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스친다. 계절이 바뀌면서 코스모폴리탄이던 친구가 떠났다. 나의 오랜 벗인 마에스트로 줄리안 코바체프(1955~2023)는 내 영혼의 단짝이자 무엇 하나 흠 잡을 곳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 배움이 많은 친구, 본받고 싶은 친구, 나에게 성찰을 주는 친구,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이 완벽한 친구와의 만남을 회피하기도 하고, 가끔 짬을 내 만나도 피곤함에 못 이겨 금방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도 친구는 늘 웃으면서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나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마음 편한 친구가 늘 곁에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일상에 쫓기며 스트레스를 받던 나를 잠시 내려놓고, 이 친구에게 기대어 쉴 수 있음에 감사했다. 평탄하기만 한 인생길이 어디 있으랴. 굽고 울퉁불퉁 험한 길이라도 걷다 보면 마음의 깊이를 재면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법이다.

그가 대구시립교향악단 지휘자로 부임하며 처음 그를 만났다. 그와의 추억들을 잠시 더듬어 본다. 2014년 3월 30일 낮 12시 인천공항. 할리우드 영화배우같이 생긴 멋진 중년 남자가 은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두리번거리던 그에게 다가갔다. 나는 내 소개를 마친 후 공항버스 탑승장으로 갔다. 일요일 오후라 대구행 리무진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버스 맨 뒤에 남은 두 자리를 겨우겨우 차지한 우리는 겨우 숨을 돌렸다.
코바체프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어느 도시, 어느 공연장을 가더라도 고급 전용차로 나를 마중 나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주말을 할애해 사비를 써서 공항까지 그를 맞이하러 나간 나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버스 뒷좌석처럼 덜컹거렸다. 하지만 나의 한마디에 코바체프는 오해를 풀었다. "앞으로 대구의 클래식 음악 저변 확대만 신경 써 주십시오. 지휘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24시간 동안 잘 보필해 드리겠습니다."

서울에서의 초청 연주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온 적이 없었던 코바체프에게 대구는 생소한 곳이었다. 그가 교향악단 업무를 익히고 자리를 잡는 것만큼이나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대구 생활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잦은 해외 공연으로 이국에서의 생활이 익숙했던 그는 이후 내내 호텔에 기거했다. 장기간 묵을 곳으로 옮기자고 설득하는 데만 7개월이 걸렸다.
그해 11월이 되어서야 주거 공간을 마련했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코바체프를 위해 3개월간 새벽 강습을 동행하며 같이 테니스도 쳤다. 식사의 경우에도 한 가지 메뉴에 입맛을 들이면 그는 늘 같은 메뉴를 고집했다. 한때 돈가스를 좋아해서 매주 서너 번씩 함께 경양식을 먹곤 했다. 주말에는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스타디움 할 것 없이 대구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와 함께 다니며 대구를 알리고, 대구에 정을 붙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2015년 7월 그와 함께 베로나, 밀라노, 베네치아까지 여행했다. 길었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것들이 참 많다. 무엇보다 이 여행의 사랑스러운 동행, 바로 내 친구 코바체프가 있었기에 낯선 타국에서도 외롭지 않고 행복했다.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인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Arena di Verona Opera Festival)에서 코바체프가 지휘하는 오페라 〈아이다〉를 관람한 일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일전에 몇 번 감상했던 작품이었지만, 아레나에서 코바체프가 지휘하는 〈아이다〉는 거대한 무대와 웅장한 음향으로 순식간에 나를 압도했고, 그 광경은 지금도 생생히 가슴에 남았으며, 이 세계적 지휘자가 바로 우리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에도 고인과 함께 병원을 오가며 일상적인 농담과 근황을 나누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날이 그와의 마지막 하루인 줄 알았더라면 따듯한 밥 한 끼, 차 한 잔이라도 나누고 헤어졌을 텐데 지금은 아쉬움과 후회, 그리움만 남았다. 오늘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하늘로 먼저 가버린 그 친구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눠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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