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 기자 ho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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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6기 2대·3대 회장 이·취임식

    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6기 2대·3대 회장 이·취임식

    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6기 동기회는 22일 오후 호텔라온제나에서 회원 및 총동창회(회장 박병욱) 임원 등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장 이·취임식을 가졌다. 이날 2대 황주철 회장(주식회사 제이씨디앤씨 대표)이 이임하고, 이순옥 수석부회장((주)성신앤큐 부사장)이 3대 회장에 취임했다. 사무총장엔 도경애 재무국장이 선임됐다. 이 신임 회장은 이날 취임사에서 "이번 3대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이웃에 대한 봉사다. 지역 사회와 함께 성장하기 위해 봉사의 손길을 넓히고자 한다"며 "이웃과의 따뜻한 나눔을 통해 우리의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드리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매탑 16기 동기회는 이날 회장 이·취임식 행사 비용 최소화 및 이순옥 3대 회장 기부 등으로 마련한 봉사금 100만원을 이동관 매일신문 대표이사에게 전달, 본지 기획연재 이웃사랑의 성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2024-07-23 11:49:38

  • [김용삼의 근대사] 日, 거액의 비자금으로 고종 회유했나

    [김용삼의 근대사] 日, 거액의 비자금으로 고종 회유했나

    최근 한상일 국민대 명예교수가 발간한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란 저서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 당하기 직전, 일본 천황이 고종에게 거액의 비자금을 제공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고종의 강제 퇴위는 그가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거졌다. 관련 내용이 외신을 타고 일본에 알려지자 메이지 천황은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을 무시한 처사에 극도로 분노했다. 분기탱천한 메이지 천황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에게 "이번 기회에 그의(고종) 두뇌를 개량하여 장래에 절대로 변하지 않도록 확실한 방법을 세우라"라고 지시했다. 또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일본 총리에게는 "이번에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여 군정·재정·내정, 그리고 궁내 출입 무리의 감소 등을 엄중히 처리하여 정리하는 한편, 200만~300만 엔을 국왕(고종)에게 주고, 그 사용을 통감부가 감독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한상일, 『고종과 이토 히로부미』, 기파랑, 2024, 272~273쪽). 200만 엔을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천500억 원 정도의 거액이다.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제공하여 일본에 저항하는 고종을 회유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상일 교수는 실제로 이 '거금'이 고종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이 1904년 3월 이토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30만 엔을 받았던 전력에 비추어 볼 때 천황이 지시한 거액의 비자금이 고종에게 제공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한상일, 앞의 책, 273쪽). 한상일 교수의 문제 제기가 사실이라면, 고종은 일본 정부로부터 거금 200만~300만 엔의 비자금을 제공받는 대가로 황제에서 퇴위는 물론, 대한제국의 내정권마저 넘겨줬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헤이그 밀사 사건 직후 이토 통감이 고종을 폐위하고 정미 7조약이라 불리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정·재정·내정과 관련된 정리 작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한일신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권 및 행정 처분권, 관리의 임명권 등 내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고, 군대마저 해산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속령 수준으로 전락했다. 메이지 천황이 지시한 '새로운 조약 체결 작업'은 충실하게 이행되었다. ◆을사보호조약 직전 2만 엔(25억 원) 수수 게다가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넘기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직전, 일본으로부터 비자금을 받아 챙긴 사실이 일본 측 사료를 통해 명쾌하게 밝혀졌다.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을사보호조약 체결 1주일 전인 1905년 11월 11일, 본국 외무성의 비밀 훈령(기밀 제119호)에 의해 기밀비 10만 원을 대한제국 지도부를 대상으로 집행했다. 그중 2만 원(2만 엔)이 심상훈을 통해 무기명 예금증서로 고종에게 전달되었고, 고종의 측근 및 내각 각료들에게도 비자금이 뿌려졌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4권 22, 보호조약 1~3 (195), 「'임시 기밀비 지불 잔액 반납의 건」, 1905년 12월 11일). 고종에게 전달된 2만 원(2만 엔)은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25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앞에서 한상일 교수가 언급한 "1904년 3월 이토로부터 '위로금' 명목으로 30만 엔 수수" 건의 사연은 무엇일까?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 궁중 곳곳에 침투시킨 첩보 조직을 통해 고종이 돈을 대단히 밝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우유부단한 고종을 회유하여 일본이 원하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만족할 만한 액수의 운동비(비자금) 제공이나 차관 공여가 최선의 방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결정적 고비마다 고종과 측근, 대한제국의 고위 각료들에게 아낌없이 비자금을 뿌렸다.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고종은 앨런 주한 미국공사에게 미관파천(美館播遷)을 요구했다. 미국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고종은 1904년 1월 21일, 일본의 감시를 뚫고 밀사를 중국으로 보내 대한제국의 전시 국외중립을 각국에 통보했다. 중립 선언문은 주한 프랑스 공사 퐁트네(Vicomte de Fontenay)가 작성해주었다. 열강들이 전시중립 선언을 무시하여 국제적 승인을 얻지 못하자 고종은 서울 지역만이라도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 '경성(京城) 중립안'을 선포했다. 그런데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고종은 느닷없이 일본과 공수(攻守)동맹이나 다름없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스스로 국외중립, 경성 중립안을 발길로 걷어찬 것이다. ◆러일전쟁 직후엔 30만 엔(375억 원) 받아 뿐만아니라 한일의정서 체결 5일 후인 2월 28일, 고종은 러일전쟁을 치르는 일본을 돕기 위해 군자금 명목으로 본인과 두 아들(황태자 순종 및 영친왕) 명의로 대한제국 화폐인 백동화 18만 원을 기부했다.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한 사례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 특사를 파견했다. 3월 20일, 이토를 접견한 고종은 "서양인들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 비스마르크 재상, 청나라 리훙장(李鴻章)과 함께 경을 '근세 4걸'이라 부른다"라며 이토 특사를 극찬했다. 고종과 접견 후 이토 특사는 "군자금 제공에 대한 답례" 명목으로 일본 돈 30만 엔이 입금된 예금통장을 고종에게 제공했다. 이것이 한상일 교수가 언급한 '위로금' 명목의 30만 엔 수수 내막이다. 30만 엔은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375억 원 정도다. 그런데 문제의 30만 엔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됐다. 주한 영국 공사 조던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일본 특사를 알현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망을 가동했다. 그 결과 접견식에 배석했던 민영환을 통해 고종-이토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확인했다. 조던 공사는 1904년 3월 31일 본국 외무장관 랜스다운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대사(이토)는 황제(고종)에게 천황 선물이라며 30만 엔을 줬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에 고종이 가진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지분 또한 보장한다고 확약했다." 이토가 제공한 30만 엔은 일본과 군사동맹인 한일의정서을 체결해준 데 대한 격려금, 18만 원의 군자금 제공에 대한 답례금 성격뿐만 아니라, 경부선·경의선 철도 건설을 위한 뇌물이었던 것이다.

