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상)

술과 낭만에 취하는 번지 없는 주막
마지막 주모 '유옥연' 예천 '삼강주막'…유배당한 정약용을 도운 남도 '사의재'
막사모 사랑방 용두방천 언저리 노포…전국 곳곳 낭만파들의 성지

주막이 주점으로 변화할 때 등장한 목로주점의 입구 정경. 대구문학관 2층에 가면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막이 주점으로 변화할 때 등장한 목로주점의 입구 정경. 대구문학관 2층에 가면 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제 주막(酒幕)은 없다. 주막은 수많은 주점을 낳았다. 한때 음주가무(飮酒歌舞)의 1호 공간이 된다. 선술집, 니나노집, 막걸리집, 대폿집, 선술집, 목로주점, 실비집, 구이집, 통술집, 다찌집 등으로 굽이쳐갔다. 주막이 '해'라면 주모는 '달'이었다. 모두의 사람이었던 주모. 그 너른 품은 꼭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던 '삼신할매'의 형용이었다. 주막이 술집으로 건너갈 동안 이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가세했다. 하지만 청년세대들에게는 그 시절 문화사랑방의 낭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일상의 소비 속에 머물다 가는 세월인 탓일까.

2006년 한국의 마지막 주막으로 평가받던 예천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연이 타계한다. 하지만 주민과 지자체가 힘을 합쳐 이곳을 문화예술촌 같은 주막촌으로 단장한다.
2006년 한국의 마지막 주막으로 평가받던 예천 삼강주막의 주모 유옥연이 타계한다. 하지만 주민과 지자체가 힘을 합쳐 이곳을 문화예술촌 같은 주막촌으로 단장한다.

◆예천 삼강주막

2006년 기념비적 주막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88세의 예천 삼강주막 주모 유옥연 할매가 세상을 등진 것이다. 국내 언론은 그녀를 '이 시대 마지막 주모'라 칭했다. 낙동강과 금천, 그리고 내성천이 합류되는 예천 삼강 언저리, 찌그러진 농짝 같은 단칸 주막에서 평생을 보냈다. 회나무 한 그루와 외딴 주막 하나, 바로 옆에 강둑이 곡장(曲墻)처럼 둘러싼다.

아무튼, 삼강주막의 가치를 알아본 주민과 지자체가 손을 합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건 너무나 다행이다. 거기 평상에 앉아 먹었던 배추전은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막걸리 안주였다.

사문진주막촌
사문진주막촌

한국 최초 피아노가 1900년 화원유원지 사문진나룻터를 통해 들어온 걸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사문진주막촌, 이것도 삼강주막촌과 한 호흡 사이에 있다. 근처 남평문씨 세거지 근처 '작가와 커피' 주인장 임종 씨는 정크아티스트인데 옛날식 프리미엄급 사문진막걸리를 빚어 거기에 공급한다.

◆남도의 주막

육자배기의 고장, 사철가 같은 단가와 궁합이 잘 맞는 남도. 그 자체가 거대한 주막이다. 황톳길과 주막은 찰떡궁합. 영남과 달리 남도에서는 영화 '서편제'의 한 구절처럼 늘 노랫가락이 꽃비처럼 흣날렸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갈 잠시 머물렀던 사의재. 지금은 주막촌으로 개발됐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갈 잠시 머물렀던 사의재. 지금은 주막촌으로 개발됐다.

삼강 할매의 눈빛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 남도판 주막촌이 있다. 바로 전남 강진읍 도암면에 있는 복합힐링타운 '사의재'(四宜齋). 아는 사람만 안다. 가톨릭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서학쟁이'였던 그를 살갑게 챙겨준 건 뜻밖에도 주모였다. 1801~1804년 거기 머물면서 강학을 하면서 제자를 길러낸다. 이후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가면서 사의재 현판으로 보답한다. 사의재를 부활시켜 준 건 문재인 전 대통령. 나중에는 사의재를 지켜줄 주모까지 공모했다.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는 '막걸리골목'이 있다. 그 근처인 경원동 한옥거리 부근에 문화주막 '새벽강'이 있다. 아직 70년대 풍의 청년문화를 머금고 있다. 풍물미학자 김원호‧시인 박남준 등과 함께 풍물패 '갠지갠' 활동을 했던 강은자가 1989년쯤 문화예술인, 민주화운동권, 사회운동가들의 사랑방 삼아 연 집이다. 대구로 보면 반월당 '곡주사', 계산동 '바보주막' 같은 계열이다.

