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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대학자 구미 인동 출신 여헌 장현광]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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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에 건축돼 여헌 장현광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1907년 산람의진 사건으로 일본군이 방화해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 전병용 기자
일제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에 건축돼 여헌 장현광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1907년 산람의진 사건으로 일본군이 방화해 소실됐다가 1914년 복원됐다. 전병용 기자
구미 임수동 동락서원 옆 부지암정사. 여헌 선생이 강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곳이다.
구미 임수동 동락서원 옆 부지암정사. 여헌 선생이 강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곳이다.

〈1〉 선생의 탄생과 인동 장씨
〈2〉 짧은 수학기, 드높은 학문적 지향
〈3〉 잇단 슬픔과 굴곡진 삶의 여정
〈4〉 관직의 길 오르다
〈5〉 학문 연구와 강학의 기틀 마련하다
〈6〉 강학 통해 문인 배출하다
〈7〉 서원과 향교의 재건, 그리고 선현추숭사업
〈8〉 인조반정과 산림으로의 징소
〈9〉 광대한 학문체계를 집대성하다
〈10〉 위대한 학자, 영원한 스승으로 기억되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1609년 6월에 여헌 선생에게 합천군수를 제수했지만, 사양했다. 도덕정치를 희구하는 여헌 선생은 영창대군을 살해되고 인목대비가 유폐되는 정치적인 상황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헌 선생은 50대 중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학문적 성취를 구체화했다. 55세 때 자신의 저술 가운데 최고의 역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찬술하기 시작했다.

이때 구미 낙동강이 발아래로 펼쳐 보이는 동락서원 옆에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가 낙성됐다. 동락서원에는 여헌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락서원 옆 낙동강에 있는 부지암이란 바위는 여헌 선생이 제자들과 자주 찾던 곳이다. 부지암에서 제자들과 강바람도 쐬고, 배도 띄우며 뱃놀이를 하면서 시도 읊고 흥취를 만끽했다.

동락서원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부지암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목표로 세워진 부지암정사는 여헌 선생의 강학 활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계기가 됐다.

여헌 선생은 부지암정사를 비롯 포항 입암서원(立巖書院), 선산 원회당(遠懷堂), 금오서원(金烏書院), 구미 인동향교(仁同鄕校) 등에서 강학에 몰두했다. 입암서원 주변에는 만활당과 일제당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강학 기반의 틀을 갖추었다.

여헌 선생의 학문적 명망은 더욱 높아져 갔고, 영남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라는 명성이 자자했다. 문하에는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초기에는 '양송 15현'이라는 제자 그룹이 형성됐다. 양송 15현은 여헌학파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기에는 '여문 10현'이라고 불리는 제자들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다. 여문 10현에는 류성룡의 아들 유진과 학사 김응조, 수암 정사진, 만회당 장경우, 나재 신열도, 쌍봉 정극후, 간송 조임도, 구암 김경장, 성재 권봉, 백암 안응창 등이다.

여문 10현 이외에도 '여문 10철'이라고 분류해 지칭하는 고제집단이 있었다. 여문 10철은 여문 10현 선비들 대부분이 포함됐으며, 학가재 이주와 노형필이 포함됐다.

이처럼 여헌 선생 문하에는 전국적으로 300명이 넘는 선비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여헌 선생의 학문적 영향은 영남 계열 학자들뿐만 아니라 기호 계열 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기호 학맥의 중심인물이자 이이의 수제자였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학문적 교류를 했다. 김장생의 고제인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도 여헌 선생을 찾았다.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 중 손꼽히는 택당 이식은 여헌 선생을 영남의 마지막 유자로 평가했으며, 월사 이정구는 주역에 관해 여헌으로부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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