    2024-07-22 11:22:40

  • [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신당전쟁의 격전지

    [이덕일의 우리 역사 되찾기] 신당전쟁의 격전지

    현재 사용하는 모든 역사교과서는 신라와 당의 전쟁을 나당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국호의 앞 글자를 따서 신당전쟁이라고 해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이 전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을까? ◆삼국통일인가 영토축소인가? 가장 많은 학교에서 사용 중이라는 비상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는 '나·당전쟁과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항목에서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43쪽)"라고 말하고 있다. 당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는 것으로 신라강역까지 차지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과 신라는 신당연합군을 꾸려서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당이 신라땅까지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같은 교과서는 "이에 신라는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하여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는 한편, 사비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을 몰아내었다. 이어 매소성 싸움에서 당을 크게 격파하여(675) 나·당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기벌포 싸움에서도 당의 수군에 대승을 거두었다(676)."고 말하고 있다. 당이 신라땅까지 차지하려고 하자 신당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니 당이 신라땅은 그냥 두었으면 신당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인가? 같은 교과서는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이남 지역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676)"라고 말하고 있다. 당이 신라땅까지 빼앗으려고 하자 신당전쟁을 일으켜 대동강이남 지역을 차지해서 '삼국통일'의 기염을 토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이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진흥왕 때 순수비를 세웠던 함경도 지역도 빼앗겼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이런 통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신라 사람들은 이를 통일이라면서 기뻐했을까? ◆매소성은 어디인가? 위의 교과서는 신당전쟁의 중요한 분수령 중의 하나로 '매소성' 전역을 들고 있다. 매소성(買肖城:매초성) 전투는 문무왕 15년(675) 9월 29일 일어났는데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자 도주했다. 군마 3만380필을 흭득하고 나머지 병장기도 그만큼 획득했다."(《삼국사기》 〈문무왕 본기 15년〉) 당군 20만과 싸운 매소성의 위치는 어디일까? 한국 사학계에는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의 대모산성(大母山城), 또는 경기 연천의 대전리산성으로 비정한다. 양주 대모산성은 해발 213m의 구릉부 정상에 축조된 둘레 약 718m 정도 되는 산성이다.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의 대전리 산성은 해발 138m에 쌓은 둘레 약 700m의 산성이다. 두 견해 중에서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연천 대전리산성을 매소성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그런데 두 산성을 답사해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두 산성은 어느 모로 보아도 당군 20만 명이 주둔할 수 있는 성은 아니다. 그 1/10인 2만 명만 주둔해도 서로 어깨를 부딪칠 수밖에 없는 협소한 산성이다. 정상적인 역사학자라면 "이 두 산성은 매소성이 아니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미리 정해놓은 결론에 모든 논리를 꿰어 맞추는 한국 사학계는 다르다. 자신들의 생각과 맞지 않으니 "사료가 틀렸다"는 것이다. 즉 《삼국사기》의 20만 명은 과장된 것이며 실제로는 4만 명이라는 것이다. 20만 명이라는 기록을 왜 4만으로 축소하느냐는 질문에 이는 신당전쟁에 투입된 전체 당군의 숫자 20만 명을 적은 것이라고 둘러댄다. 《삼국사기》의 당군 20만 명을 부정하는 논리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 하나뿐이다. 《삼국사기》는 이때 신라가 획득한 3만380필의 말을 '전마(戰馬:전투마)'라고 적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학자들은 전마가 아니라 물자를 수송하는 짐 싣는 말, 즉 태마(駄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가 20만 당군과 싸워서 이겼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억측들이다. ◆매소성 전투와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 매소성 전투는 김유신의 둘째 아들 김원술과 관련이 있다. 《삼국사기》 〈김원술 열전〉에 따르면 원술은 신당전쟁 때 석문(石門) 들판에서 당·말갈연합군과 싸우다가 패배했다. 김원술이 싸우다 죽으려 하자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라면서 여기에서 죽는 것보다 "살아서 나중에 공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렸다. 원술이 "장차 어찌 내 아버지를 볼 면목이 있겠는가"라면서 죽으려 했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아서 끝내 죽지 못했다. 석문전투에서 패전한 신라군이 돌아오자 김유신은 문무왕에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가훈도 저버렸으니 목 베어 죽여야 합니다"라고 주청했다. 