전주 밤문화 1번지로 통하는 문화주점 '새벽강'.
전주 밤문화 1번지로 통하는 문화주점 '새벽강'.

새벽강의 흐름은 부산의 문화주막과 조응한다. 현재 부산의 대표적 주모는 얼마 전 타계한 부산의 대표적 향토사학자였던 주경업의 아내 강정자. 그는 현재 '다락방'이란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방계 술집은 양산박, 부산, 계림 정도다. 자갈치시장 충무해안시장 공영주차장 맞은편 선창에 따개비처럼 앉아 있는 '순영찻집'도 관광객은 절대 모르는 낭만파들의 성지다. 여사장 순영 씨는 거기 조폭들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아쌀한 육두문자가 일품이다. 대구에 있는 시인 몇이 만든 '허당회'의 일원으로 2년 전 거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기념 휘호를 전하자 그날 술값을 한푼도 받지 않을 정도로 통이 컸다.

용두방천 번지없는 주막의 초입
용두방천 번지없는 주막의 초입

◆용두방천 번지없는 주막

삼강주막에 필적할 정도의 추억의 주막이 2010년 어름까지 용두방천 언저리에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봉덕래미안아파트가 서 있다. 나도 몇 번 족보연구가 겸 화가인 김성택, 그리고 야당 정당인이었던 조희락과 박유남 등과 거기서 술잔을 들었다. 3대 주모 가게였다. 1대 주모(김수비)는 타계하고 이봉득‧김천호 모녀 주모가 가업을 잇고 있었다.

1946년 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지역의 노포가 몇 있다. 따로국밥의 발생지인 '국일식당', 추어탕의 명가 '상주식당', 설렁탕의 명가 '부산설렁탕' 등이다.

간판도 필요 없었다. 단골의 공간인 탓이다. 이 집 가보(家寶)는 나무 주탁 두 개. 지난 시절의 젓가락 장단 흔적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용두방천은 앞산공원, 수성유원지, 화원유원지, 강정유원지, 동촌과 청천유원지 이전의 시민놀이터였다. 50년대에는 가창면에서 벌채된 장작을 소·말 달구지에 싣고 남문시장 근처로 가서 팔았다. 삼산리 주인수처럼 나무장수의 쉬어가는 집이었다.
낭만파 주당들의 노래삼매경은 경쟁적이었다. '(초략)/목욕탕에 옷을 벗긴 다 같은 인생/무엇이 달라 돈 하나 많고 적은 그것 뿐인데'로 끝나는 '코리안 맘보'도 그때의 산물이다.

이 씨 할매는 인심도 좋아 통행금지에 걸려 집에 못 가는 손님을 위해 방 한 칸을 일부러 비워놓기도 하고 아침엔 속풀이 시래기국도 끓였다. 60∼70년대 아침에는 부근에 있던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던 환경미화원들의 급식장이기도 했다.
그 집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 대구공고 다니던 시절 그 주막 바로 근처에 살았다. 그는 어머니‧누나와 함께 신천 빨래터로 따라가다가 주막 앞에 사시장철 놓여 있는 평상에 쉬다 가곤 했다. 그 시절이 생각났을까, 이순자 여사와 그 동네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고인이 된 이효상 전 국회의장도 앞산에 등산하러 갈 때 가끔 들러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갔다. 일부 주당파 효성여대 여학생들도 비 오고 궂은 날 수업을 빼먹고 여기서 술잔을 들었다. 전성기 때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공유한다. 일명 '막사모'(막걸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사랑방으로도 사용됐다.

지금은 불로막걸리지만 60년대는 대봉·봉덕양조장 술을 사다가 팔았다. 참고로 1979년 5월 17일부터 대구의 49개 양조장이 '대구탁주 합동'으로 통합된다. 짐 자전거에 한 말들이 나무 술통 두 개를 싣고 오면 그걸 받아 땅에 묻어 놓은 장독에 부었다. 아이스박스조차 없던 여름철엔 조각낸 얼음을 비닐봉지에 넣어 독 안에 띄웠다.

두석 달 만에 한 번씩 놋 대폿잔을 광내기 위해 기왓장을 가루 내 짚으로 반들반들 닦던 그 모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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