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조선학문의 으뜸고을 성주’ 서원(書院)기행

회연서원 전경.
회연서원 전경. '조선 학문의 으뜸고을 성주'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인물이 많은 경북 성주를 이렇게 묘사했다. "세 고을(성주)의 논은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 그런 까닭에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 성주는 산천이 밝고 수려하여 고려 때부터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 조선에 와서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 고을 사람이다."

동강과 한강은 성주의 '양강'(兩岡)이며, 그 학문이 뛰어나 성주가 조선 학문의 으뜸 고장으로 불리게 한 별(星)이다. 동강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제자이면서도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영향을 받았고, 한강 역시 남명의 제자이자 퇴계의 문인이었다. 이처럼 성주는 조선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인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교유한 곳으로 '조선 학문의 으뜸고을'이었다.

조선학문의 으뜸고을답게 성주에는 수많은 서원이 건립되고 짙은 묵향과 선비의 정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선비의 고장 성주'의 면면을 잇고 있는 서원을 찾아본다.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 강당.
회연서원 강당.

위치 :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4(양정),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1974년 지정)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며 유학자인 한강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 교육을 위해 그의 제자들이 인조 5년(1627)에 회연초당(檜淵草堂) 자리에 세운 서원으로 숙종 16년(1690) 사액(賜額)받았다.

건립초기에는 강당과 사당을 위시하여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양현청(養賢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5년에 사당(祠堂)을 1976년 동·서재를 신축하고 1984년 이후 유물관과 서원 정문인 현도루(見道樓) 등을 건립하여 서원의 위용을 회복하였다.

정구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일찍이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주역(周易)을 배우고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예학(禮學)과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유종(儒宗)이 되었다. 벼슬은 현감(縣監), 군수(郡守)를 거쳐 우승지(右承旨),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목(文穆)이다.

회연서원 견도루.
회연서원 견도루.

서원의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중앙 3칸에 마루를, 양측 칸에 온돌방 1칸 반씩을 배치하고 자연석 초석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강당의 전면에는 회연서원(檜淵書院)이라 현액(懸額)하고, 대청 안에는 경회당(景晦堂)이라 편액(扁額)하였다.

또 동재(東齋)는 명의재(明義齋), 서재(西齋)는 지경재(持敬齋)라 하고, 묘우(廟宇)에는 한강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하고 있다.

향현사(鄕賢祠)에는 송사이(宋師頤), 이홍기(李弘器), 이홍량(李弘量), 이홍우(李弘宇), 이서(李 竹아래舒)의 위판(位版)이 봉안(奉安)되어 있다. 서원 앞뜰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유물 전시관에는 서책과 문집의 각종 판각 등이 보존되어 있었으나, 판각은 안동시 소재 한국국학원(韓國國學院)에 보관 위탁하였다.

◆옥천서원(玉川書院)

옥천서원 강당.
옥천서원 강당.

위치 :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778번지(봉산), 경상북도 기념물 제162호(2009년 지정)

옥천서원은 조선중기 인물로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증직(贈職)된 이사룡(李士龍)을 제향(祭享)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로서, 숙종 14년(1688)경 성주목 이형상(李衡祥)과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鵲村)에 충렬사(忠烈祠)를 처음 건립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년(1796) 사액되었다. 그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년(1872)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1919년 후손들이 집성촌인 용암 봉산(鳳山)마을의 현 위치에 중건(重建)한 건물이다.

이사룡(1612~1640)의 자는 사중(士中),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김산군사(金山郡事) 여신(汝信)의 후손이며, 정건(廷建)의 아들이다. 그는 인조 18년(1640)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병(援兵)으로 징발되어 명나라와 싸울 때 공포(空砲)로 응전(應戰)하다가 청군에게 발각되어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굽히지 않다가 처형되었다. 명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가 '대명충신 조선의사(大明忠臣 朝鮮義士)'라고 크게 써서 장대에 걸고, 청나라 임금도 의로운 일이라 하여 소현세자(昭顯世子)로 하여금 본국으로 반구(返柩)케 하였다. 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월항면 인촌리에 예장(禮葬)·제사(祭祀)토록 하였으며, 그후 정조 17년(1793) 성주목사에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를 세우게 했다.

