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기자 hoper@imaeil.com

기사

  • [우리 역사 되찾기] 강홍립 장군을 돌아보다

    [우리 역사 되찾기] 강홍립 장군을 돌아보다

    조선의 서인들은 1623년(광해군 15) 임금 광해군을 내쫓는 계해정변을 일으켰다. 인목대비를 폐모시킨 패륜과 명(明)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가 명에 대한 불충(不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실제로는 광해군과 집권당 북인(北人)을 내쫓고 정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이 후금을 정벌하러 갔던 강홍립을 일부러 후금에 투항시켰다고 주장했다. 서인 영수 송시열은 효종 즉위년(1669) 임금에게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에서 "광해가 무도하게도 강홍립과 김경서에게 모든 군사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계해정변의 주요 명분이었다. ◆누루하치 여진족을 통일하다 만주족은 거주지에 따라서 크게 해서(海西)·야인(野人)·건주(建州)여진의 셋으로 분류한다. 만주족은 분열되어 있을 때는 이이제이(以夷制夷)에 따른 명의 지배를 받았지만 민족영웅 누루하치(努爾哈齊:1559~1626)가 나타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백두산 일대 건주 여진 출신의 누루하치는 1588년 경 건주 여진을 통일했고, 4년 후인 1592년(선조 25)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군사를 보내 도와주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광해군 8년(1616) 누루하치는 황제 자리에 올라 금(金)을 재건하고 연호를 천명(天命)이라고 선포했다. 2년 후인 광해군 10년(1618) 4월에는 "명나라가 내 조부와 부친을 죽였다", "명나라가 우리 민족을 탄압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7대한(七大恨)'을 선언하면서 요녕성 무순(撫順)을 함락시켰다. 공포에 휩싸인 명나라의 경략(經略) 왕가수(汪可受)는 그해 윤4월 27일 조선에 서신을 보내 수만 군사를 파견해서 함께 싸우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군사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광해군은 5월 1일 군사를 보내는 대신 "급히 수천 군병을 뽑아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놓자"고 신하들에게 제안했다. ◆도원수 강홍립 그런데 명의 군사 파견 요청에 이귀·김류·김자점·최명길 등의 서인들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적극 파병을 주창한 당파는 집권 대북(大北)이었다. 북인 영수 이이첨은 "중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들어가 구원하는 것이 바로 《춘추(春秋)》의 대의요 변방을 지키는 직분"이라면서 파병을 주장했다. 대북까지 파병을 주창하자 광해군은 파병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비변사에서 도원수로 천거한 인물이 의정부 좌참찬 강홍립(姜弘立:1560~1627)이었다. 강홍립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양했지만 광해군은 "내 뜻은 이미 다 유시(諭示)했으니 사면해 달라고 청원하지 말라"고 물리쳤다. 강홍립은 선조 30년(1597) 알성문과에 급제한 문관이면서도 선조 39년에는 어전통사(御前通事)를 수행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선발되었다. 강홍립이 출전을 꺼린 이유는 조선의 전쟁이 아니라 명과 후금 사이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북상한 조선군 명은 당초 4만 군사를 요구하다가 명의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의 양해로 1만3천여 명 파병으로 조정했다. 강홍립은 광해군 11년(1619) 2월 21일 포수(砲手) 3천500, 사수(射手) 3천500, 살수(殺手) 1천 명 등으로 구성된 1만3천여 조선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군은 압록강 북쪽 대미동(大尾洞)에서 명군과 만났는데, 《광해군일기》는 "그곳은 바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다"고 말하고 있다. 광해군 때도 압록강이 조선과 명의 국경이 아니라 그 북쪽 대미동이 국경이었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강홍립은 2월 26일 "큰 눈보라 속을 행군하느라 각 영(營)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었습니다"로 시작되는 장계를 보내면서 명군의 상태를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명군 도독 유정(劉綎)과 요동경략 양호 사이의 반목이 심각하다는 보고였다. 강홍립은 "명군 진영에 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굶주린 채 전투 조선군의 가장 큰 문제는 군량 보급이었다. 강홍립은 2월 27일 "가지고 온 군량은 이미 다 떨어져가는 데 군량과 건초가 아직 후송되지 않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고 보고했다. 압록강을 도강할 때 군사들이 각각 10일치 양식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군량이 지원되지 않고 있었다.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평안감사 박엽(朴燁)이 군량길을 끊어서 강홍립 등이 큰 곤경에 빠진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남의 전쟁에 나간 터에 군량마저 제때 보급되지 않고 있으니 사기가 높을 수 없었다. 종사관 이민환(李民寏)은 《책중일록(柵中日錄)》에서 조선군은 3월 2일 심하에서 처음으로 만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승리한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 헤매야 했다. 여진족 부락에서 약간의 곡식을 찾아 죽을 끓여 허기를 속인 조선군이 후금의 주력부대와 맞닥뜨린 것은 3월 4일이었다. 공명심에 눈이 먼 명의 총병(摠兵) 두송(杜松)이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강홍립과 함께 진군하던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했다. 조선군은 화포를 쏘아 후금의 기병을 격퇴시켰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을 때, 철기군이 휘몰아쳐 패전하고 말았다. 선천부사 김응하(金應河)는 좌영을 이끌고 맞서다가 전사했다. ◆광해군의 밀지는 존재했는가? 계해정변을 일으킨 서인들은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밀지〉를 주어 의도적으로 항복시켰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會寧府)의 상인 호족(胡族:여진족)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마침내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개 미리 예정된 계획이었다(《광해군일기(중초본)》, 11년 4월 2일)" 광해군이 한 여진족 상인에게 조선군이 항복할 것이라는 정보를 몰래 전했다는 허황된 주장으로 서인들의 창작에 불과했다. 이민환은 《책중일록》에서 후금에서 먼저 통역관을 찾았고 강홍립이 통역관 황연해(黃連海)를 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후금은 "우리는 당인(唐人:중국인)과는 원한이 있어서 서로 전쟁하지만 너희 나라와는 본래 원한이 없는데 왜 와서 치는가?"라고 물었다. 조선 통역관이 "우리는 원한이 없지만 이렇게 온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라고 답하자 사정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강홍립의 밀서 3월 4일 밤, 조선군은 항복과 결사항전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포위망을 뚫자는 견해도 있었지만 응하는 군사는 없었다. 춥고 배고픈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했고, 강홍립과 김경서는 전력 보존을 위해 항복을 결정했고 3월 5일 흥경(興京)으로 가서 국왕 누르하치를 만났다. 강홍립·김경서는 흥경에 억류되었고, 일부 장수들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기나긴 8년 동안의 억류생활이 시작되었다. 식량 조달 임무를 방기한 평안감사 박엽은 투항 소식이 전해지자 강홍립의 가족들을 구금했다. 광해군은, "이들은 항복한 것에 비교할 것이 아니니 그 가족은 속히 석방하여 서울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박엽은 군량 수송 태만의 과오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사한 김응하를 높이고, 강홍립·김경서가 일부러 투항한 것처럼 보고해 강홍립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게 했다. 억류된 강홍립은 비밀 장계를 종이 노끈 등에 보냈는데,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뜻'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이런 밀서 덕분에 광해군은 후금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입수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수행했다.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계해정변과 정묘호란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의 서인들의 계해정변이란 쿠데타로 광해군을 쫓아내자 상황이 급변했다. 인조와 서인정권은 명나라를 추종하고 후금을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背金) 정책으로 선회하자 후금은 인조 5년(1627) 1월 압록강을 건너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막게 했으나 역부족이어서 후금군은 안주와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남하했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으나 평산까지 남하했던 후금군은 더 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강홍립이 후금군을 설득해 남하를 막고 화의하게 했던 것이다. 인조와 서인정권에게 강홍립이 오히려 구세주였다. 부원수를 지낸 정충신(鄭忠信)이 "영감께서 화의를 담당해서 혀로써 수만의 후금군을 물리쳤으니 한 나라의 크고 작은 생령(生靈) 중 누가 그 덕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보냈을 정도다. 두 나라는 형제의 의를 맺는 화약을 맺었고, 강홍립도 오랜 억류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다. 고국에 정착하자 긴장이 풀렸던 탓인지, 강홍립은 그해(인조 5년:1627) 7월 예순 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장례물품도 지급하게 했지만 승정원을 비롯한 여러 부서에서 반대해 좌절되었다. 강홍립의 관작을 회복시키면 쿠데타 명분이 송두리째 부인되므로 반대했던 것이다. 강홍립의 신산스런 삶에서 아무 교훈을 얻지 못한 서인들은 친명반청 정책을 바꾸지 않았고 이는 인조 14년(1636)에 병자호란으로 되돌아왔다. 강홍립 세상을 떠났으므로 중재자도 없었다. 인조는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서인들은 광해군의 〈밀지〉로 강홍립이 항복했다는 거짓 선전을 유포시키면서 계해정변이란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2024-05-13 13:53:58

