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론새평] 마시던 우물에 침 뱉지 맙시다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오정일 경북대 행정학부 교수

여기저기서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소리가 들린다. 화내고 울고 하소연한다. 공천에서 탈락한 정치인들 행태다. 우국지사(憂國之士)로 돌변해서 온갖 나라 걱정을 쏟아내고, 자신이 속한 당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똑똑했나. 새삼 놀랐다. 이들은 한바탕 열변을 토한 후, 비장한 표정으로 탈당하거나 당을 옮긴다.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고 떠난다. 마시던 우물에 침 뱉는 사람을 자주 봤다. 법원장, 검찰총장, 장관, 공기업 사장은 퇴임(退任) 때 퇴임사를 한다. 조직을 떠나면서 소회(所懷)를 밝힌다. 형식적인 덕담이 주를 이루지만 직언(直言)을 하기도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솔직해진다.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는 몸담은 조직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끊는 것이다. '침 뱉기'에는 좌절, 분노, 거절, 슬픔의 감정이 들어 있다.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는 하나의 전략(strategy)이다. 침을 뱉으면 끊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영원히 관계를 끊겠다는 협박이다. 이 협박은 강력하다. 타협의 여지가 없다. 배수(背水)의 진(陣)을 친 것이다. 갑자기 관계가 끊어지니 상대방은 대응할 시간이 없다. 보복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아무 때나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지는 않는다. 내가 마실 우물에 침을 뱉는 사람은 없다. 마시지 않을 우물에 침을 뱉는다. 끝이 보일 때, 볼 장 다 봤을 때 침을 뱉는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을 때 비로소 솔직해진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착하게 산다. 착한 척이라도 한다. 가식(假飾)의 탈을 벗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평판(評判)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우물에 침을 뱉을 수 없다.

어느 나라를 가든 관광지는 서비스가 좋지 않다. 관광객은 뜨내기이기 때문이다. 뜨내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일회성(一回性) 거래다. 다시 오지 않는다면 친절은 낭비다. 일회성 거래에서 좋은 평판은 쓸모가 없다. 단골 식당이나 미용실은 친절하다. 이들은 평판에 신경을 쓴다. 거래가 반복되고 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한 친절은 없다. 모든 거래와 관계에는 끝이 있다. 끝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평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식의 탈을 벗는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조직의 관계는 게임(game)이다. 게임에는 참가자(player), 규칙(rule), 보상(pay-off)이 있다.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규칙을 지키면서 많은 보상을 얻으려고 경쟁한다. 전략이 필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대표적인 전략이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 '좋은 평판 쌓기'다. 그런데 게임에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영속성(永續性)이 그것이다.

끝이 있는 게임과 끝이 없는 게임이 있다. 끝이 있는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게임 참가자들이 치열하게 경쟁한다. 서로 돕지 않는다. 끝이 없는 게임에는 승패가 없다. 게임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목표다. 참가자들이 협력해야 게임이 지속된다. 끝이 있는 게임에서 '마시던 우물에 침 뱉기'는 좋은 전략이다. 끝이 없는 게임에서는 '좋은 평판 쌓기'가 중요하다.

삶은 유한(有限)하다.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끝이 있다. 삶은 끝이 있는 게임이다. 우물을 마시지 않을 날이 온다. 그렇다면 마시던 우물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끝까지 좋은 평판을 쌓아야 하나? 소설 '죄와 벌'에서 가난한 법대생이 전당포 노파 자매를 살해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명제다.

인공지능에 물어보았다. "사람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면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답은 이렇다. "죽음 뒤에 무엇이 오든지 간에 사람들은 선, 사랑, 관계를 추구하면서 삶의 의미, 성취감, 행복을 발견한다." 착하게 살면 행복해진다는 말인 것 같다. 성선설(性善說)이 인공지능에 입력되었나 보다. 끝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은 본색을 드러낸다. 드물지만 끝까지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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