하였다.

제대하고 회사 회의에 참가해보니 거기에도 또 다른 교장선생이 있었다. 요즘 마이크는 예쁘게 만들어져 번쩍거리지도 않고 스피커도 성능이 좋아 잡음을 내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커지게 해줄 뿐 잡음이 없다. 그러나 기구는 개량되었지만 말 내용은 아직도 소음이요. 긴 잡소리다.

오늘도 호구지책을 위해 청와대에서, 장관실에서, 기업의 회의실에서, 군대에서, 장님들의 주옥같이 아름다운 말씀 들어야 되는 서민들 귀에는 그 말씀들이 횡설수설과 악쓰는 소리, 빈정대는 소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로만 들리는 이 병은 어린 시절 조회 때 입은 마음의 상처 탓이기만 할까? 아님 일그러진 마음의 수양 부족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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