옥천서원 충렬사.
옥천서원 충렬사.

건물은 용암면 대봉리 봉산(鳳山)마을의 가장 위쪽 산록아래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배치는 경사지를 4단으로 조성하여, 높게 쌓은 축대 위의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忠義齋)와 동·서재가 자리하고 있고, 뒤편에는 내삼문(內三門) 안에 묘우인 충렬사(忠烈祠)를 배치하여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법을 취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본당인 충의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이며, 근년에 건립된 충렬사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또한 동재인 람덕재(覽德齋)와 서재인 양현재(養賢齋)는 각각 3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옥천서원기는 성주목사 오도일( 吳道一)이 지었다.

◆덕암서원(德巖書院)

덕암서원 전경.
덕암서원 전경.

위치 : 성주군 월항면 유월리 1291(상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6호(1994년 지정)

덕암서원은 경산이씨(京山李氏)의 3현(三賢)인 이천배(李天培), 이천봉(李天封), 이주(糸+宙)를 존모(尊慕)하여 현종(顯宗) 13년(1672)에 사림에서 덕암사(德巖祠)를 건립한 것에서 연유한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고종 13년(1876)에 덕암서당(德巖書堂)으로 중건하였다. 지금의 서원 명칭은 1998년 정부의 지원으로 묘우(廟宇), 내삼문, 동·서재 등이 건립되어 이듬해에 서당을 서원으로 개칭한 것이다.

이천배(1558~1604)의 자는 경발(景發), 호는 삼익재(三益齋)로 한강 정구의 문인이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후진 교육에만 전념하여 사림이 추중(推重)하였다.

이천봉(1567~1634)은 천배의 동생으로 자가 숙발(叔發), 호는 백천(白川)이며, 선조 34년(160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당시 의병장으로 천거되어 경상도 의병을 통솔하였다. 인조 6년(1628) 유일(遺逸)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다.

이주(1599~1669)의 자는 신언(愼F), 호는 학가재(學稼齋)로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을 지낸 천증(天增)의 아들이다. 그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여헌문하십철(旅軒門下十哲)이란 칭호를 들었다.

덕암서원 강당.
덕암서원 강당.

서원의 배치구성은 장방형 토석담에 서원을 출입하는 솟을 삼문인 건명문(建明門)이 있고, 북쪽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인 강당과, 그 앞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동·서재가 위치하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강당 뒤쪽에 있다. 강당은 성학당(聖學堂), 묘우는 경현사(景賢祠), 동재는 존성재(存省齋), 서재는 직방재(直方齋)라 편액하였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청천서원 전경.
청천서원 전경.

위치 :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532 (사도실)

청천서원은 1729년(영조 5) 사림들이 동강 김우옹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으로, 1738년에 서계(西溪) 김담수(金聃壽),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을 추향(追享)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1883년 경상도유생들이 복원을 주청(奏請)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청천서당(晴川書堂)을 건립하여 동강 선생만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였다. 1992년 유림들과 후손들의 헌성(獻誠)으로 기존의 서당과는 별도로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건물이다.

김우옹(1540~1603)의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 또는 직봉포의(直峰布衣),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용초(用超)의 후손이며, 삼척부사 희삼(希參)의 아들이다. 그는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에서 태어나 어려서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장성해서는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성리학의 요결을 얻었다. 1567년(명종 22) 식년을과(式年乙科)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친 후 대사헌(大司憲),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올랐으며, 1599년 한성좌윤(漢城左尹)이 되어 모함에 빠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을 위하여 상소(上疏)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저서인 자치통감속강목(資治通鑑續綱目) 판각(板刻)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로 지정되어 서원 내 장판각(藏板閣)에 보관되어 있다.