  • [데스크칼럼] 의정 갈등, 잔인한 5월 기회의 5월

    [데스크칼럼] 의정 갈등, 잔인한 5월 기회의 5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의료대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던 5월이다. 의대 증원에 따른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으로 의료 공백이 발생한 지 세 달째. 다행히 우려했던 대란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란'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치킨 게임만 하고 있는 의료계와 정부가 무섭기까지하다. 이달 중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예고돼 있어 그 결과에 따른 '5월 대란'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 필요성은 일리 있다. 투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수치 근거와 추진 과정이 문제다. 의료계도 증원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2천명 증원 근거를 모르겠다며 같이 따져보고 적정한 규모와 시기를 정하자는 것이니 이 또한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에 대한 정부의 계획도 확인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양쪽은 서로 상대에 귀 닫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으니 무모하고 무한 동어반복만 하는 진흙탕 싸움이 돼버렸다. 그러던 사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법원의 결정, 대입전형 시행계획 승인 및 대학 수시모집요강이 나오는 5월이 지나면 파국이다. 전공의 3천명도 20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자격 미달로 내년도 필수의료 분야 등의 전문의가 될 수 없다. 병원들도 전공의 이탈 등 의료진 부족에 따른 적자로 무너지기 직전이다. 이는 결국 의료 서비스 저하든 치료비 상승이든 환자의 피해, 손해로 돌아간다. 그런데 양쪽 모두 더는 물러설 데가 없다는 게 문제다. 법원의 집행정지 각하 결정으로 의대 증원이 확정되면 의료계는 벼랑 끝 투쟁에 돌입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반대로 법원이 받아들이면 정부의 올해 증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동력을 상실, 이후 증원 계획과 추진 일정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건 당사자 간의 해결이다. 증원을 하든 안 하든 직접 당사자들의 대화, 소통을 통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후유증도 적다. 그런데 의정 간 만남도 대화도 소통도 없다. 정부를 못 믿어 대정부 대화 소통창구인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도 의료계는 참여하지 않는다. 위원회, 협의체 더 만든다고 소통이 되고 사태 해결이 될 리 만무하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의 적극적인 소통 행보가 시작됐다. 대통령 취임 후 2년 만에 처음으로 야당 대표와 회동도 하고, 지난 2022년 8월 취임 100일 회견 이후 처음으로 기자회견도 하기로 했다. 의료계와도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 좋은 타이밍이다. 기왕이면 9일 윤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때 모두발언을 통해 또는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제안하면 자연스러울 거 같다. 생중계로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주재하고 해당 정부 부처, 전공의·의대생·의대교수·의사협회 등 의료계 각 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긴급 토론 형태가 돼야 한다. 누가 맞고 틀린지,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 가리자는 게 아니라 정부가 고집하는 2천명 증원 정책의 근거와 현실성이 명확한지, 반대하는 의료계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는지 다 꺼내놓고 규모와 시기, 분야, 방법 등을 논하고 정하는 자리여야 한다. 단 전공의·의대생 복귀가 전제돼야 한다. 결과와 상관 없이 양쪽 모두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화해하고 의료 사태를 곧바로 정상화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잘못 알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쿨하게 인정하고 수정, 조정해야 한다. 고수하던 주장을 꺾는다고 욕하거나 비난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박수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 퇴로나 주장 철회 명분을 만들어 줄 필요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사와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수모도 겪었지만 지금도 '노무현'하면 떠오르는 명장면, 대표적인 모습으로 깊이 남아있다. 윤 대통령도 진짜 승부사이고, 의대 증원 근거가 분명하다면 지금이라도 직접 만나야 한다. 현재 이 문제만큼 급하고 중요한 현안도 없다. 소신도 좋고 원칙도 좋다. 그렇다고 국민보다 앞설 순 없다. 국민의 생명보다 중할 순 없다. 정부든, 의료계든, 대통령이든 중심엔 '국민'이 있어야 한다. 국민을 위해 더는 의료 공백이 이어져선 안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일 수 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2024-05-08 17:20:16

