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인영의 풍수이야기] 영양군 석보면 두들 마을과 여중군자 장계향

석계 이시명이 개척한 재령이씨 집성촌 두들 마을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 남긴 부인 장계향
큰 반상 위 과일 얹혀 부의 기운 지녀…독립운동 자금 대기도
시인·묵객 배출하는 곤방…거장 이문열 작가 배출

두들마을 전경.국도변에서 보면 지대가 상당히 높다. 그래서 지명이 언덕을 뜻하는 '두들'이라 했다.(영양군 제공)
두들마을 전경.국도변에서 보면 지대가 상당히 높다. 그래서 지명이 언덕을 뜻하는 '두들'이라 했다.(영양군 제공)

곱게 물던 단풍잎도 어느덧 낙엽 되어 흩어지고 추수가 끝난 농촌 들녘에는 볏집 뭉치들이 군데군데 놓여있다. 경상북도 영양군의 남쪽 화매천변에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인 두들 마을이 있다. 재령이씨 후손인 이충섭(李忠燮, 77세) 씨의 안내로 두들 마을 전반을 둘러보고 문중에서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두들 마을은 광로산(匡蘆山)이 남서쪽으로 뻗어내려 형성된 마을로 동쪽에는 병암산(屛岩山)이 병풍처럼 서 있고 인지천과 화매천 두 물이 마을 입구에서 만나 마을 전체를 둥글게 감싼 후 반변천(半邊川)으로 흘러간다. 국도변에서 보면 지대가 상당히 높다. 그래서 지명이 언덕을 뜻하는 '두들'이라 했다.

◆석계 이시명과 부인 장계향

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1590~1674)이다. 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석계의 아들 중 넷째 숭일(崇逸)이 선업(先業)을 이었고 후손들이 번성하여 재령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 마을은 석계 이시명이 영해에서 이곳에 이주 정착한 후 크게 문풍이 일었던 곳이다. 그는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평재(平齋) 이융일(李隆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등 여러 아들과 더불어 손자 밀암(密菴) 이재(李栽)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전하였다.

석계고택.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이다.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석계고택.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이다.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근세에 의병 대장을 지낸 내산(奈山) 이현규(李鉉圭), 독립운동가 이돈호(李暾浩)와 이명호(李命浩), 이상호(李尙浩), 전 산업자원부 장관 이희범(李熙範), 안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이희재(李熙載) 등도 이 문중 출신이다.

그의 부인 안동장씨(安東張氏) 장계향(張桂香·1598~1680)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을 집필한 여중군자(女中君子)로 이름이 높다. '음식디미방'은 여성이 남긴 유일한 음식 조리 기록이다. 이 책은 본인 집안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조선의 당시 요리와 식문화를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1600년대 조선조 중엽, 경상도 지방의 가정에서 실제 만들던 음식의 조리법과 저장 발효식품, 식품 보관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시대적 상황이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약받던 시절에 그것도 일흔이 넘은 나이에 후대를 위하여 책을 저술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임은 틀림이 없다.

석계고택.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이다.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석계고택.두들마을을 개척한 이는 석계(石溪) 이시명이다.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1564~1633)이다. 그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벼슬도 마다한 채, 집 가까이 광풍정(光風亭)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을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낸 인물이다. 이러한 경당이 서른다섯 살 되던 해에 얻은 여식이 장계향이다.

19세에 부친의 제자이면서 부인과 사별하고 1남 1녀를 키우고 있는 이시명과 결혼,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으며 이휘일·이현일 등 대학자를 길러내었다. 그녀는 중용(中庸)의 모범을 보이는 군자와 같은 삶을 살았으며 특히 자신의 재주를 드러내기보다 한 가정의 평범한 딸이자 가정주부로서 10명의 자녀를 훌륭히 키워냈고 시가와 본가 두 집안을 명문가로 일으켜 세웠다.

