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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녕하세요… Are you in peace?"… 한국어 교본이 아니다, 소설이다

초급 한국어 / 문지혁 / 민음사

초급 한국어 / 문지혁 / 민음사
초급 한국어 / 문지혁 / 민음사

SF 장르문학 작가로 이름을 알린 문지혁이 신작을 냈다. 파스텔톤 하드커버다. 출판사가 황금가지, 가 아니라 민음사다. 제목도 '초급 한국어'다. 번역자이기도 한 문지혁의 이력을 미뤄 짐작해, 공교롭게도 최근 미국 작가 재닛 버로웨이의 '라이팅픽션'을 번역한 게 출간됐으니,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본으로 유추할 법하지만 아니다. 민음사는 그를 서른 번째 '오늘의 젊은 작가'로 엄선했고 소설 '초급 한국어'를 내놨다.

◆"안녕하세요, Are you in peace?"

근래 들어 읽어주는 소설이 유행이다. 작가가 직접 낭독해준다. '초급 한국어'도 10월 한 달 동안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먼저 공개됐다.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이, 김금희의 '복자에게'가 그랬고, '초급 한국어'도 트렌드를 따랐다.

짧은 건 3분, 긴 건 11분. 보통 5분 안팎이다. 노래 한 곡 길이다. 문지혁 작가의 전달력 강한 차분한 목소리 못지않게 흡입력 강한 글도 부담없긴 마찬가지다. 오디오클립에서 사촌 누나 남편의 직업이 엔지니어였던 것이 책에선 치과의사로 바뀌는 등 일부가 수정되긴 했지만 대세에 지장은 없다.

대개 소설은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다지만, 수정된 자서전이라지만 대뜸 작가의 본명을 가진 주인공 Ji Hyuck이 등장한다. 어리둥절해하며 실화냐고 되물으면 곤란하다.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 축제 모습. 자료=민음사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시간을 말하는 '초급 한국어' 강의 중 한 장면. 자료=민음사

Ji Hyuck은 미국 뉴욕과 뉴저지 사이를 활동 무대로 삼은 '이민 작가',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진 한국어 강사다. 여기까지는 실제 문지혁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예능에서 다큐각이 나오면 낭패이듯 소설은 소설로 가둬야 한다.

그러나 Ji Hyuck은 의욕과 달리 미국 사회를 겉도는 주변인에 머문다. 자칫하면 미등록 외국인노동자가 될 처지다. 그럼에도 욕망은 쉽사리 꺾이지 않는다. 행여나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까. 이런 조언, 저런 참견에 귀가 솔깃하다.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행운 호출 표현, '복권 긁는 심정'이 얹히자 어머니의 건강 악화에도 귀국을 결심하지 못한다.

그래서였는지 Ji Hyuck은 자신의 수업 내용이기도 한 '안녕'을 그토록 찾는다. 그는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안녕하세요?'를 'Are you in peace?'로 번역해 설명한다. '편안할 안(安)', '편안할 녕(寧)'을 직역하면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이니 'peace'를 쓰는 게 적확하겠지만 "Are you in peace? (평안하냐?)" 라고 안부를 묻는 미국인은 없다. 'Go in peace' (안녕히 가세요)로도 쓰지 않는다.

학생들은 웅성웅성 동요한다. "'Are you in peace?' 그런 말을 일상에서 한다고요?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할 것 같은 말인데, '평안하냐?'"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 축제 모습. 자료=민음사

◆독서실에서 써내려간 초급 한국어

저마다의 케렌시아가 있고, 편안함을 느끼는 작업장이 있을 테지만 문지혁은 독서실에서 '초급 한국어'를 썼다. 작업실이 없고, 집에서는 쓰기 어려웠다는 게 이유였다. 3개월 동안 썼는데 한 달 간 구상을 했고, 한 달 간은 허리가 아파 누워 있었으며 나머지 한 달 동안 작품의 대부분을 완성했다고 한다. 하루 6시간, 총 11일 출석해 200자 원고지 500매짜리 초고를 뚝딱 내버렸다.

하루 6시간, 총 11일이라니. 작가로서 타고난 재능을 가진 듯한 문지혁이지만 소설 속 Ji Hyuck은 자신이 왜 작가가 되었는지 통탄하는 문장을 써내려간다. 매년 12월 말이면 전국의 문청(文靑)들이 소위 '문밍아웃'을 하는 시기에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소설 속 Ji Hyuck은 이렇게 썼다. '스무 살 즈음, 처음 작가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 그럼 직업은 뭘 가질 거냐?"'

하나 더, Ji Hyuck은 자신의 후회를 합리화하는 데 7년 사귄 여자친구 은혜와 헤어진 순간을 인용한다. 글로 썼는데 대구사투리 어조가 음성 지원된다.

'우리 집 부모는 은혜를 좋아했지만 은혜네 집 어머니는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꼬? 작가가 뭐하는 긴데? 대구에서 중소 규모의 무역 회사를 경영하는 은혜 아버지는 아예 나의 존재를 몰랐다.'

심지어 '왜 아무도 말리지 않았을까, 자기들은 다 알고 있었으면서'라며 옛 학과 교수를 원망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현직 소설가가 진지하게 제안하는 '님아, 그 길을 가지마오' 정도의 적극적 만류다.

그렇기에 '초급 한국어'는 작가가 됐다는, 되려 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은 한 작가의 시련기로 읽을 수도 있다. 시련기와 성장소설은 동의어로 통하니 잘만 읽으면 문청들에게 힘이 될 수도 있다.

'윌리를 찾아라'의 미국판 '월도는 어디에?(Where's Waldo?)' 중 하나. 자료=민음사

'초급 한국어'는 98개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구성돼 집중력이 낮은 이들에게도 권할 만하다. 구술시험을 대화체로 구현한 대목이나 '어디 있어요?'라는 구문을 설명하는 데 썼다는 두 가지 그림, 강원도 화천의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 축제'와 '윌리를 찾아라'의 미국판 '월도는 어디에?(Where's Waldo?)'를 사진으로 실은 친절에도 눈길이 간다.

한편 민음사 측은 2021년에도 현재진행형인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끈적한 호러 판타지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등으로 이름을 알린 장르소설의 신성 조예은, '라면의 황제'로 독자의 검색 능력을 키워준 김희선, 영화감독이자 소설가인 정대건 등을 예고했다. '초급 한국어'는 190쪽. 1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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