  •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4)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4)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기치를 내걸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가난한 중국을 부강한 중국으로 만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는 등소평이다. 등소평은 1992년 8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근 한달 동안 심천深圳, 주해珠海, 상해上海 등지를 시찰하며 연도에서 개혁개방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이것을 남순강화南巡講話라 한다. 여기서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가 됐든 흰 고양이가 됐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30년 전에 등소평이 대담하게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곳은 주로 중국 장강長江 남쪽이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문명과는 거리가 먼 지역도 많다. 현재 중국에서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장강 유역의 강소, 절강, 복건은 본래 동이족이 살던 땅이다. 황하중류를 중심으로 출발한 한족 정권은 한무제 유철劉徹(서기전 156~서기전 87) 이전에는 만리장성 안쪽을 모두 지배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장강 유역마저도 제대로 손아귀에 넣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기전 111년 한무제는 장강 남쪽의 남월과 동월을 침략하여 한나라에 복속시켰다. 남월은 오늘날의 복건성이고 동월은 오늘날의 절강성 지역이다. 본래 동이족의 땅이었던 복건성, 절강성 일대는 2000년 전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한왕조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 지역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선두에서 견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무제 유철은 한족 역사를 새로 쓴 최고의 위대한 영웅이다. ◆한무제 유철의 발해조선 침략 남쪽의 남월과 동월을 침략하여 절강성, 복건성 일대까지 한나라의 강역을 넓힌 한무제 유철은 다시 동북쪽의 발해유역에 있던 고조선을 침략하여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서기전 110년 한무제는 전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18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을 북쪽 변방과 동쪽 바닷가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서기전 109년 가을 섭하涉何를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우거왕을 저들에게 복종하도록 회유했다. 고조선의 우거왕이 이를 거절하자 한나라의 사신 섭하는 돌아가는 길에 조, 한 국경선인 패수 즉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동쪽의 조백하에 이르러 자신을 전송하기 위해 따라갔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서 도망치는 외교상에 어긋나는 비열한 행위를 자행했다. 고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만행에 분노한 고조선 왕은 그에 대한 보복적 조치로서 요동군동부도위를 습격하고 섭하를 잡아 살해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중국의 눈치나 보는 약소국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전쟁 준비를 끝낸 한무제는 고조선 정벌의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일부러 분쟁을 야기시켰는데 고조선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서기전 109년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고조선 침략에 나섰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수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발해 쪽에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양복을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그가 서기전 111년 남월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공을 세우는 등 해전의 전투경험이 풍부했으므로 그에게 해군의 총지휘를 맡긴 것이다. 한편 육군의 총사령관은 좌장군 순체荀彘를 발탁했다. 그는 북방의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야전 경험이 풍부한 장수였다. 순체로 하여금 육로를 이용하여 패수 즉 지금의 북경 동쪽의 조백하를 건너서 양복의 해군과 함께 고조선의 왕검성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을 공격하게 하였다. 순체의 육군은 당시 하북성에 있던 요동군에서 출발하여 고조선 서쪽을 침공했고 양복의 해군은 발해 쪽에서 출발하여 고조선 동쪽을 공격했다. 한무제는 수륙 양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고조선의 수도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전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첫 전투에서 한나라의 수륙 양군이 모두 대패를 한 것이다. 해군 총사령관 양복은 병졸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산속으로 도망쳐 10여 일간 숨어 지내다가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들을 다시 긁어모으는 상황이었으니 이는 당시의 전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전쟁 중 평화협상 실패한 심복 두 명이나 처형시킨 한무제 전쟁이 예상과 달리 한나라의 패색이 짙어지는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한무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 위산衛山을 보내 고조선의 우거왕과 평화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그러나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위산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화가 난 한무제는 협상 결렬의 책임을 물어 위산을 처형했다. 양측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패전한 한나라의 군대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고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공격 자세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군대장 순체와 해군대장 양복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따라서 수륙 양군의 합동작전을 통해 조선을 함락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무제는 위산이 평화회담에 실패하고 또 순체와 양복은 둘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전쟁이 아무런 진전도 없이 세월만 흐르게 되자 이번에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守를 전권특사로 파견하여 대책을 강구토록 했다. 공손수는 현장에 가서 해군장군 양복을 체포하여 가두고 양복의 수군을 순체의 육군에 포함시켜 순체가 총지휘하도록 조치한 다음 이를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한무제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손수를 또한 사형에 처하였다. 천하의 한무제가 전쟁 도중에 자신의 심복을 평화협상 진행을 위해 조선에 급파하고 또 자신이 파견한 특사를 두 사람이나 책임을 물어 처형시킨 것을 본다면 한과 조선의 전쟁이 얼마나 한나라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전쟁 참전한 육군, 해군 총사령관 극형 한무제는 조선전쟁 후 전쟁에 참전한 육군, 해군 총사령관을 극형으로 다스렸다. 한무제는 전쟁 도중에 평화협상을 성공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두 명의 특사를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하고 해군 총사령관 누선장군 양복은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기시형은 고대사회에서 집행하던 사형 중의 하나인데 여러 사람이 모인 저자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했다. 극악무도한 죄인에 대해서 이 형벌을 시행했는데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 대해 포상을 하기는커녕 순체는 기시형이란 극형에 처하고 양복은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처벌을 한 것은 한무제의 조선침략은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실패한 전쟁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무제 유철의 발해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 이상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조, 한 전쟁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조선열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조선 전쟁에 참여한 중국측 장군들은 처형이나 처벌을 받은 반면 논공행상에서 오히려 조선의 재상이나 장군들이 제후로 봉해지는 영광을 안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나라가 군대를 통한 조선과의 정면 승부에서 실패하자 몰래 간첩을 들여보내 조선조정 내부를 이간시킴으로써 야비한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했다는 반증이라고 본다. "조선의 이계상尼谿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했다"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서, 위기에 몰린 한무제는 정정당당한 승리가 아니라 내부교란을 이용한 비열한 방법을 통해 승리를 거둔 사실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무제의 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으로서 조선은 이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고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 즉 현재의 하북성 서남쪽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이는 마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그 일부 지역을 러시아에 편입시킨 것과 같았다. 이때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던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반도사관이다. 고조선을 멸망시켰다는 것도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2024-05-06 14:01:01

  • [김용삼의 근대사] 이승만이 이완용보다 더 나쁜 죄인?

    [김용삼의 근대사] 이승만이 이완용보다 더 나쁜 죄인?