장계향은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부친으로부터 학문과 글을 익혔고 그림에도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 화가이자 서예가, 시인, 요리 연구가였으며, 고아나 과부, 노약자들을 남몰래 도운 빈민 구제가이기도 하였다. 정조(正祖)도 장계향의 서첩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올리도록 명해서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하니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석계고택 사랑채
석계고택 사랑채

◆큰 반상 위, 과일이 얹혀 있는 모습

두들 마을을 풍수학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 두들 마을의 풍수적인 형상은 음식이나 과일 등을 담는 둥근 소반형이다. 두들 마을은 그중에서 금속재로 만든 소반 즉, 금반형(金盤形)이다. 소반형은 옥병, 옥잔, 옥젓가락, 과일, 떡시루, 퇴육(堆肉) 등을 안으로 하는데 여기는 음식을 올려놓는 큰 반상(盤床) 위에 과일이 얹혀 있는 모습이다.

소반형은 사방 네 귀퉁이와 가운데 혈(穴)이 맺힌다. 석계고택이 마을 중심의 혈처이다. 소반형은 소반에 음식이나, 과일을 담는 것과 같이 부자도 될 수 있는 기운이 있다. 이곳 두들 마을에는 만석꾼 부자도 있었고 그 부잣집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대었다고 한다.

석계고택은 이 지역의 기후 조건과 안산에 합당한 장방형의 건물 형태로 일자형(一字形)의 사랑채와 안채가 이자형(二字形)으로 배치되어 있다. 고택에서 보는 안산(案山)은 매우 편안한 느낌을 준다. 반상 형상의 나지막한 토성체의 산이 길게 펼쳐져 있다. 풍수에서 조안산의 의미는 나의 배우자, 이웃, 사회, 여론 등으로 해석한다.

흔히들 땅을 어머니에 비유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해 주기 때문이다. 안산이 땅을 의미하는 토성체이고 방위가 안방마님을 뜻하는 곤(坤)방이다. 이 두 가지 기운이 어우러지니 두들 마을의 아낙네들은 남들보다 월등히 강한 모성애와 포용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장계향 묘소
장계향 묘소

또한 곤방은 시인, 묵객을 배출할 수 있는 기운을 가진 방위이니 장 부인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눈도 침침한데 매일 밤 촛불 아래에서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열정은 이곳 두들 마을의 기운이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항일 시인인 이병각(李秉珏)과 이병철(李秉哲), 현대문학의 거장 이문열(李文烈) 작가를 배출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터의 기운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지훈 시인을 배출한 영양 주실 마을도 간좌 곤향의 마을 터이다. 자연이 완벽한 곳은 없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화매천 물길 따라 불어오는 바람이 강한 지역이라 건강과 화재에 유의하여야 한다.

두들 마을은 주산 줄기가 다섯 손가락의 형상이고 그 아래에 소반이 놓여 있으니, 손으로 음식을 조리해서 소반 위에 올리는 기운이 함축된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이 건립된 것은 땅과의 절묘한 조화라고 아니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합일되니 향후 전통음식체험의 관광 명소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필자가 방문 당시에도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풍수적 요인을 스토리텔링화하여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면 관광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장 부인은 선조 31년(1598) 경북 안동 금계(金溪)에서 태어나 숙종 6년(1680) 83세를 일기로 영양 석보에서 타계하였다. 말년에 안동부 도솔원에서 다시 대명동(현,풍산읍 수곡리)으로 이주한 관계로 그녀의 묘소는 수곡리 산록 부군의 묘 상단에 있다. 대명당의 묘소이다. 접근하는 길을 잘 정비하여 풍수 관광코스로 거듭났으면 한다. 셋째 아들 현일이 사헌부 대사헌에 올라 법전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여성의 학문적 자유나 사회적 제약이 많았던 시대에, 여중군자로서의 삶을 살다간 장 부인의 일생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노인영 문강풍수지리연구소 원장

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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