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북돋움] 빨강 머리 앤을 사랑한다면

몽고메리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빨강 머리 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모가 없는 외로운 처지와 녹록하지 않은 삶의 환경은 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독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누가 뭐라 해도 톡톡 튀는 개성과 밝은 마음을 잃지 않는 앤의 씩씩함은 삶의 희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얼마 전, 도서관에 강의하러 갔다가 앤을 무척 사랑하는 여성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은 소녀 시절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앤 셜리의 인생 여정을 담은 소설 열 권을 모두 읽었을 뿐만 아니라 P.E.I에 가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고 했다. 내년 여름에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묻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네, 좋아요"라고 대답했다.

P.E.I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의 약칭이다. 캐나다 동부 세인트로렌스만에 위치한 이 섬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소설 앤 시리즈의 배경이 된 곳으로 1908년 출간된 첫 번째 이야기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 큰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특히 앤을 좋아하고 추억하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문학기행지이기도 하다.

몽고메리는 P.E.I에 있는 소도시 캐번디시를 모델로 가상의 마을 에이번리를 창조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호수와 나무, 숲길에 '빛나는 물의 호수' '연인의 오솔길' '유령의 숲' '하얀 숙녀'와 같은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다. 몽고메리의 외사촌 데이비드와 마거릿 맥닐 남매가 살던 집은 소설 속에서 매슈 남매가 앤과 함께 지낸 초록 지붕 집으로 재탄생해 여행자들을 반긴다. 소설 속 인물들이 정말 여기서 살았나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집 내부의 꾸밈이 자연스럽다.

그 외에도 클리프턴(지금의 뉴런던)과 캐번디시에는 몽고메리의 생가, 외조부모와 함께 살았던 집터, 그녀가 다닌 교회, 팬들의 편지와 엽서가 놓인 묘가 있다. 외조부모가 운영했던 그린 게이블즈 우체국은 아직 영업 중이다. 1898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스물네 살 때부터 몽고메리는 9년 동안 할머니를 도와 우체국 일을 하면서 집필에 몰두했다. 당시 캐나다의 우편 업무에 사용된 집기들과 몽고메리에 관한 기록이 함께 전시된 이곳에서 낭만이 가득한 엽서를 부칠 수 있다.

몽고메리와 가장 가깝게 지내며 마음을 나눴던 친척 캠벨의 집은 앤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주의 주도(州都)인 샬럿타운에서는 여름 내내 뮤지컬 'Anne of Green Gables'와 'Anne & Gilbert' 공연이 펼쳐진다. 50년 넘게 이어져 온 뮤지컬은 원작의 탄탄함과 배우들의 열연이 어우러져 몇 번을 봐도 식상하지 않다.

2016년과 2017년 여름, 몽고메리의 삶과 앤의 흔적을 따라 책 걷기를 하는 호사를 누렸다. 같은 장소를 일곱 번 찾아갔다. 더 잘 알고 싶어서, 더 섬세하게 느끼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몽고메리가 살았던 시대와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았던 가상의 세계가 마치 하나인 듯 잘 어울리는 곳. 19세기와 20세기, 21세기가 공존하는 캐번디시. 섬을 일곱 바퀴 도는 내내 한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이처럼 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보존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장소들을 관리하는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맥닐, 캠벨 가문 후손들의 노력 덕분이란다. 참으로 부러운 대목이자 우리가 보고 배워야 할 점이다. 몽고메리의 삶과 앤 이야기가 녹아 있는 장소에는 '최첨단 디지털 기술'로 포장된 것이 없다. 아날로그 방식을 지향하며 관광객들로 하여금 현재에서 과거를 살게 한다. 접근의 편리함을 위한 셔틀 버스도, 만만한 대중교통조차 없지만 여행자들은 그곳을 찾아간다.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미래의 초록 지붕 집과 앤 박물관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은 여전히 스토리의 힘에 집중할 것 같다. 현대화의 바람은 불겠지만 몽고메리의 정신과 작품의 가치만은 훼손시키지 않으리라 믿는다. 몽고메리가 극찬한 그 섬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두 여성의 용기 있는 도전에 함께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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