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토머스. 언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전설적 이름이다. 1961년 여성 최초로 백악관 출입 기자가 되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부터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10명의 대통령을 취재하며 50여 년간 백악관 기자실 맨 앞줄을 지켰다. 백악관 기자회견의 첫 질문과 마지막 인사는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토머스 기자는 특히 직설적인 질문으로 유명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들이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을 집요하게 물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는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는 이란 인질 사건,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는 그라나다 공격과 이란-이라크 전쟁,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는 성추문에 대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질문했다. 이라크 침공에 대한 비판적 질문으로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출입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귀 후에도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을 추궁하는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토머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진실을 캐기 위한 질문과 무례한 질문을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물음에 "무례한 질문이란 건 없다"고 답했다. "기자는 질문하는 것이 특권이고, 대통령은 기자의 질문에 답할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대통령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게 아니냐는 비판에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대통령이 '왕'이 되기를 원하는가?"
2013년 토머스 기자가 별세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했다. "헬렌은 민주주의를 향한 집요한 신념으로 미국 대통령들을 항상 긴장하게 만들었다." 토머스의 일화나 오바마 대통령의 성명이 말하는 바는 같다. 기자는 무례해도 좋은 특권을 누려야 한다는 게 아니다.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권력에 대한 기자의 질문은 기자 개인이 아니라 국민을 대신해 묻는 것이라는 확고한 의식이다.
지난 9일 있었던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혹은 대담)에 대한 후폭풍이 일고 있다. 정상적이라면 문 대통령의 답변 내용이 화제가 되어야 한다. 취임 2주년의 소회와 향후 국정 운영의 비전이 조명을 받아야 한다. 엉뚱하게도 대담을 진행한 송현정 한국방송(KBS) 기자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인상을 쓰며' '답변에 끼어들고' '독재자'라는 표현을 쓰는 등 무례했다는 인신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 본인뿐 아니라 사촌 동생인 가수에게까지 이른바 신상털이가 진행 중이다. 한마디로 어이 없는 반응이다. 대담 진행을 잘 했는지, 질문 내용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딜 감히"라거나 "박근혜 시절에는 찍소리 못하더니"라는 식의 비판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그런 '비정상의 정상화'가 문재인 정부의 목표 아닌가 말이다.
관점에 따라 지지자들에게 불편해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 물론 있었다. 하지만 송 기자의 다소 공격적인 자세가 오히려 대담을 살렸다고 생각한다. 처음 접하는 방식 때문이었을까. 회견 중반까지 문 대통령은 긴장감을 벗어나지 못해 보였다. 말이 꼬이고 답변은 겉돌기 일쑤였다. 만약 송 기자가 웃음 띤 얼굴로 답변을 그냥 듣고 있었다면 오히려 비난이 빗발쳤을 것이다. 역시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고. 무엇보다 당사자인 문 대통령이 불쾌해 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전언이다. 좀 더 공세적인 대화가 오갔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반응도 전해진다.
해법은 간단하다. 이런 기회를 자주 갖는 것이다. 대통령도 언론도 국민도 처음 접하는 생소한 광경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소동이다. 문 대통령만이 아니라 그동안 대통령 기자회견은 연례행사였다. 행사 기획이 필요한 거창한 이벤트 성격이 강했다. 민감한 현안을 놓고 대통령이 기자들과 설전을 벌이는 모습은 '먼 나라'의 일일 뿐이었다.
대통령이 청와대 기자실에도 자주 들르고, 현안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언론을 만나야 한다. 자연스레 민주주의 훈련이 되면 '무례' 운운하는 말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 마음속 '제왕적 대통령'을 없애는 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국민들은 헬렌 토머스의 말을 상기해야 한다.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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