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소나기와 무지개, 천둥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리면 흔히 무지개가 나타났다. 이제는 그런 모습 보기가 드물다. 비온 뒤 하늘을 꾸몄던 무지개는 사라졌지만 천지를 울리는 천둥소리는 여전하고 소낙비는 더 잦으니 이상기후 탓인지 알 수 없다. 또 잦은 소나기는 앞에 '국지성'이니 하는 말을 달고 다니지만 무지개는 옛날과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학창 시절, 그리고 커서도 읽고 가슴 한구석에 남았던 황순원 소설가의 '소나기'에 나오는 어린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이제는 아득하다. 대신 가슴 아린 사연이 차지하게 됐다. 천둥 번개가 치고 비, 게다가 소낙비가 쏟아지는 궂은 날을 기다렸다 깊은 산속 인적조차 없는 곳으로 가야만 했던 사람들 이야기 말이다. 특히 장마철 즈음이면 더욱 그런 사연을 떠올린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없고, 가고 싶지도 않은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이야기는 실화이다. 1934년 일제가 저항 한국인을 밤낮 '때려잡는 일'에 매달린 경북의 고등계 경찰을 위해 만든 비밀 자료집인 '고등경찰요사'에는 1927년 8월 여름, 경북의 칠곡과 선산 경계 깊은 산속에서 있었던 한 인물의 행적을 생생히 기록해서다.

'1927년 8월 중…2개의 폭탄을 제조하여 칠곡군과 선산군 양 군 경계의 산중 협곡에서 다른 곳에 폭음이 새어 나가는 것을 우려하여 특히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날을 택하여 이 2개의 폭탄을 따로따로 터지게 하였다. 이에 협곡의 양 벽이 심하게 무너지므로…폭탄의 위력이 건물을 파괴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데 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는 경북 칠곡 출신 장진홍이다. 그는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터뜨려 건물을 부수고 경북도지사와 경찰부장, 대구의 부호 장길상 등을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한국인 고등계 형사의 밤낮을 잊은 정성(?)으로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아 대구감옥에서 수감 중 1930년 6월 5일 36세로 자결 순국했다.

천둥 치고 소나기 내린 뒤 나타난 무지개를 보며 1953년 황순원이 쓴 소설 속 소년 주인공 이야기를 떠올리다, 경북의 어느 깊은 산속 인적 끊긴 계곡을 찾아 천둥 칠 때에 맞춰 폭탄을 터뜨리며 미소를 지었을 30대 청년을 기리는 이들이 더러 있으리라 믿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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