    이승만 반대론자들이 이승만을 공격하는 논리 중의 하나가 1919년 3월 3일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위임 통치 청원이다. 위임 통치란 패전국의 영토 또는 식민지를 병합하던 종래의 관행과는 달리, 해당 영토에 대한 병합을 금지한다는 전제 하에 국제연맹이 영토를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 제도는 당시 국제사회에 횡행하던 식민 제도 극복을 위해 창설된 것이다. ◆미국 자유통상과 칸트 영구평화론에 뿌리 둔 위임 통치 제도 위임 통치 제도는 미국의 자유통상 제도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뿌리를 대고 있다. 식민지의 단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식민지가 식민 모국의 착취로 인해 구매력을 잃기 때문에 식민 모국은 새 식민지를 끊임없이 찾는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 모국들이 새로운 식민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벌인다는 점이다. 이런 전쟁의 악순환을 끊고 지구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이 보유한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켜 자유통상을 하는 세계 질서를 뿌리내리자고 외친 인물이 윌슨 미국 대통령이었고, 이것이 위임 통치의 근본정신이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미국의 경험과 칸트의 논리를 통합한 내용이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하의 중립』이고, 이 논문의 지도 교수가 미국 대통령이 된 윌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정한경과 함께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 통치해 달라고 요청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분명히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에 두도록 청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이고, 극동에 하나의 완충국을 탄생시켜 동양에서 특정 국가(일본)의 확장을 방지하고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한국을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모든 나라가 자유롭게 통상하는 국제연맹 위임 통치 지역으로 만들면 모든 나라가 자유통상을 하여 이익을 볼 수 있고, 그 결과 일본이 식민지 획득을 위해 팽창하는 것을 막아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위임 통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신채호·이동휘 문제는 당시 상해에 집결한 한국의 지도자들이 위임 통치가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개신 유학자 출신의 신채호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놈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극언을 했다(이강훈,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서문당, 1999, 19~20쪽). 공산주의자 이동휘는 "이승만은 썩은 대가리, 자치운동이나 위임 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1920년 12월 8일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은 1921년 1월 1일부터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의 집무를 시작했다. 1월 5일 이승만 대통령과 모든 각원이 참석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무총리 이동휘는 "민족자결주의가 고창되던 때에 나온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과 정한경의 자치론은 외교상 실패이며, 한민족의 독립 정신을 현혹시킨 행동이다. 이로 인해 사회의 비난이 정부로 밀려들고 있으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라면서 이승만을 공격했다. 자기 뜻이 수용되지 않자 이동휘는 1월 24일 임정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21년 2월에는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과 학무총장 김규식이 위임 통치 청원을 비판하며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했다. 위임 통치 청원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한 사람은 김규식이다.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은 이승만‧정한경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안창호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논의를 거쳐 준비된 것이다. 또,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자신도 거의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그런데도 김규식은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찌하여 위임 통치 청원자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명했는가'라는 각국 인사들의 반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비웃음을 샀다"며 이승만의 위임 통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김규식의 이중적 태도는 자기 보호를 위한 보신성 자구책이었다(오영섭,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위임 통치 청원 논쟁」, 이주영 외 지음,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46쪽). 1921년 4월 17일 박용만·신채호 등은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상해 임정을 부인했다. 4월 24일 북경 군사통일회 소속원 17명은 공동 명의로 상해 임정과 임시 의정원을 불승인하고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시책을 모두 무효화한다는 최후통첩을 상해로 보냈다. 이유는 "임정이 위임 통치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을 수령으로 삼았으니 존재 이유가 없으며, 임시 의정원은 위임 통치 사건의 주모자인 국적(國賊)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그 연루자 안창호를 노동국 총판으로 선임했으니, 이는 위임 통치 청원을 묵인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중국에서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유럽 열강을 견제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저지해주기를 기대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이 구상한 위임통치제도는 '통상의 자유'를 원리로 하는 세계적 통상망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 ◆일본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단수 전략 이 제도 구축의 최대 장애물은 열강 간에 영토쟁탈전을 야기하고 있는 식민지 문제였다. 이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식민지 해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문호 개방 지역으로 만들어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승만·정한경이 준비한 위임통치안은 한국이 미국의 위임 통치 하에서 중립적 지위를 누리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 그동안 미국과의 자유통상을 통해 국부(國富)를 증대시켜 실력을 다진 후 국제정세 변화를 활용하여 완전 독립을 달성한다는 구상이었다. 비판자들은 청원서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독립보장'과 '중립화 구상' 구절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악질적인 매국노이자 국적(國賊)"이라고 이승만을 매도했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 WTO(세계무역기구), FTA(자유무역지대)가 자유통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과 윌슨, 칸트가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제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2024-04-29 14:02:16

  • [이런일] 대구문인협회 강원도 영월서 문학기행

    [이런일] 대구문인협회 강원도 영월서 문학기행

    대구문인협회 문학기행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병욱)는 지난 13일 강원도 영월 김삿갓문학관, 장릉, 청령포에서 회원 160명이 참여한 가운데 문학기행 단합대회를 가졌다.

    2024-04-16 13:43:34

  •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대구 삼덕교회는 오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교회 야외주차장(중구 공평로 4길 11)에서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를 연다. 이날 바자회에선 비빔밥, 떡갈비, 밑반찬, 다슬기국, 떡볶이 등 먹을거리와 중고 가전제품 및 주방용품, 구제 옷, 머플러, 머리핀, 브로치, 맛사지팩, 책, 엽서, 에코백, 친환경 수제 비누, 실크스카프, 가죽공예 핸드메이드 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판매된다. 또 팔찌 만들기 등 체험을 할 수 있고, 어린이를 위한 전통놀이도 마련된다. 이와 함께 참여자들을 위한 축하 공연, 경품 추첨 등도 진행될 예정이다. 바자회 수익금은 중구 지역 독거 어르신들의 집 수리 및 청소, 경로잔치 등에 사용된다.

    2024-04-15 13:12:18

  •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대구 삼덕교회는 오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교회 야외주차장(중구 공평로 4길 11)에서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를 연다. 이날 바자회에선 비빔밥, 떡갈비, 밑반찬, 다슬기국, 떡볶이 등 먹을거리와 중고 가전제품 및 주방용품, 구제 옷, 머플러, 머리핀, 브로치, 맛사지팩, 책, 엽서, 에코백, 친환경 수제 비누, 실크스카프, 가죽공예 핸드메이드 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판매된다. 또 팔찌 만들기 등 체험을 할 수 있고, 어린이를 위한 전통놀이도 마련된다. 이와 함께 참여자들을 위한 축하 공연, 경품 추첨 등도 진행될 예정이다. 바자회 수익금은 중구 지역 독거 어르신들의 집 수리 및 청소, 경로잔치 등에 사용된다.

