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청와대로 간 차사(差使)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자식들간에 벌어진 왕자의 난에 울분을 참지 못한 조선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내려놓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좌를 거머쥔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를 궁궐로 모셔오려고 애를 썼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한양에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오는 차사를 죽이거나 가둬버리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말이 함흥차사(咸興差使)이다. 한 번 가면 소식이 없거나, 심부름을 간 사람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경우를 두고 함흥차사라 부른 것이다. 그로부터 70년 후인 성종 때에는 함안차사(咸安差使)라는 말이 또 생겨났다. 경남 함안에 절세 미녀인 딸을 둔 자가 큰 죄를 짓는 바람에 조정에서 판관을 내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는 사람마다 재색을 겸비한 여인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죄인의 딸이 된 노아라는 여인은 부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되었던 것이다. 판관들은 매력적인 미모에 한시를 지을 정도의 학식까지 갖춘 그녀에게 홀려 하룻밤만 보내고 나면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의기양양하게 임지로 떠난 젊은 관리조차 노아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전철을 밟자, 조정에서는 강직하고 엄격하기로 이름난 위인을 특별히 선임해서 보냈다.

그러나 준엄한 왕명을 받들고 일도양단의 각오로 내려온 그 판관 또한 역참에서 일하는 시골 아낙네로 변신한 노아의 의도적인 매력 발산에 이끌리고 말았다. 결국은 역원(驛院)에서 노아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애틋한 밤을 잊지 않기 위해 판관은 그녀의 팔뚝에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넣었다. 이튿날 함안 관아에 도착한 판관은 죄인의 딸부터 잡아들이고는 단칼에 처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여인의 팔뚝에 드러난 자신의 이름을 보고는, 노아를 풀어주고 판결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함안군 읍지에 전하는 일화이다.

중차대한 임무를 부여받고 특별한 임지로 부임했다가 함흥차사나 함안차사가 되는 사례가 옛일만은 아닌 듯하다. 국민이 부여한 사명을 안고 국리민복을 호언장담하며 청와대로 입성했던 역대 대통령들의 부끄러운 말로를 보면 그렇다. 작금의 혼란한 정국을 보면 문재인 대통령도 어쩌면 '청와대로 간 차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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