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물병원에는 동물들도 스태프 마냥 각각의 부서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해리(터키쉬앙고라, 7살)는 원장 대행이다. 접수대나 진료실 의자에 앉아서 내원하신 고객들과 동물환자들을 지켜보곤 한다. 은근히 수의사와 간호사들이 일 잘하나 감시하는 듯하다. 내가 진료 상담을 하면 곧잘 맞은편 쇼파에 앉아서는 상담 잘하나 지켜보곤 한다. 원장실이 비면 원장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주인인양 행세하는 도도함이 있다.

샤벳(친칠라, 7살)은 고객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천사 고양이다. 울적한 보호자에게 다가가 꾹꾹이를 해준다. 낯선 고양이가 자신을 위로해주는듯한 행동에 보호자는 엄청 감동받게 된다. 세면대에 앉아서 스태프들에게 "나 물 틀어줘"하며 기다리는 모습에 고양이가 맞나 의심해보기도 한다. 착하고 이뻐서 동물건강정보 팜플렛을 제작할 때는 모델 섭외 일순위다.
이쁜 모습들과는 다르게 해리는 미용실에 맡긴 후 버려졌었고, 샤벳은 공영주차장을 배회하던 유기묘 시절이 있었다.

다비(아비시니안, 2살)는 SBS 'TV동물농장'에 방송되었던 하천변에 버려진 10마리 품종묘들 중 마지막에 구조되었던 고양이었다. 높은 나무를 오르내리던 날쌘돌이라 자기가 기분내키지 않으면 만질 수가 없다. 가끔 진료실 문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들어가도 되나?"라며 물어보는 듯할때가 제일 귀엽다. 의외로 병원을 방문한 고양이 환자들 곁에 다가가 위로해주는 재주가 있다.

탄야(코숏, 4살)는 온몸이 까만 고양이다. 탄야도 'TV동물농장' 주인공이었다. 올무에 걸려 다리가 썩은 상태로 구조되었고 어쩔수 없이 한쪽 앞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탄야는 난치성 면역질환을 가지고 있다. 두 번이나 집중 치료로 고비는 넘겼지만 언제든 다시 재발할 수 있다. 뚱냥이에 한쪽팔은 없지만 날렵하게 뛰어따니며 가출이 특기다. 터줏대감인 해리랑 샤벳을 괴롭히는 악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은 유난히 탄야에게 너그럽다. 탄야의 천연덕스러움이 심각한 질병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의외로 골수 팬들이 많은 이유이다.

깜순이(잡종견, 5살)는 조제실 담당이다. 깜순이도 'TV동물농장' 주인공이였다. 폐가에 방치된 유기견 깜순이를 이웃 할머니가 보살펴주던 사연이었다. 하지만 깜순이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극도로 높은 탓에 누구의 손길도 허용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키우기로 하셔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불과 한 달 뒤 다급하게 연락이 오셨다. 날쌔고 경계심 높은 깜순이를 도저히 감당못해 차라리 집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했더니 어느날 항문이 탈장된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두차례에 걸친 큰 수술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건강은 회복되었지만 마땅한 입양처를 찾을 수 없었다. 1층 입원실 한칸을 잠자리로 정해주고 자유롭게 다니도록 하였다. 병원 스태프들은 깜순이를 그냥 두었다. 깜순이는 간호사들이 자신을 괴롭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뒤에야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다. 아직도 반기지는 않지만 이젠 수의사와 간호사들의 손길 정도는 허용한다. 이제는 조제실과 처치실을 오가며 좋아하는 간호사 주변을 껌딱지 마냥 따라다닌다. 깜순이가 일을 도와주진 않치만 곁에 얌전히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간호사들은 대견해하고 즐거워한다. 여기까지 5개월이 걸렸다.
동물병원 식구가 되어버린 유기견 유기냥이들이 스태프 마냥 동물병원에 기여하는 모습들이 신기하고 즐겁다.
개와 고양이는 사람을 신뢰하면서 똑똑해지고 착해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해리와 샤벳, 다미, 탄야, 깜순이가 그 증거인 셈이다.

수의학박사 박순석. (탑스동물메디컬센터 진료원장)
* SBS TV 동물농장 동물수호천사로 잘 알려진 박순석원장은 개와 고양이, 위기에 처한 동물들을 치료한 30여년 간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올바른 동물의학정보와 반려동물문화를 알리고자 '동물병원 24시'를 연재한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동물명은 가명을 사용하고 있음을 양지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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