    2024-04-14 18:32:31

  •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박스)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박스)

    나는 지난 시절의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8~9일 시내 여러 술집을 누볐다. 현재 지역 문화계 최고령 현역 주당이기도 한 80대 초반의 도광의 시인과 홍종흠 전 매일신문 논설주간을 남산동 '도루묵식당'으로 초대해 대담인터뷰를 벌였다. 도 시인이 잊혀져 가던 대구가 낳은 낭만시인 박훈산을 추억하는 육필 원고를 내밀었다. 이하는 간추린 내용이다. 이봉구가 '명동백작'이라면 박훈산은 큰 발로 큰 키로 걸어 다닌 '지역 대감'이었다. 향촌동 다방마담을 짝사랑하다 자살 소동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바람이 무성할 때는 '가보세', '혹톨', '쉬어가는 집'에 나타나 술을 마셨고, 바람이 시들어갈 무렵에는 행복‧은정‧밀밭식당에 가끔 자리했다. 아주까리 밤 수풀이 휘청이도록 술을 마셨다. 술값 떼어먹는 것이 항다반사인데도 술집 주모들은 바람맞아 구겨진 마음을 잘 다림질해 주었다. 박훈산이 걷지 않는 대구거리는 낭만이 죽고 무미건조한 도시로 바뀌었다.

    2024-04-10 17:24:41

  •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상)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상)

    이제 주막(酒幕)은 없다. 주막은 수많은 주점을 낳았다. 한때 음주가무(飮酒歌舞)의 1호 공간이 된다. 선술집, 니나노집, 막걸리집, 대폿집, 선술집, 목로주점, 실비집, 구이집, 통술집, 다찌집 등으로 굽이쳐갔다. 주막이 '해'라면 주모는 '달'이었다. 모두의 사람이었던 주모. 그 너른 품은 꼭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던 '삼신할매'의 형용이었다. 주막이 술집으로 건너갈 동안 이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가세했다. 하지만 청년세대들에게는 그 시절 문화사랑방의 낭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일상의 소비 속에 머물다 가는 세월인 탓일까. ◆예천 삼강주막 2006년 기념비적 주막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88세의 예천 삼강주막 주모 유옥연 할매가 세상을 등진 것이다. 국내 언론은 그녀를 '이 시대 마지막 주모'라 칭했다. 낙동강과 금천, 그리고 내성천이 합류되는 예천 삼강 언저리, 찌그러진 농짝 같은 단칸 주막에서 평생을 보냈다. 회나무 한 그루와 외딴 주막 하나, 바로 옆에 강둑이 곡장(曲墻)처럼 둘러싼다. 아무튼, 삼강주막의 가치를 알아본 주민과 지자체가 손을 합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건 너무나 다행이다. 거기 평상에 앉아 먹었던 배추전은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막걸리 안주였다. 한국 최초 피아노가 1900년 화원유원지 사문진나룻터를 통해 들어온 걸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사문진주막촌, 이것도 삼강주막촌과 한 호흡 사이에 있다. 근처 남평문씨 세거지 근처 '작가와 커피' 주인장 임종 씨는 정크아티스트인데 옛날식 프리미엄급 사문진막걸리를 빚어 거기에 공급한다. ◆남도의 주막 육자배기의 고장, 사철가 같은 단가와 궁합이 잘 맞는 남도. 그 자체가 거대한 주막이다. 황톳길과 주막은 찰떡궁합. 영남과 달리 남도에서는 영화 '서편제'의 한 구절처럼 늘 노랫가락이 꽃비처럼 흣날렸다. 삼강 할매의 눈빛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 남도판 주막촌이 있다. 바로 전남 강진읍 도암면에 있는 복합힐링타운 '사의재'(四宜齋). 아는 사람만 안다. 가톨릭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서학쟁이'였던 그를 살갑게 챙겨준 건 뜻밖에도 주모였다. 1801~1804년 거기 머물면서 강학을 하면서 제자를 길러낸다. 이후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가면서 사의재 현판으로 보답한다. 사의재를 부활시켜 준 건 문재인 전 대통령. 나중에는 사의재를 지켜줄 주모까지 공모했다.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는 '막걸리골목'이 있다. 그 근처인 경원동 한옥거리 부근에 문화주막 '새벽강'이 있다. 아직 70년대 풍의 청년문화를 머금고 있다. 풍물미학자 김원호‧시인 박남준 등과 함께 풍물패 '갠지갠' 활동을 했던 강은자가 1989년쯤 문화예술인, 민주화운동권, 사회운동가들의 사랑방 삼아 연 집이다. 대구로 보면 반월당 '곡주사', 계산동 '바보주막' 같은 계열이다. 새벽강의 흐름은 부산의 문화주막과 조응한다. 현재 부산의 대표적 주모는 얼마 전 타계한 부산의 대표적 향토사학자였던 주경업의 아내 강정자. 그는 현재 '다락방'이란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방계 술집은 양산박, 부산, 계림 정도다. 자갈치시장 충무해안시장 공영주차장 맞은편 선창에 따개비처럼 앉아 있는 '순영찻집'도 관광객은 절대 모르는 낭만파들의 성지다. 여사장 순영 씨는 거기 조폭들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아쌀한 육두문자가 일품이다. 대구에 있는 시인 몇이 만든 '허당회'의 일원으로 2년 전 거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기념 휘호를 전하자 그날 술값을 한푼도 받지 않을 정도로 통이 컸다. ◆용두방천 번지없는 주막 삼강주막에 필적할 정도의 추억의 주막이 2010년 어름까지 용두방천 언저리에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봉덕래미안아파트가 서 있다. 나도 몇 번 족보연구가 겸 화가인 김성택, 그리고 야당 정당인이었던 조희락과 박유남 등과 거기서 술잔을 들었다. 3대 주모 가게였다. 1대 주모(김수비)는 타계하고 이봉득‧김천호 모녀 주모가 가업을 잇고 있었다. 1946년 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지역의 노포가 몇 있다. 따로국밥의 발생지인 '국일식당', 추어탕의 명가 '상주식당', 설렁탕의 명가 '부산설렁탕' 등이다. 간판도 필요 없었다. 단골의 공간인 탓이다. 이 집 가보(家寶)는 나무 주탁 두 개. 지난 시절의 젓가락 장단 흔적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용두방천은 앞산공원, 수성유원지, 화원유원지, 강정유원지, 동촌과 청천유원지 이전의 시민놀이터였다. 50년대에는 가창면에서 벌채된 장작을 소·말 달구지에 싣고 남문시장 근처로 가서 팔았다. 삼산리 주인수처럼 나무장수의 쉬어가는 집이었다. 낭만파 주당들의 노래삼매경은 경쟁적이었다. '(초략)/목욕탕에 옷을 벗긴 다 같은 인생/무엇이 달라 돈 하나 많고 적은 그것 뿐인데'로 끝나는 '코리안 맘보'도 그때의 산물이다. 이 씨 할매는 인심도 좋아 통행금지에 걸려 집에 못 가는 손님을 위해 방 한 칸을 일부러 비워놓기도 하고 아침엔 속풀이 시래기국도 끓였다. 60∼70년대 아침에는 부근에 있던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던 환경미화원들의 급식장이기도 했다. 그 집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 대구공고 다니던 시절 그 주막 바로 근처에 살았다. 그는 어머니‧누나와 함께 신천 빨래터로 따라가다가 주막 앞에 사시장철 놓여 있는 평상에 쉬다 가곤 했다. 그 시절이 생각났을까, 이순자 여사와 그 동네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고인이 된 이효상 전 국회의장도 앞산에 등산하러 갈 때 가끔 들러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갔다. 일부 주당파 효성여대 여학생들도 비 오고 궂은 날 수업을 빼먹고 여기서 술잔을 들었다. 전성기 때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공유한다. 일명 '막사모'(막걸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사랑방으로도 사용됐다. 지금은 불로막걸리지만 60년대는 대봉·봉덕양조장 술을 사다가 팔았다. 참고로 1979년 5월 17일부터 대구의 49개 양조장이 '대구탁주 합동'으로 통합된다. 짐 자전거에 한 말들이 나무 술통 두 개를 싣고 오면 그걸 받아 땅에 묻어 놓은 장독에 부었다. 아이스박스조차 없던 여름철엔 조각낸 얼음을 비닐봉지에 넣어 독 안에 띄웠다. 두석 달 만에 한 번씩 놋 대폿잔을 광내기 위해 기왓장을 가루 내 짚으로 반들반들 닦던 그 모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2024-04-10 17:24:05