김담수(1535~1603)의 자는 태수, 호는 서계(西溪) 또는 황계처사(黃溪處士),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귀손(貴孫)의 증손이며, 장사랑(將仕郞) 관석(關石)의 아들로, 조식과 오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64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 24) 선공감참봉(繕工監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으며, 향리(鄕里)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박이장(1547~1622)의 자는 숙빈(叔彬), 호는 용담(龍潭) 또는 도천(道川),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판윤(判尹) 가권(可權)의 후손이며, 승지(承旨) 량좌(良佐)의 아들이다. 조식과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19) 별시을과(別試乙科)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후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시 김성일(金誠一)의 주청(奏請)으로 종사관이 되어 크게 활약하고, 1615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직(削職)되었다.

청천서원 강당.
청천서원 강당.

서원은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沙月里)마을 입구쪽 산록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건물은 사우인 숭덕사(崇德祠), 강당인 일중당(一中堂), 동재인 소원재(溯遠齋), 서재인 경성재(警惺齋), 장판각(藏板閣), 외삼문(外三門)인 수정문(守正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집이며,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동·서재를 배치하였다. 또한 동재의 전면에 2칸 규모의 장판각이 위치하며, 대문은 3칸의 솟을대문을 세워 출입하게 하고, 담장은 돌담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다.

◆오암서원(鰲巖書院)

오암서원 강당.
오암서원 강당.

위치 :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374번지(강정)

오암서원은 조선 중엽의 유학자인 최항경(崔恒慶)과 두 아들 최은, 최린 부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1734년(영조 10) 사림에서 그의 고거(故居)인 오암(鰲巖)에 운암서원(雲岩書院)을 세워 제향하다가, 1741년 서원정리령으로 훼철되었다. 1781년(정조 5) 사의 공론(公論)이 다시 일어 사우와 강당을 세우고 오암서원이라 편액하였으나,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훼철되었다. 그 뒤 1918년에 후손들이 서원터에 서당을 세워 교육의 장으로 삼고, 1977년에 강당 등을 중수하였으며, 2002년에는 후손 창곤(昌坤)이 효덕사(孝德祠)를 건립하고, 2009년 열곤(烈坤) 등 후손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오암정(鰲巖亭)를 건립하는 등 서원의 원역(院域)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사림의 공의(公議)를 얻어 삼부자(三父子)를 향사(享祀)하고 있다.

최항경(1560~1638)의 자는 덕구(德久),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영천(永川)으로 한(漢)의 후손이며, 정(淨)의 아들이다. 그는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 성주의 법산(法山)으로 이주하여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학문이 드러났으며, 1605년(선조 3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매진하였다. 회연서원의 초대 원장(院長)을 역임하고,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贈職)되었다.

최은(1583~1656)은 항경의 장자로서 자는 사행(士行), 호는 관봉 또는 나광자(懶狂子)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633년(인조 11)에 생원이 되고 학덕(學德)이 뛰어나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증직되었다.

최린(1597~1644)은 은의 아우로 자는 사발(士發), 호는 매와(梅窩) 혹은 치광자(癡狂子)이다. 한강 정구의 문인으로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36년 병자호란시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형과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평생토록 청나라 연호(年號)를 쓰지 않았다. 만년에 성리학(性理學) 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오암서원 문루.
오암서원 문루.

