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갑오동학혁명 기념일을 맞아 이보다 23년이나 앞선 '영해동학혁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덕의 시민단체인 영덕참여시민연대는 11, 12일 영해동학혁명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한다.
11일 오전 9시 병풍바위에서 추념식을 열고 오후 2시에는 동학연구가인 김기현 씨를 초청, 영덕군 창수면 사무소에서 강연회를 한다. 이어 12일 오후 7시에는 영덕참여연대 사무실에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씨의 강연도 준비했다.
영해동학혁명은 1871년 음력 3월 10일 1대 교주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7주기가 되는 날 저녁, 영해부 우정동 병풍바위(현재 경북 영덕군 창수면 신기리 형제봉 아래 병풍바위)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동학교도와 각계각층 600여 명이 집결하면서 벌어진 혁명이다.
당시 이들은 제천의식을 끝낸 뒤 영해부성까지 한달음에 달려갔고 관군과 공방 끝에 다음날 새벽 영해부를 완전히 점령했다. 혁명군은 부사 이정을 잡아 부정부패를 낱낱이 추궁하고 날이 밝아올 무렵 그를 단죄했다.
울진군지에는 '영해 부사(이정)는 생일잔치에 대소 민인을 초치하여 떡국 한 사발에 30금을 받을 정도로 수탈을 자행했던 사람이었다'며 영해 부사 폭정의 실상을 기록하고 있다.
혁명군은 다음날 오후까지 영해부에 머물며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격문을 내고 관아에서 탈취한 돈을 영해읍내 5개 동에 골고루 나눠주기도 했다.
이후 혁명군은 인근 영덕현과 영양현의 점령과 상경 문제를 논의했지만 의견을 모으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났지만 결국 90여 명이 잡혀 죽고 20여 명은 귀양, 60여 명은 수배됐다.
향토 사학자 이완섭(58·전 영덕군 의원) 씨는 "당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은 현재 포항의 청하면 마북리 쪽에서 한지 기술자로 일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지산업은 경주가 최고로 번성했고 동해안 일대에서는 영해가 뒤를 이을 정도로 번성했다"며 "이는 영해부에 동학교도들이 많았고 거사의 장소가 된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그러나 영해동학혁명은 최근까지도 민란 정도로 평가절하됐다. 이와 관련, 당시 참가자들을 문초한 기록들이 이들을 도적으로 몰았고 동학의 기록들도 후일 교단에 미칠 화를 우려해 군사적 행동을 주도했던 이필제와 해월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기술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영덕참여시민연대 관계자는 "영해동학혁명에 참가한 사람들의 저항정신은 훗날 신돌석 장군 항일의병투쟁, 갑오동학혁명, 영해만세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번에 그들을 추모하고 재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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