  • [데스크 칼럼] 윤 대통령 지지율과 총선

    [데스크 칼럼] 윤 대통령 지지율과 총선

    윤석열 대통령이 조용하다. 취임 후 이렇게 언론과 여론에서 벗어났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사흘들이로 일간지 1면 등 주요 면을 장식했으나 최근엔 뉴스 비중이 줄었다. 해외 순방 때마다 구설·논란이 일었고, 부인 김건희 여사 리스크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한일 관계 회복, 3대 개혁 등 민감한 정책에 대한 강력한 드라이브로 하루가 멀다 하고 이를 둘러싼 갈등과 분쟁의 뉴스가 쏟아졌다. 국정 운영 지지율은 20%대까지 추락했다. 그런데 조용하니 더 인기다. 윤 대통령이 뉴스 메인에서 서서히 사라지면서 지지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총선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국민의 관심이 정당의 후보 공천에 쏠렸고, 대통령 개입 논란도 거의 없다 보니 윤 대통령에 대한 언급 자체가 크게 줄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의 등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공천 파동 등 이슈 메이커들이 연일 이목을 끌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기회도 감소했다. 그런데 지지율은 올랐다. 지지율 상승은 김 여사가 디올 백 사태 후 칩거에 들어가고 수습 과정을 거치는 시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김 여사는 지난해 11월 명품 가방 논란 후 12월 네덜란드 순방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후 김 여사 관련 새로운 논란거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고, 지난달 윤 대통령이 신년 대담에서 충분하진 않지만 직접 관련 언급을 하고 유감을 표하면서 명품 가방 사태는 숙지는 모양새가 됐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국갤럽 조사 기준 2월 첫째 주 29%까지 내려갔던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율은 셋째 주부터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 마지막 주(39%)엔 40%에 육박했다. 이는 지난해 7월 첫째 주 38%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윤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 평가는 취임 직후인 2022년 5월 둘째 주 52%로 시작했지만 한 달 만에 43%로 떨어졌고, 그 후로는 30%대에서 등락을 반복하다 올 들어선 주로 30%대 초반에 머물렀다. 문제는 총선 이후다. 40%대 안팎의 지지율을 이어갈 수 있을지 여부다. 윤 대통령 중간평가라 할 수 있는 이번 총선에서 의석수 절반 이상 확보로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이어갈 수도 있지만 급격한 레임덕 우려도 있다. 총선에서 참패하면 두말할 필요도 없고 선방한다 해도 당선 국회의원들이 공천에 사활을 걸었던 총선 전처럼 대통령 눈치를 보며 맹목적인 지지를 보낼 리 만무하다. 한 비대위원장을 중심으로 새판이 만들어질 수 있고, 무게중심도 용산에서 여의도로 옮겨갈 개연성이 크다. 앞선 당 대표들과 달리 약하다는 얘기도, 실권이 없다는 말도 안 나온다. 당내는 물론 야당을 상대로 휘둘리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 초보라는 우려와 지적이 많았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총선 후 윤 대통령의 입지가 더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동훈은 한동훈이고 윤석열은 대통령이다. 여의도는 여의도고, 용산은 용산이다. 최근의 지지율이 잘 보여준다. 대통령 본업에 집중하고 충실하면 된다. 존재감을 드러내며 온갖 논란으로 시끄러울 때보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일을 하고 있을 때 더 사랑받고 지지받을 수 있다는 걸. 태평성대의 대명사인 중국 요순시대엔 왕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하지 않나. 국민은 그리 대단하고 슈퍼맨 같은 대통령을 원하는 게 아니다. 갈라치지 않고 국민을 위한 길을, 원칙을, 정책을 묵묵히 걸어가고, 지켜가고, 펼쳐나가는 대통령을 원한다. 총선이 끝나더라도 레임덕 없는 윤 대통령을 기대한다.

    2024-03-13 19:30:00

  • 이병욱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감사 선임

    이병욱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감사 선임

    이병욱 대구문인협회 부회장은 지난 2일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사)대구예총 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감사로 선임됐다.

