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집행 전, 교도소 측은 사형수를 위해 '최후의 만찬'을 배려해준다. '이왕 죽을 건데…' 라면서 최고급 메뉴를 고를 것 같은데 아니다. 산해진미가 아니다. 소박하고 질박한 메뉴가 주종을 이룬다. 대구 출신이라면 따로국밥, 수구레국밥, 납작만두, 뭉티기, 갱시기, 막창, 닭똥집튀김, 구룡포 출신이라면 모리국수, 안동 출신이라면 건진국수나 간고등어와 돔배기가 들어간 헛제삿밥을 그리워할 것이다. 신토불이 음식, 태어난 곳에서 10리(4km) 안의 '로컬푸드'이다.
프리미엄급 밥상은 권세가의 몫일지언정 소시민의 영역은 아니다. 임금을 위한 수랏상도 여느 남도 백반 밥상 수준을 넘어서지 않았다. 고작 12첩 반상.
식감은 결국 소박한 것으로 돌아온다. 마치 처음 낚시를 배운 사람이 해외원정 선상낚시 등까지 도전해보지만 궁극에는 강태공의 낚시 버전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식탐은 혀를 즐겁게 할지언정 몸에는 별로 유익하지 않다. 맘이 평화로워지면 자극적인 걸 멀리하게 된다. 그 정수가 바로 사찰음식. 거기에도 금기 식재료가 있다. 정혈을 분출케 하는 '오신채'(五辛菜•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이다.
요리란 간을 맞추는 절차다. 좋은 소금이 가장 중요하다. 소금 맛, 그게 맞으면 간이 맞다. 그럼 맛있다. 남도에서는 '게미있다'고 말한다.

◆천화를 아십니까
내가 사형수라면 어떤 메뉴를 골랐을까? 제대로 먹을 수도 없었을 것 같다.
'식'(食). 설문해자 해 보면 '인간(人)이 좋다(良)'란 의미다. 좋은 음식은 좋은 심신을 만들고 그게 참 생명을 보장한다. 약선요리 세계에서는 '식약동원'(食藥同原)이란 말이 중시된다. '음식과 약이 같은 근원'이란 뜻이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우리 몸의 한 장기에서 만나게 된다. 그게 '밥통'(胃)이다. 곡기가 선순환하면 태평성대가 오지만 그게 악순환하면 아비규환의 지옥계가 도래한다.
그래서 밥이 곧 '삶'이다. 삶이 저물면 밥도 저문다. 삶이 죽음으로 기울면 장기 역시 '겨울 계곡 모드'로 갈무리 된다. 임종 즈음에는 음식을 넘길 힘조차 없다. 하지만 현대의학은 억지로 영양소를 집어넣기 위해 삽관을 한다. 연명치료의 세월이 도래한 것이다.
예전 선비들의 죽음은 단호하고 명쾌했다. 노환이 임종으로 치달으면 곡기를 끊고 죽음을 직시한다. 불가 최고의 죽음 방식은 '천화'(遷化). 홀연히 인적 드문 숲으로 들어가 곡기를 끊고 좌탈입망에 든다. 법정 스님도 그걸 갈구했는데 뜻을 이루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엄마도 식구도 사라지고
대변혁의 축이 도래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음식이 주인이 되는 '식주주의'(食主主意) 세상이다. 반세기 전만 해도 식사 장소는 거의 집이었다. 점심은 묻지마 '엄마표 도시락'. 그런데 이제 부엌은 무용지물. 가족을 살려내는 살림의 원천이었던 어머니의 손과 눈길은 스마트폰과 TV홈쇼핑에 중독돼 있다. 집에서 요리하는 것보다 외식하는 게 더 가성비가 높단다. 집에서 먹더라도 밀키트 메뉴에 의존하거나 배달음식. 엄마표 밥상이 가족 간 돈독한 정의 산실이었다면 이젠 그럴 필요도 그럴 겨를도 그럴 이유도 없다. 나가서 사 먹으면 끝이다.
그 틈에 끼인 아이들은 혼자 편의점에서 혼밥. 밥을 같이 먹을 겨를이 없으니 '식구'(食口)란 말도 무용지물.
어느듯 배고파 죽는 세상이 아니다. 배 터져 죽는 세상. 너무나 많은 가공식품이 우리의 식욕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지금 밥상은 '탈고향 무국적'이다. 모든 나라의 식재료가 한데 범벅이 돼 있다. 음식 세상에서 국경은 무의미하다. 자연표 음식은 1%, 나머지는 가공음식이다. 유전자 변형 식품의 발호까지 살벌한 경고음을 울린다. 조리가 아니라 조립에 가까운 메뉴가 식탁을 독점한 것이다. 췌장은 쉴 틈이 없다. 툭하면 당뇨병이다.
◆편의점 공화국
그래서 '암의 천국'인가. 제대로 죽기가 어려워졌다. 예전 어른들은 자연사가 상식. 이제는 로또 당첨만큼이나 어려워졌다.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죽는다. 병원이 '묻지마 고향'인 셈. 병원과 동행하면 100세 인생이다. 축복인가 재앙인가?
24시간 먹거리 시대. 빛의 속도로 진군하는 배달과 택배, 그리고 24시간 편의점 탓이다. 지난해 9월 기준, 전국 편의점 수는 5만 1천300여 개. 1위는 CU로 1만4천923개, 2위는 GS25로 1만4천688개. 누구에게는 이곳이 '최고의 식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제철 먹거리를 찾긴 불가능할 것 같다.
식재료는 '계절'을 먹고 자란다. 기운이 최고조로 치솟는 자기만의 사계절 사이클이 있다. 송이가 여름에 나올 리 없고 대구의 제철이 봄일 수는 없다. 통영 바닷쑥이 움을 내밀 때 도다리도 가세해 봄도다리쑥국을 완성시킨다. 이때 남도에서는 보리싹홍어애국이 상응한다. 포항초(포항권 동절기 시금치)는 과메기와 매칭된다.
◆핫플 식당의 두 얼굴
지금 통영은 수하식굴로 불야성이다. 거제도 외포항에 가면 대구, 강원도 강릉권으로 가면 도치, 전남 장흥으로 가면 매생이, 목포는 홍어, 여수는 갓김치가 제맛을 형성한다. 대구십미의 제1미인 따로국밥의 주재료 중 하나인 대파도 지금이 제철이다.
미식가는 그런 음식을 찾으러 불원천리한다. KBS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은 나름 원칙을 지키고 있지만 백종원, 허영만 등 유명 식객의 프로그램은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온갖 SNS와 공중파가 만든 신기루 같은 맛집들. 관광객이 몰려왔다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춘다. 제철 로컬푸드 식당의 설자리는 점점 좁아들고…. 무척 안타깝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신발 끈을 다시 묶으며 '문화식객'을 자청해 본다. 진정한 미각(味覺)이 뭔가를 독자제현과 함께 고민해보기 위해 미로(味路)를 찾아 길을 떠난다. '미각기행'이다. 작품 같은 밥상, 그 곁에 햇살처럼 도사리고 앉아 있는 고수들의 문화현장도 술안주처럼 얹어볼 요량이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홍준표, 정계은퇴 후 탈당까지…"정치 안한다, 내 역할 없어"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검찰, '尹 부부 사저' 아크로비스타 압수수색…'건진법사' 의혹 관련
[매일문예광장] (詩) 그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 박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