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미강의 생각의 숲] 신포도와 여우들 그리고 양치기 소년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는 자기합리화를 이야기할 때 종종 인용된다. 포도를 따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여우가 포도를 먹을 수 없게 되자 '신포도'라고 규정해버린다.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했을 때, 여러 상황 속에서 불안과 수치심, 죄책감이 들 때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스스로 합리화시키고 보호한다. 바로 방어기제다. '여우와 신포도'는 방어기제를 가장 잘 나타낸 우화다. 이야기에서처럼 포도가 신포도인지 단포도인지 먹어보지 않고는 모른다. 여우는 포도를 먹지 못한 아쉬움을 '분명 신포도일거야'라며 달랜다. 아쉬움을 넘어 포도를 평가절하하고 못 먹는 것이 아니라 안 먹는 것이라고 자신의 무능력을 포장한다.

만약 여우가 포도를 따려는 또 다른 동물에게 "그 포도는 신포도이니 먹지 말라"고 한다면 여우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방어기제로 사용한 신포도가 다른 동물에게 전해지면서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이쯤에서 또 하나의 이솝우화인 '양치기 소년'이 오버랩된다.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일삼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나 양을 사지로 몰아넣는 소년의 이야기다.

두 이야기 모두 진실과 관련된 것이다. 진실과 상관없이 자신의 것으로 취할 수 없게 되자 거짓으로 자기합리화하는 여우나,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하는 양치기 소년이나 다른 이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한 정치인과 그를 둘러싼 여론전을 보면서 오래 묵은 이솝우화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신포도라고 정의내리며 자기 합리화에 빠진 사람들이 여우같이 보인다. 신포도라고 규정하며 포도에게 진실의 당도를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는다. 자기합리화를 넘어 거짓말로 수많은 신포도를 만들어낸 여우들과, 믿고 맡긴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재산상의 손해를 입힌 양치기 소년이 여전히 많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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