    2024-02-04 14:04:01

  • [데스크칼럼] 아이 낳으면 현금 1억원 주자

    [데스크칼럼] 아이 낳으면 현금 1억원 주자

    올해 대구경북 초등학교 입학 대상 학생 수가 5년 전보다 26.5% 줄었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불과 1년 새 각각 12.1%, 14.6%나 감소해 속도감을 더했다. 전국적으론 올해 초교 입학생 40만 명 선이 깨질 것으로 보인다. 감소세가 가팔라 2년 후엔 30만 명대도 무너질 판이다. 2026년 초교 입학 예정인 2019년 출생아 수가 30만2천676명이다. '출산율 세계 최저'라는 말도 식상해진 지 오래다. 합계출산율이 0.7명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내년엔 0.6명대까지 떨어진다는데도 실감을 못 한다. 경각심도 떨어져 파국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여전히 '뜨거워지는 솥 안 개구리'다. 오죽했으면 뉴욕타임스가 '한국은 사라지는가'라는 칼럼까지 게재했을까 싶다. 인천시는 올해부터 출산 시 1억원을 준다고 한다. 전부 시 예산은 아니다. 정부 지원금이 70% 정도 된다. 현금으로 한꺼번에 주는 것도 아니다. 18세까지 항목을 나눠 단계별로 지원한다. '1억원 프로젝트' 시도는 좋다. '1억원'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환기성과 상징성, 강력한 흡입력 때문이다. 그러나 '찔끔' 지원이라는 한계는 여전하다. 단계별 '찔끔' 지원으론 '저출산의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무 느긋하게 절차를 밟고 마취하고 수술 준비하느라 돈과 시간을 다 쓰는 사이 대한민국이 사라지게 생겼다. 이제는 살을 생짜로 째고서라도 급히 수술해야 하는 초비상 상태다. 근본 처방을 연구하고 내놓기엔 늦었다. 숨이 넘어가는 지금, 극약처방이라도 해야 한다. 시급한 근본 처방 중 하나는 영유아를 믿고 맡길 수 있는 거점 보육시설 시스템 마련이다. 이른 출근 및 늦은 퇴근까지 감안해 마음 편하게 맡길 수 있고, 아플 때 등 언제든 바로 가서 볼 수 있는 가까운 거점 보육시설을 정부 주도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아이를 낳은 뒤의 일이다. 자녀를 낳지도, 낳을 생각도 없으면 소용없다. 출산 결심을 하고 양육 자신감을 가지게 하려면 걱정과 두려움을 줄여줘야 한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출산 결심에 적잖은 영향을 줄 수 있다. '낳을 수 있겠다' '키울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동기가 된다. 지금의 연령·단계별 지원으로는 한계가 있다. 아이를 안 낳으면 18세도 없다. 현금, 목돈으로 동기를 부여할 때다. 지금은 비상 출산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와 지자체, 기초단체의 저출산 관련 예산을 재조정·단순화시켜 국·시도·구군비를 매칭하면 엄두를 못 낼 일은 아니다. 지난 2022년 정부가 저출산에 투입한 예산은 52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단순 환산하면 1억원씩, 50만 명에게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다. 2022년 출생아 24만9천 명의 두 배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국가 존폐가 달린 상황에서 '하세월' 지원으론 답이 없다. 더 촘촘한 대책, 구체적인 정책 등을 운운할 때도 아니다.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실질적인 지원이 아니면 젊은이, 젊은 부부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힘들다. 이리저리 재고 이것저것 시도할 단계는 지났다. 심폐소생술을 해서라도 우선 살려놓는 게 급선무다. 2006년 이후 저출산 대응에 300조원 안팎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이고도 출산율 향상은커녕 유지도 못 했다. 아니 곤두박질쳤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아이를 낳으면 현금 1억원을 지원하자. 수정·보완할 게 있다면 그 후에 하면 된다. 나라가 없어지고 나서 천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024-01-10 20:30:00

  • 청운신협, 범어3동·고산3동에 라면으로 행복 나눔

    청운신협, 범어3동·고산3동에 라면으로 행복 나눔

    청운신협(이사장 김상수)은 지난 22일 연말을 맞아 저소득 취약가구에 전해달라며 범어3동행정복지센터(동장 정병준)와 고산3동행정복지센터(동장 주영태)에 각각 200만원 상당의 라면 140박스씩을 기탁했다. 청운신협은 매년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후원 물품을 기탁하고 있다.

    2023-12-24 13:12:54

  • 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 독거어르신 '바로드림 마음상자' 지원

    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 독거어르신 '바로드림 마음상자' 지원

    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대표 박태희)는 20일 대구 삼덕교회(담임목사 강영롱)와 각종 생필품, 저장식품, 내의 등 다양한 긴급 구호물품을 담은 '바로드림 마음상자' 전달식을 가졌다. 바로드림 마음상자는 삼덕교회 교인들의 후원으로 마련됐는데,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취약어르신 140세대에 지원한다. 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는 대구 중구지역 내 재가노인돌봄서비스를 운용하는 제공기관들로, 70여명의 돌봄 종사자가 1천400명 어르신을 대상으로 노인맞춤돌봄서비스, 재가노인지원서비스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박태희 대표는 "매년 따뜻한 후원을 이어오는 삼덕교회에 감사드리며, 바로드림 마음상자라는 이름처럼 후원자님들의 마음을 소중히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2023-12-20 17:43:45

  • [이런일] 삼덕재가노인돌봄센터 28일 '사랑의 김장나눔' 행사

    [이런일] 삼덕재가노인돌봄센터 28일 '사랑의 김장나눔' 행사

    삼덕재가노인돌봄센터는 28일 '사랑의 김장나눔' 행사를 갖고 대구 중구 내 홀몸 어르신 등 200가구에 삼덕교회 봉사자 30여명이 담근 김장김치를 전달했다.

    2023-11-28 20:24:45

  • 권원현 대표, 21일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 8대 회장 취임

    권원현 대표, 21일 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 8대 회장 취임

    권원현 (주)창림이엔지 대표가 21일 대구EXCO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2023 대구경북 벤처기업인의 밤 및 임시총회에서 (사)대구경북벤처기업협회 8대 회장에 취임했다.

    2023-11-21 18:11:22

  • 대구지체장애인대회, 이병욱 본부장 장애인 복지 유공 표창

    대구지체장애인대회, 이병욱 본부장 장애인 복지 유공 표창

    대구지체장애인대회가 지난 14일 수성관광호텔에서 김광환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회장 등 회원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이병욱 (사)대구시지체장애인협회 부설 중증장애인 보장구 보내기 운동본부 본부장이 표창장을 받는 등 장애인 복지 유공자 표창 수여식도 진행됐다.