건물은 국도 33호선 수륜면과 고령군 경계지점의 우측 산록 아래에 동남향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를 3단으로 조성하여 좌측 상단에는 묘우인 효덕사(孝德祠)를 동향하여 배치하고, 중단에는 강학공간(講學空間)인 강당을, 하단에는 재숙(齋宿)을 위한 재사(齋舍)와 오암정(鰲巖亭),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다. 본당인 강당은 규모가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남향하여 위치하며, 구조는 중앙에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1칸씩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온돌방 전면에 툇마루를 두어 대청과 서로 연결하였다. 또 견치석을 높게 쌓은 기단(基壇) 위에 원형의 화강암 초석(礎石)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강당의 앞쪽 좌측에 남서향한 솟을대문을 두어 출입하고 있다. 묘우인 효덕사는 3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정면에 내삼문(內三門)을 두고 연접하여 토석담장을 둘러 구획하였으며, 서원 밖에 동향하여 위치한 재사(齋舍)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1칸 마루를 두고 좌우측에는 온돌방 각 1칸씩과 부엌을 두었다. 또 재사의 우측에 위치한 오암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사각기둥을 세웠으며, 온돌방 1칸과 2칸의 마루를 두었다.

◆운양서원(雲陽書院)

운양서원 강당.
운양서원 강당.

위치 : 성주군 벽진면 운정리 517 (우복실)

운양서원은 조선 중종 때 문신, 학자였던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의 학덕(學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원이다. 원정은 처음 천곡서원(川谷書院) 동별사(東別祠)인 향현사(鄕賢祠)에 제향(祭享)되었는데, 고종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그의 묘소(墓所)가 있는 이곳에 후손들이 1935년경 운양서당(雲陽書堂)을 건립하였으며, 그 후 중창(重創)하여 운양서원으로 개편(改扁)하였다.

여희림(1481~1553)의 자는 대지(大之), 호는 원정(圓亭),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성종 때의 원종공신 선공감역(繕工監役) 우창(遇昌)의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도형(都衡), 이광(李光) 등과 함께 공부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과거를 단념하고 사림으로 지내다가 중종 2년(150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517년 영상(領相) 정광필(鄭光弼)의 천거(薦擧)로 왕자 복성군(福城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518년 현량과(賢良科)가 설치되자 형 희단(希端)과 함께 천거되었으나 응시하지 않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禍)를 면하였다. 1522년 복성군 유배시 사부를 지냈던 것으로 기장(機張)과 함평(咸平)에 유배되었으며, 1538년 등용되어 지평(持平)에 올랐다. 그 뒤 귀향하여 수촌리에서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시행하기 위하여 월회당(月會堂)을 일으켜서 남전향약의 첫 보급자가 되었다.

운양서원 전경.
운양서원 전경.

서원은 벽진면 운정리 우복실마을 뒤편, 산록이 감싸안은 곡내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건물은 토석담장을 두른 솟을삼문 내에 강당을 중심으로 전면 양측에 동재(益智軒)와 서재(敦禮齋)가 위치하고, 강당의 동쪽에 별도로 구획하여 사당인 명덕사(明德祠)가 있다. 강당은 화강석 기단을 높게 쌓아 계단을 두었으며,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ㄷ자형 팔작지붕으로 중앙 3칸에 마루를 놓고 좌우에 각각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로 되어있다. 기둥은 전·후열에만 두리기둥을 놓았다. 동·서재는 정면이 각 3칸의 맞배지붕으로 모두 방을 두었다. 또한 사당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내삼문(內三門)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기와가 노후하여 모두 동(銅)기와로 교체하였다.

◆안산서원(安山書院)

안산서원
안산서원

위치 : 성주군 벽진면 자산리 41 (안산)

안산서원은 성주이씨(星州李氏) 중시조(中始祖)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을 위시한 현조(顯祖) 22인을 제향(祭享)하는 서원으로, 처음에 월항면 인촌리 선석사(禪石寺)에 영정(影幀)을 봉안하는 사당(祠堂)이 있었는데, 이장경 묘소가 왕실에서 조성한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의 도국(圖局)안에 있어 1444년 묘소를 옮기면서 영당(影堂)도 지금의 장소인 벽진 자산리 안산(安山) 안봉사(安峯寺)의 영당에 봉안하였다.

사림의 공의(公議)에 의해 서원이 건립되어 1680년(숙종 2) 안산서원(安山書院)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안산재(安山齋)로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여러 차례 건물을 중건 중수하여 오다가 2005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 서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산서원 동·서재.
안산서원 동·서재.

