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일 오후 4시 40분쯤 대구 수성구 범어동 한 주유소. 이곳에 20ℓ 규모의 말통을 들고 직원에게 휘발유를 구매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직원은 의심의 눈초리도 없이 휘발유를 말통에 담아줬다. 그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며 구매 목적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같은 날 오후 7시 취재진이 수성구 지산동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매하자 앞서 찾은 주유소와 달리 이곳 관계자는 사용 목적을 묻고 휘발유를 판매했다. 이 관계자는 "혹시 몰라 목적을 묻고 휘발유를 건네주고 있는데 다들 그럴듯한 이유를 댄다"며 "구매자가 말한 것처럼 사용할지는 의문이고 전혀 알 길 없다"고 말했다.
최근 대구 법조빌딩 방화에 휘발유가 사용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인화물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누구나 손쉽게 넣을 수 있는 여건 속에 자칫 방화 범죄 등에 악용될 우려가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대구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9일 수성구 범어동 한 변호사 사무실에 불을 지른 방화 피의자가 사용한 인화물질은 휘발유인 것으로 드러났다. 대구경찰청 관계자는 "용의자가 어디서 휘발유를 구매했는지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화물질에 의한 방화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30여년 전 대구 서구 비산동 한 나이트클럽에서 출입을 거부당한 사람이 앙심을 품고,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구매해 방화를 저질렀다. 이 사고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난 2003년에는 도시철도 1호선 전동차 객실 바닥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19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현행법상 방화를 목적으로 휘발유를 구매하더라도 이들의 속셈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위험물안전관리법'에 따라 제4류 위험물로 구분되는 휘발유는 말통 등 플라스틱 용기에 최대 20ℓ까지 담을 수 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셀프 주유소' 경우 용량 위반도 확인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방화 범죄 등에 악용될 수 있는 휘발유 구매를 예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본의 경우 36명이 사망한 2019년 7월 교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방화 사건을 계기로 관련 제도를 도입했다. 휘발유를 차량에 바로 주입하지 않고 휴대용 용기에 채워주는 방식으로 판매할 때에는 구매자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사용 목적 등을 기록하게 한다.
백찬수 대구보건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국내에도) 인화물질을 사러 오는 이들에게 신분 확인을 하고 목적을 기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며 "더 나아가서 수상한 구매자에 대해 경찰과 소방에 신호를 줄 수 있는 플랫폼까지 갖춰진다면 불필요한 구매가 걸러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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