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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대구 옛 이야기] 해상왕 장보고의 대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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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영남중 교사
대구 영남중 교사

완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장보고(790?~841)는 소년 시절부터 바닷속 잠수에 능숙하고 20㎞(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을 정도였다. 이후 장보고는 810년대 초에 홍수와 가뭄으로 빈곤에 허덕이다 과도한 조세 부담을 견디지 못해 당나라로 건너가 무녕군에 입대하였다.

장보고는 당시 산동반도를 장악했던 이사도(李師道)의 평로군 진압에 공을 세워, 30세에 '군중소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던 중 장보고는 신라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노예무역에 반발하고 해상무역에 관심을 둔 가운데, 당의 감군(減軍)정책으로 인해 귀국하였다.

828년 장보고를 만난 흥덕왕은 해적들로부터 신라인을 지키기 위해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를 대사(大使)에 임명하여 군사 1만 명을 따르게 하였다. 장보고는 해적들을 소탕하면서, 남중국항로를 개척하여 신라~중국 남부~일본을 연결하며 해상무역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라 하대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836년 흥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김명의 도움을 받은 김제륭이 김균정을 살해하고 '희강왕'에 올랐다.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청해진으로 달아나 목숨을 부지하였다. 곧 김명은 반란을 일으켰고, 희강왕이 자결하자 '민애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를 계기로 김우징은 장보고를 끌어들였다. 김우징-장보고의 군사는 무주 철야현 전투에서 승리하고, 대구에 도착하여 격전 끝에 민애왕의 군사를 궤멸시켰으며, 경주로 입성하여 민애왕을 살해한 후에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추대하였다. 장보고는 감의군사·진해장군의 관직과 2천 호의 식읍을 받고, 자신의 딸을 문성왕(김우징의 아들)의 왕비로 들일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장보고는 김양의 사주를 받은 염장에 의해 살해되고, 청해진은 폐지되었다.

김우징-장보고 세력이 민애왕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대구의 당시 위치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대구는 장보고의 생애에 신분 상승을 꿈꾸다가 끝내 좌절해 버린, 회한이 서린 곳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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