건물은 벽진면 자산리 옛 안산촌의 산록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본당과 동·서재가 일곽을 이루고, 그 우측으로 일각문과 영당(影堂)이 구분되어 일곽을 이루고 있다. 또 그 전면에는 부속건물과 관리사가 위치하고 있다. 본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2칸 마루를 두고, 양 측면에 각 1칸 씩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며, 동·서재는 각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에 마루를 양 측면에 온돌방을 두었다. 영당은 서원 동쪽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모두 통마루로 되어있다. 서원에 제향(祭享)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李長庚, 李百年, 李千年, 李萬年, 李億年, 李兆年, 李麟起, 李承慶, 李褒, 李元具, 李仁復, 李仁任, 李仁敏, 李崇仁, 李稷, 李濟, 李師厚, 李智活, 李恒, 李晁, 李稶, 李光迪

◆문곡서원(汶谷書院)

문곡서원 전경.
문곡서원 전경.

위치 : 성주군 초전면 월곡1리 600 (홈실)

문곡서원은 고려때 충신인 문안공(文安公)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조선 영조 26년(1750) 사림에서 건립하였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어 문곡서당으로 이어 오다가, 1983년 후손들이 크게 중창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이견간(고려 원종~1330)의 자는 직경(直卿), 호는 국헌(菊軒), 본관은 벽진(碧珍)으로, 벽진장군(碧珍將軍) 총언의 후손이다. 그는 고려 충렬(忠烈), 충선(忠善), 충숙왕(忠肅王) 3대에 걸쳐 벼슬이 통헌대부, 민부전서, 집현전대제학, 지밀직사사, 홍문관사 등을 역임했다. 고려 충숙왕 4년(1317)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상주객관(常州客館)에서 지은 두견시(杜鵑詩)는 천하에 명성을 떨쳐 그를 세상에서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불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곡서원 강당.
문곡서원 강당.

서원은 초전면 월곡리 홈실 뒷뫼마을 중앙에 동향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넓은 평탄지에 본당과 동재(勤篤齋), 서재(存省齋), 대문간(進修門)이 튼ㅁ자형을 취하고 있다. 또한 본당의 좌측 후면 별도 곽내에 사당인 현덕사(顯德祠)가 위치하고 있다. 본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대청 2칸을 중심으로 양 측칸에 1칸 반의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이며,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전퇴주열(前退柱列)에만 두리기둥을 세웠다. 동·서재는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 맞배집이다.

◆도암서원(道巖書院)
위치 : 성주군 선남면 문방리

도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낸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향내 사림이 1800년경에 선남면 문방리에 건립한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거 훼철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서원의 위치와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송계문집(松溪文集)에 좌랑(佐郞) 이규진(李奎鎭)이 지은 상량문(上梁文)이 수록돼 있다.

권응인(1517~?)의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송계(松溪),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희맹(希孟)의 아들이다. 그는 성주 선남면 오도리 출신으로 재주가 뛰어났으며,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벼슬은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지냈다. 1562년(명종 17) 문장이 능한 일본 사신이 왔을 때 시재(詩才)가 뛰어났으므로 특명으로 선위사(宣慰使) 일행의 한사람이 되어 이를 맞았다. 당시 송대(宋代)의 시풍(詩風)이 유행하던 문단(文壇)에 당나라 후기의 시풍을 받아들여 큰 전환기를 가져왔으며, 시평(詩評)에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著書)로 송계시집(松溪詩集)과 송계만록(松溪漫錄)이 전하고 있다.

