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대구)부 후생과장 백창흥 씨의 검거를 필두로 시작된 관공서 각 직장에 대한 경찰 당국의 검거 여풍은 10일 부청 직원 23명과 도 수의과장 정명술 씨를 또 11일에는 도 상공국장 신현수 씨를 위시한 과장·계장급 직원 27명의 검거로 직장 내부에 대한 불안한 공기를 자아내고 있었던바 13일에는 식량 사무소에서 14일에는 대구 형무소 간수를 검거하는 등 검거범위는 점점 확대하고 있는데~'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 16일 자)
1948년 6월 11일 경북도청은 오전부터 긴장감이 돌고 어수선했다. 직원들은 일손을 놓은 채 우왕좌왕했다. 경찰이 들이닥쳐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며 직원들을 검거했다. 국장을 포함해 30여 명의 직원이 끌려갔다. 이미 나흘 전에 경찰은 도청에서 한차례 검거 작전을 벌였었다. 기자들의 출입마저 막고 검거 작전을 벌이는 바람에 이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이날 도청을 급습한 경찰은 사찰계로 대구를 포함한 경북 담당의 5관구경찰청 소속이었다.
검거 선풍은 시간이 갈수록 확대됐다. 경북도에서 대구부로, 또 공공기관으로 번졌다. 대구부에서는 후생과장 등 간부와 직원 20여 명이 잡혔다. 경북도와 대구부서 검거된 직원은 60여 명에 이르렀다. 뒤이어 식량 사무소 직원과 대구 형무소의 간수도 검거됐다. 지명수배자도 수십 명에 이르렀다. 경찰은 대구부 내 회사와 금융기관 직원도 수사대상에 올렸다. 일주일 만에 경찰에 검거된 숫자만 약 1백 명에 달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공무원의 대량 검거는 한 달 전에 실시됐던 5월 10일 총선거와 연관이 있었다. 제헌의회를 구성하는 선거를 앞두고 찬반이 대립했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분단을 고착화하고 통일을 불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학생과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동맹휴업과 파업을 벌였다. 단선·단정 반대 운동에는 공무원들로 가담했다.
'~사건 내용은 5·10선거 반대를 주로 직장 남로당 세포를 조직하고 이에 가담하는 삐라 살포,경찰 타도, 강수창 타도 등에 종사하며 이의 증거로 원문 기초원안을 압수하였음. 과장은 동과 내의 교양에 책임을 지고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도청 내에 남로당 쁘락지를 넣고 관공서의 기밀을 빼내는데 주로 활동함은 도청 용지를 사용해서 입후보자의 명부를 작성한 것 등으로 보아 증거가 확실하다고 한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6월 16일 자)
경찰은 선거가 끝난 후 5·10선거 반대 운동에 나선 공무원들에게 칼을 들이댔다. 남조선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공무원들이 선거 반대를 한 것으로 발표했다. 경찰이 공무원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검거에 나선 이유였다. 당시 단선·단정 반대진영에서는 투쟁위를 만들어 삐라를 뿌리고 파업을 벌였다. 이들 구호 중에는 경찰 타도도 들어 있었다. 경찰의 강제 진압에 대한 반발과 악랄했던 일제 순사의 악몽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선거 전에 단선 반대 운동은 곳곳에서 벌어졌다. 선거 전날인 9일 경북도청에는 아침부터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삐라로 앞마당이 덮였다. 도청 당국은 모든 직원을 회의실에 모아 파업을 벌이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동맹 파업을 벌이면 사표를 내야 한다는 지침도 전달했다. 이에 비해 동 행정청에서는 파업에 들어갔다. 출근 후 직원들은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곧바로 일터를 떠났다.
대구소방서 직원들도 선거 반대 운동에 동참했다. 단선 반대와 남북협상 지지의 구호 아래 파업에 돌입했다. 식량 사무소 역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내용의 삐라를 뿌린 후 파업을 벌였다. 남선전기는 새벽부터 신천동의 조선 전업발전소에서 종업원들이 일터를 떠났다. 이들의 파업으로 송전이 중단되어 부민들은 컴컴한 새벽을 맞았다. 뿐만이 아니었다. 삼덕과 칠성, 봉산, 서부 국민학교 등 교원들 사이에도 파업 선언이 잇따랐다. 이로 인해 교원 10여 명은 파면을 당했다.
경찰의 검거 선풍은 법원과 검찰청까지 번졌다. 하지만 전체적인 검거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권력을 향한 과잉 충성이 낳은 과잉검거라는 말을 들을만 했다. 검거 보름 만에 검찰청 5명, 치안관실에 10명을 넘기는 등 15명이 구속됐다. 모두 다 포고령 2호 위반 혐의였다. 포고령은 1945년 9월 7일 미군의 한반도 진입과 동시에 발표된 통치내용이었다. 포고 2호는 점령지역의 공중치안 질서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 위반하면 사형 또는 엄벌에 처하도록 했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내용이어서 그 시대에 적지 않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경찰의 공무원 검거 작전은 이후에도 간간이 이어졌다. 경찰을 향한 반발과 분노 또한 끊이지 않았다. 공무원들이 경찰을 성토하는 삐라를 대량으로 뿌리기도 했다. 권력만을 쳐다본다는 불만이었다. 그럴 때 경찰의 그 자리는 언제나 녹슬었다. 지나간 시대가 그랬다.

박창원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댓글 많은 뉴스
권성동 "김문수, 알량한 후보자리 지키려 회견…한심한 모습"
국힘 "김문수 후보 선출 취소·한덕수 입당 및 후보등록 진행"
한덕수 "김문수, 약속 지켜야…사실 아닌 주장 계속되면 바로잡을 것"
김기현 "김문수, 단일화 믿은 당원에 사과해야"…"의원 20명 창당? 100% 반대" [뉴스캐비닛]
김문수 "야밤에 정치 쿠데타…법적조치 즉시 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