문무왕은 "비장에게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없다"고 사면했지만 김유신은 아들을 버렸다. 김유신이 죽자 원술이 조문 왔는데 유신의 부인은 "원술은 이미 선군(先君:김유신)에게 아들됨을 얻지 못했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면서 조문을 거절했다. 원술은 탄식하면서 태백산에 은거하다가 을해년(675)에 매소천성(買蘇川城)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공격하자 원술이 듣고 죽기로 싸워 지난 수치를 씻고자 하였다. 마침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워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서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았다."(《삼국사기》 〈김원술 열전〉) 그 사실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매소천성(買蘇川城)을 앞의 매소성(買肖城)으로 본다. ◆대방은 어디인가? 그런데 김원술이 패전했던 석문들판의 전투를 보면 신당전쟁의 전쟁터가 어디였는지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당군과 말갈군이 석문들판에 진영을 설치하자 신라군은 "대방(帶方)의 들판에 진영을 설치했다"고 말하고 있다. 대방은 낙랑과 함께 한국사의 주요 장소를 말해주는 랜드마크(Landmark), 곧 주요 지형 중의 하나이다.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는 대방군의 위치를 황해도라고 보고 있다. 뚜렷한 사료적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다. 중국 위·촉·오(魏蜀吳)의 역사를 저술한 진수(陳壽:233~297)의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 한(韓)〉조에는 "건안(建安:196~220) 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나온다. 공손강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동쪽과 요녕성(遼寧省) 서쪽 일대에 있던 옛 요동군을 다스리던 요동태수였다. 요동지역에 있었던 낙랑군 산하의 둔유현을 나누어 대방군을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그 대방군은 지금의 황해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학계는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으니 대방군은 황해도에 있었다는 식이다.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사료는 한 둘이 아니다.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는 진(晉)나라의 사람이었는데 진나라 정사인 《진서(晉書)》 〈지리지 평주(平州)〉조에는 평주 산하에 '창려군, 요동국, 낙랑군, 현도군, 대방군'의 다섯 군국(郡國)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중 대방군에 대해서 《진서》는 "공손도(公孫度:공손강의 아버지)가 설치했는데, 일곱 개 현을 관장하며 호수는 4천900이다"라고 말하면서 대방군이 관장하던 일곱 개 현 중에 대방현과 열구(列口)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중 열구현이 중요하다. 《후한서》 〈군국지(郡國志)〉는 열구현에 대해서 "곽박(郭璞)이 주석한 《산해경(山海經)》에 '열(列)은 강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열구현은 열수라는 강의 입구에 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인데, 그 열수는 고대 요동에 있다는 것이다. 즉 열수라는 강이 고대 요동에 있었고 그 강 입구에 세운 열구현은 물론 대방도 황해도가 아니라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것이다. ◆신당전쟁의 싸움터는 만주와 하북성 앞의 교과서의 설명대로 신라가 대동강이남 지역을 얻고 "삼국통일을 달성했다"면서 환호했으면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수도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다. 당의 정사인 《구당서(舊唐書)》 〈지리지 안동도호부〉조는 총장(總章) 원년(668) "평양성을 뿌리 뽑고 그 땅을 안동도호부로 삼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지금의 북한 평양이라고 보지만 이는 사료적 근거를 가지고 고증한 결과가 아니라 '지금의 평양=당나라 안동도호부'라는 도식에서 나온 것이다. 《구당서》는 매소성 전투 이듬해인 상원(上元) 3년(676) "안동도호부를 요동군 옛 성으로 옮겼다"고 말하고 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을 얻고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당은 왜 그 북쪽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겨야 했을까? 이듬해인 의봉(儀鳳) 2년(677)에는 안동도호부를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개원(開元) 2년(714) 평주(平州)로 다시 이전했다. 《구당서》 〈천문지(天文志)〉는 당나라 평주를 옛 고죽국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고죽국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이다. 안동도호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은 신당전쟁과 고구려 부흥운동 때문이었다. 안동도호부가 옮겨간 평주 대방군 지역이 당·말갈연합군과 신라군이 격돌했던 곳이다. 이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났고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만주강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작성해서 당나라에 보낸 〈양위표〉에서 신라강역이 "또한 백이숙제의 고죽국과 강토가 연달아 있었다"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한 것이다. 비록 대진(발해)이 들어서면서 일부 퇴각했지만 대신라(통일신라)의 강역은 계속 만주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크게 왜곡된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대동강 남쪽으로 축소시킨 대신라(통일신라) 강역이다.