◆도천서원(道川書院)
위치 : 성주군 대가면 도남리

도천서원은 조선 영조 원년(元年) 유림이 발의하여 처음 가천면 창천리 사뢰촌(思瀨村)의 동쪽 기슭에 건립하고 등암(藤庵) 배상룡(裵尙龍)을 제향(祭享)하였으나, 나라의 서원정리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정조 10년 병오년(丙午, 1786)에 나라의 금령(禁令)이 풀려 정조 15년 신해년(辛亥, 1791)에 대가면 도남리(지금 道南齋의 북쪽)에 중건하고 등암 배상룡과 아우 괴재(愧齋) 배상호(裵尙虎)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다시 훼철된 후 복원하지 못하고 영당(影堂)만 보존되고 있었으며, 후에 후손들이 서원터 남쪽에 도남재(道南齋)를 건립하였다. 현판(懸板)이 현재 안동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배상룡(1574-1655)의 자는 자장(子章), 호는 등암(藤庵),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의 손자이며, 경상우수사 설(楔)의 아들이다. 그는 정구와 장현광의 문인으로 학문과 행의가 드러났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사림이 추중(推重)하였다. 스승인 한강과 여헌의 별세 때는 제자로 심상(心喪) 3년하고, 서원건립과 문집발행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그의 공거문(公車文;應試, 應製, 疏章 등의 시문)이 뽑혔으나 아버지가 비명으로 하세(下世)하자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힘썼다. 1637년(인조 15) 천거로 선교랑(宣敎郞)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았으며, 1774년(영조 50年) 통훈대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배상호(1594-1632)의 자는 계장(季章), 호는 괴재(愧齋)로 상룡(尙龍)의 아우이다. 형과 함께 정구와 장현광의 문인으로 1624년(인조 2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의 강청(講廳)에서 임금의 후의를 받았으며, 학문과 덕망이 뛰어나 성균관(成均館)에서 장의(掌議)를 지내는 등 유소(儒所)의 여러 임직(任職)을 역임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천곡서원(川谷書院)
위치 :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영봉산 자락)

천곡서원은 벽진면 수촌리에 있었던 서원으로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1568)이 사림의 공의(公議)를 모아 폐사지(廢寺址)인 지장사(智藏寺) 터에 1558년(명종 13) 창건하고, 목사 황준량(黃俊良)이 이를 이어 공사를 마쳤다. 처음에는 영봉서원(迎鳳書院)이라 편액(扁額)하고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과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을 봉안(奉安)하였으나, 문목공(文穆公) 한강 정구가 와룡고사(臥龍故事)를 인용(引用)해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품의(稟議)하여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개칭(改稱)하고 정자(程子:程 ), 주자(朱子:朱熹)와 김굉필(金宏弼)의 위패(位牌)를 모셨다. 1624년 사액(賜額)되고 1607년 중액(重額)되었으며, 그 후 인조 계해년(癸亥, 1623)에 조정에 요청하여 문목공 정구를 종사(從祀)하였고, 임오년( 1643)에 문강공(文康公) 여헌 장현광을 종사(從祀)케 하였다.

창건 당시 건물의 규모는 50 여칸으로 정당(正堂)을 성정당(誠正堂), 동재를 극복재(克復齋), 서재를 경의재(敬義齋)라 하고 문루(門樓)를 고명루(高明樓)라 하였으며, 풍영당(風詠堂)을 두었다. 또 별사(別祠)로 충현사(忠賢祠)를 두어 문열공 이조년․문충공 이인복을 향사하다, 계유년(癸酉, 1633)에 충익공(忠翼公) 정곤수(鄭崑壽)를, 병오년(丙午, 1666)에 문충공(文忠公) 이숭인(李崇仁)을 병향(竝享)했다. 향현사(鄕賢祠)를 두어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 행정(杏亭) 도형(都衡),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 충숙공(忠肅公) 송희규(宋希奎), 칠봉(七峰) 김희삼(金希參), 대암(臺巖) 홍계현(洪繼玄)을 제향(祭享)하였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서원의 기문(記文)은 퇴계 이황이 지었다.

사진제공: 성주군

참고문헌: 성주누정록(星州樓亭錄), 성주문화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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