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그립습니다] 박인주(서양화가) 씨의 스승 고 김정기 대구미술협회장

"활짝 피우다 멈춰버린 당신의 열정, 이리도 안타깝고 원통할 따름입니다"

고 김정기 대구미술협회장이 화실에서 박인주 씨 등 제자들과 촬영한 한 때. 왼쪽 첫 번째가 고 김정기 회장, 그 다음이 박인주 씨. 박인주 씨 제공.
고 김정기 대구미술협회장이 화실에서 박인주 씨 등 제자들과 촬영한 한 때. 왼쪽 첫 번째가 고 김정기 회장, 그 다음이 박인주 씨. 박인주 씨 제공.

고 김정기 회장님과 저의 인연은 15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림 그리는 게 좋아 결혼 후에도 붓을 놓지 못하는 어리숙한 30살의 신입회원과 패기 넘치고 두려울 것이 없던 대구수채화협회 신임회장님. 그것이 첫 만남이었습니다.

'대·수·협' 회장님인 고 김 회장님은 임기 첫 해부터 수채화공모전 개최에 대한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존 공모전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완하여 공정하고 맑은 물처럼 투명한 수채화공모전을 만들고 싶다며 가시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회장님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설득하셨고, 기필코 공모전을 개최하는 쾌거를 이루셨습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습니다. 말릴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유가 타당했고 확신에 차 있는 회장님의 모습에 모두가 확고한 의지를 다지고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15년동안 한결같은 모습의 회장님을 뵈었습니다. 내 뱃 속을 채우는 일이면 그리 할 수 없었을거라 하시며 주변 작가들, 여러 단체, 나아가 대구미술발전을 위하는 일이라면 쓴소리를 들으면서도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늘 말씀하시던 "같이의 가치", 혼자가 아니고 함께 할 때가 얼마나 더 가치 있고 보람된 것인지 아느냐며 설교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자신보다는 타인을, 개인보다는 단체를 우선으로 하시며 대구의 굵직한 단체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시면서 "같이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회장님은 가끔 당신을 물 위를 떠다니는 오리에 비유하곤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여유롭게 떠다니는 수면 위의 모습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물 밑에서는 단 1초도 쉬지않고 다리를 움직이며 헤엄치는 모습을 보면 매일 매일을 바쁘게 움직이고 또 내일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신과 참 많이 닮은 것 같다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 회장님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는 제가 마음이 쓰이셨는지 현실과의 타협을 해야 하는 시점이 찾아오면 초심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는 게 좋아 시작했다면 니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라! 꾸준히 한발씩 내딛다 보면 길이 보일거다" "그것이 10년후 20년후가 되어도 무슨 상관있느냐, 우리는 붓을 잡고 있는 한 이미 이룬 것이다. 행복하지 않느냐"며 웃어주셨습니다.

그리곤 "구상작가의 가장 빛나는 시기는 60대"라며 당신의 60대가 너무 기다려지고 설렌다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되면 60대의 열정 넘치는 작가들과 함께 청년작가전을 꼭 할꺼라 하시며 끝없는 작업에 대한 열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코로나19가 대유행하던 힘든 시기에도 작업실에서 실컷 작업만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고 당신에게 처음 찾아온 휴가라 하시며 시큰거리는 손목에 뜸을 떠가며 붓질을 하시던 모습이 여전히 제 눈 앞에 계신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찰나처럼 지나버린 시간동안 늘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신 당신. 늘 당당하고 곧아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다는 김정기회장님의 이미지가 수면아래 오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숨이 턱끝까지 차 올라 버거울 만큼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활짝 피우다 멈춰버린 당신의 열정이 이리도 안타깝고 원통할 따름입니다.

당신의 빈자리가 어떤걸로도 채워지지 않아 모두가 공허함을 끌어안고 지내는 요즘입니다.

안동 어느 절에서 회장님의 49제를 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먼 길 떠난 당신이 힘들지 않게 잘 도착하길 바라는 애도의 마음이 공존하는 가운데 말을 아끼며 두 손 모아 절을 올려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늘 함께 하겠지만… 많이 그립고 그립습니다.

----------------------------------------------------------------------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매일신문이 함께 나눕니다. '그립습니다'에 유명을 달리하신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 밖의 친한 사람들과 있었던 추억들과 그리움, 슬픔을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를 참고해 전하시면 됩니다.

▷분량 : 200자 원고지 8매, 고인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 1~2장

▷문의 전화: 053-251-1580

▷사연 신청 방법
1. http://a.imaeil.com/ev3/Thememory/longletter.html 혹은 매일신문 홈페이지 '매일신문 추모관' 배너 클릭 후 '추모관 신청서' 링크 클릭

2. 이메일 missyou@imaeil.com

3. 카카오톡 플러스채널 '매일신문 그립습니다' 검색 후 사연 올림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