    2024-07-08 13:52:24

  •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6)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6)

    역사상의 중국은 화하족 즉 한족과 동이족 즉 밝족이 번갈아 가며 통치했다. 하夏, 서주西周, 한, 당, 송, 명은 화하족이 세운 정권이고 은殷, 진秦, 요, 금, 원, 청은 동이족이 세운 정권이다. 주나라 시대의 중국은 수도가 섬서성에 있었는데 이 때의 중국 강역은 섬서성, 하남성, 안휘성과 하북성 남쪽 일부에 불과했다. 오늘날 소위 말하는 남방의 경제특구는 중국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은 6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강역을 계승했고 한무제, 당태종에 의해 한나라의 강역이 서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었으나 동북방 영토는 진시황시대의 만리장성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남성의 개봉에 도읍한 송나라는 장강 유역을 차지하는 데 그쳤고 그 밖의 영토는 요, 서하, 토번 등이 분할 소유하였다. 명태조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1368~1644)는 건국 초기 남경에 도읍했다가 1421년 명성조 주체朱棣가 북경으로 천도하여 276년 동안 왕조를 유지하였다. 명나라 이전의 한족 왕조는 주로 중국 서쪽 지역에 위치한 장안, 낙양을 도읍으로 하였다. 중국 5,000년 역사상에서 한족이 세운 왕조가 동북방으로 진출하여 북경을 수도로 삼은 것은 명나라가 유일하다. 그러나 명나라 또한 북방 영토는 만리장성 밖까지 확대되었던 것은 아니다. 위환魏煥의 '황명구변고皇明九邊考'에 의하면 명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최전방에 요동遼東, 계주薊州, 선부宣府, 데동大同, 삼관三關, 유림楡林, 영하寧夏 감숙甘肅, 고원固原 9개 군사 방어기지를 설치했는데 모두 북부변경의 만리장성 안쪽에 있었다. 이는 명나라의 북방 영토가 만리장성을 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오늘날의 광활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청(淸)나라 오늘날 중국 영토를 살펴보면 북으로는 내몽고 자치구, 서쪽으로는 파미르고원, 청해성, 신강자치구, 서장자치구, 동북쪽으로는 외흥안령, 남쪽으로는 대만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오늘의 이 거대한 중국,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광활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바로 청나라이다. 청나라는 원래 한족들이 차지한 중원 땅보다도 몇십 배나 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하여 중국의 강역에 포함시켰다. 청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동북방 여진 부락의 한 갈래인 애신각라愛新覺羅 가문이 건립한 국가이다. 애신각라 누루하치는 1616년 동북방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일한 다음 혁도아라赫圖阿拉, 지금의 요녕성 신빈현 동쪽에서 금金나라를 건립하였다. 앞서 누루하치의 조상인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금이라 하였는데, 누루하치의 금나라를 아골타의 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학계에서 이를 후금이라 호칭한다. 1636년 청태종 황태극皇太極(1592~1643)이 즉위하여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바꾸었는데 청태종시대에 중국의 강역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지금의 내몽고와 동북 삼성, 러시아 북쪽의 외흥안령 이북, 그리고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에서부터 동쪽으로 사할린섬까지 이때 모두 중국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서주 시대로부터 명나라 이전까지 한족 정권이 지배하던 시기에는 하북성 동북쪽이 중국 영토에 포함된 적이 없다. 동이족이 집권하면서부터 비로소 지금의 동북 삼성이 중국 영토에 편입되게 되었다. 바이칼호가 지금은 러시아 영토지만 원래는 숙신 땅이었고 청나라 때 중국 강역에 포함되었다. 모택동이 소련을 방문하는 길에 기차를 타고 바이칼호를 지나다가 몹시 분노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청나라 때 중국 영토였던 바이칼호를 러시아에게 빼앗긴 것이 안타까워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이는 모택동의 강한 영토 야욕을 보여주는 한 단면인데 그는 바이칼호에 대한 중국의 역사 주권을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 주권에 무관심한 광복 후 우리나라 지도자들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대만은 '명사明史'에는 이주夷洲로 표기되어 있다. 