    2023-11-16 14:26:44

  • 대구지체장애인대회 개최…이병욱 본부장 장애인복지유공 표창장 받아

    대구지체장애인대회 개최…이병욱 본부장 장애인복지유공 표창장 받아

    대구지체장애인대회가 지난 14일 수성관광호텔에서 김광환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회장 등 회원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 이병욱 (사)대구시지체장애인협회 부설 중증장애인 보장구 보내기 운동본부 본부장이 표창장을 받는 등 장애인 복지 유공자 표창 수여식도 진행됐다.

    2023-11-16 11:37:37

  • [데스크칼럼] 윤 대통령, 이참에 변해야

    [데스크칼럼] 윤 대통령, 이참에 변해야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과 함께 1년 6개월 용산 대통령실을 출입했다. 지척에서 보고, 또 용산 및 여의도 등 정계 인사들을 통해 들으면서 윤 대통령을 알아나갔다. 말과 행동에 거침과 격의가 없다 보니 다소 거칠고 투박해 보이고, 여기에 강한 자신감과 소신까지 묘하게 겹쳐지면서 대중적 호감을 크게 얻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줄기차게 개혁, 안보, 이념, 한일관계 회복 변화 등을 위해 강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반대세력이 많아졌다. 불의라고 생각되면 타협하지 않는 성정도 고집불통으로 비치면서 의외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는데 한 몫 했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의 강점인 진정성과 열정, 성과가 희석되고 반감돼 실제 하는 만큼도 인정을 못 받고 있다. 그런데 최근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극적이거나 반발을 살 여지가 있는 발언·행보를 조심하는 분위기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구속영장 기각 등 최근 굵직한 이슈에서 잇따라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면서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한 듯 하다. 그러나 이참에 더 변해야 한다. 그래서 몇 가지 첨언한다. 윤 대통령을 위기로 몬 원인을 들라면 아이러니하게도 출범 때부터 강조한 소통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취임 후 1년 6개월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통은 윤 대통령의 강점이 아니라 최대 약점이 됐다. 그 책임은 먼저 대통령 본인에게 있다. 덜 듣고 많이 얘기하는 소통 스타일 때문이다. 소통이 양방이 아니라 일방으로 이뤄진 탓이다. 국정 운영에 누구보다 열심이고, 다방면에 지식도 풍부하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국정과제나 행사 등 어떤 주제가 정해지면 전문가 도움도 받고 관련 책도 읽는 등 공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대통령 혼자 모든 걸 다, 정확히, 세세히 알고 지시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혼자 대부분 얘기를 하면 제대로 된 소통이 이뤄질 리 만무하다. 그러기 위해선 믿어야 한다. 참모를, 부처를, 국회의원을 믿지 못하니 혼자 다 짊어지고 결정하려고 한다. '내가 더 많이, 더 잘 알고, 내가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사 조금 못 미덥더라도 믿어야 하고 맡겨야 한다. 믿지 못해 지시하면 수동적이 된다. 시키는 일만 한다. 그 이상, 창의적으로, 적극적으로, 몸과 마음 바쳐 일하지 않는다. 전략 부재도 아쉽다. '용산'의 기획이라고 알려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만 봐도 그렇다. 야당 텃밭인데다 재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그것도 사면복권된 당사자를 곧바로 후보 공천한 것부터가 오판이다. 거기에다 주민들도 누군지 모르는 국회의원, 당협위원장 등을 대거 동원해 무의미한 인해전술로 헛심만 쓰다가 참패를 한 건 더 문제다. 전략 없이 판만 크게 만들어 정국 주도권을 넘겨주는 자충수가 됐다. 차라리 후보 혼자 고군분투하는 전략으로 갔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오히려 설득력 있다. 그런데 이번 실패는 윤 대통령에게 약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내리꽂으면 '필패'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내년 총선 참패는 윤 대통령 레임덕으로 이어질 수 있어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고언·직언할 수 있는 참모 등 측근을 옆에 둬야 한다. 아닌 줄, 안 될 줄 알면서도 얘기하지 않는 측근은 측근이 아니다. 앞서 예를 든 강서구청장 보궐선거도 마찬가지다. 귀 멀고 눈 멀게 하는 측근들은 물리쳐야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대통령의 책임도 크다. 버럭, 호통만 쳐선 안 된다. 그렇게 해선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구중궁궐이 싫어 청와대도 들어가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굳이 용산 국방부 청사를 대통령실로 리모델링해 들어온 이유다. 그런데 용산에서도 여전히 인의장막에 둘러싸여 있다면 갖은 논란과 비판을 받아가면서 용산으로 대통령실을 옮긴 의미가 없다. 대통령의 위기는 대한민국의 위기다. 부디 이참에 더 변해서 위기를 반등의 기회로 삼기를 기대한다.

    2023-11-08 20:00:00

  • 사법수장 초유의 '동시 공백' 현실화…재판 지연 등 국민 피해 가중

    사법수장 초유의 '동시 공백' 현실화…재판 지연 등 국민 피해 가중

    사상 초유의 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 동시 공석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의 임기가 10일 만료됨에 따라 40일 넘게 이어지고 있는 대법원장 공석과 함께 양대 최고 사법기관 수장 동시 공백 사태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종석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일정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데다, 대통령의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도 이뤄지지 않아 국회 인사청문회 등을 거쳐 최종 임명 때까지 갈 길이 멀다. 사회적 갈등을 사법적으로 해결하는 두 기관의 고유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돼 주요 사건 심리 등 처리 지연, 사법부 비정상 운영 등 문제가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이번 주 대법원장 후보자를 지명할 것으로 보이는 등 인선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대법원장 후보군에 대한 검증이 막바지 단계에 이른 가운데, 김형두 헌법재판소 재판관(58·사법연수원 19기), 조희대 전 대법관(66·13기), 정영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3·15기) 등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경북 경주 출신으로 대구지방법원장을 역임한 조 전 대법관은 능력과 성품 등에서 두루 평판이 좋은 데다 이미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바 있어 임명동의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지만, 1957년 생이어서 대법원장 임기(6년)를 다 채울 수 없다는 점이 변수다. 김 재판관은 호남 출신에다 지난 2010년 한명숙 전 국무총리 1심 무죄 선고 등 진보 성향의 판결을 한 바 있어 더불어민주당의 반발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 재판관이 임명될 경우 헌법재판관 출신 첫 대법원장이 된다. 한국법학교수회 회장을 역임한 정 교수의 경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반대 등 성향이 윤 대통령에 가깝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야권의 반대가 심할 수 있는데다. 법관 경력(11년)이 상대적으로 짧다는 것이 단점으로 꼽힌다. 이와 관련, 대통령실 관계자는 "대법원장 후보 지명을 위한 검증이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 주 내 지명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23-11-05 18:08:05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