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대중가요의 한 토막이다. 내 어릴 적 소원은 '기와집에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대다수 민서들은 나지막한 초가삼간에서 살았는데, 마을에는 기와집이 딱 한 채뿐이었다. 그 집 아들은 마을에서나 학교에서나 늘 으스대며 젠체하고 다녔다. 그 시절 기와집은 부자의 상징이었다.
목조건물의 지붕은 이엉이나 볏짚, 그리고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 부재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내구력이 약해서 자주 교체해야 되기 때문에 방수효과가 좋고 강도가 높은 기와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목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덮는 풍습은 고대 동양건축의 주요한 특징이었으나, 그 정확한 기원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와집을 와가(瓦家) 또는 와옥9瓦屋)이라고도 하였다. 또한 기와가 엄청 비쌌기 때문에 민서들은 감히 기와집을 지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높은 벼슬을 살거나 만석꾼 부자라 하더라도 아흔아홉 칸이 넘는 기와집은 지을 수 없었다. 오로지 궁궐에서만 그 이상의 큰집을 지을 수 있었는데, 그 시절 법도가 그랬었다.
기와는 눈이나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와 함께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가장 기본적이며 많은 수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수키와와 암키와이다. 그 모양이 평평한 기와를 암키와, 둥근 기와를 수키와라 한다. 지붕을 덮을 때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서 얇게 편 다음, 위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위에 비아무림으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 한다.
지붕마루는 기왓골에 맞추어 수키와를 옆으로 세워서 막고, 그 위에 수키와를 한 줄로 세워서 댄다. 앞에 것을 착고(着高), 뒤에 것을 부고(付高)라 하며, 그 위에 마룻장을 3~7겹 덮고 제일 높은 부분에 수마루장을 덮는다. 그리고 용마루의 양쪽 끝에 높게 장식된 용머리기와를 세워 장식을 겸한다. 또한 각 마루 끝에 벽사(辟邪)의 의미로 사용되는 귀면(鬼面)기와, 각 마루의 추녀 밑 네모난 서까래에 사용되는 사래기와 등이 있다.
흔히들 와당(瓦當)이라 하는데, 추녀 끝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기와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암막새와 수막새는 여러 가지 무늬가 오목새김 된 나무나 도자기로 된 틀로 찍어낸 것이다. 거기에는 연꽃․당초(唐草)․보상화(寶相華)․귀면(鬼面)․금수(禽獸) 같은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 또한 제작기법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고고학이나 미술사 연구에 중요시되고 있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대형 용머리기와는 그 옆면과 뒷면에 얼굴무늬와 연꽃무늬를 번갈아 장식하고 있다. 그로 해서 특수한 의장을 보여주는 고대 신라의 대표적인 기와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막새에 나타난 여러 가지 무늬들은 평안과 번영을 소망하던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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