이주라는 지명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대만은 명나라 이전까지 줄곧 동이족의 나라였다. 대만을 중국으로 통일한 것은 청나라 강희康熙 황제에 의해서이다. 1683년 강희 22년에 대만을 공격하여 중국에 편입시켰다. 강희황제는 대만뿐만 아니라 강희 27년(1688)에서 37년까지 10년 동안 신강, 서장, 청해, 사천성 서부, 감숙성 서부, 파미르고원, 외몽고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중국에 통일시키는 대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청나라는 옹정雍正, 건륭乾隆 황제시대에 새로 귀속된 지역에서 종종 발생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공전의 광활한 국토를 소유한 대 중국으로 탈바꿈하였다. 청나라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12년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가 퇴위하면서 12대 297년 만에 멸망했는데 오늘날의 이 거대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한족의 영웅 한무제, 당태종이 아니라 동이족 정권인 청나라의 강희, 옹정, 건륭 황제에 의해서였다. ◆청나라는 발해조선의 후손이다 금태조 완안 아골타는 숙신의 옛 땅인 지금의 흑룡강성 아성阿城 남쪽에 금나라(1115~1234)를 세웠다. 아골타는 요나라 말엽 여진의 여러 부락을 통일하여 1115년 지금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에 있던 회녕부會寧府에 나라를 세운 다음 국호를 금金, 연호를 수국收國으로 정하였다. '금사金史' 본기에는 "금나라의 시조는 휘가 함보인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 諱函普 初從高麗來)"라고 적고 있다. 함보는 본래 신라사람이었으나 그가 떠나올 때 신라의 옛 땅은 고려 땅으로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함보는 고려에서 왔지만 고려인이 아닌 "고려에서 온 신라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금나라의 시조는 본래 신라에서 왔는데 완안씨라 호칭했다.(金始祖本從新羅來 號完顔氏)" "신라왕의 성은 김씨이다. 그러니 금나라의 먼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다.(新羅王金姓 則金之遠派 出於新羅)"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가 신라왕실 김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못 박아서 말한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인다. "신라왕의 성이 김씨인데 서로 전하기를 수십세를 하였다. 그렇다면 금나라가 신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無疑)"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의 대신 아계阿桂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만주족의 원류를 고증하여 편찬한 책이다. 앞에 흠정 두 글자가 붙어 있는 것은 황제의 특명에 의해 편찬된 것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황제가 국가를 대표하였으므로 흠정은 오늘날의 국정이란 말과 같다. 따라서 만주족의 뿌리를 연구하여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서 금나라의 시조를 신라왕실 김씨의 후손으로 단정한 것은, 당대 학자들의 종합적인 연구 검토를 거친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이라 말할 수 있다. 명나라 말엽 조정이 부패하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해지자 1616년 건주建州 여진 수령 누루하치가 분열된 여진족의 각 부락을 통일하여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1616~1636)을 세웠다. 1626년 누루하치가 전쟁 도중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 황태극이 즉위하여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었다. 후금을 세운 주역인 누루하치 등 건주여진의 귀족들은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직계후손들이다. 아골타가 건국한 금나라의 시조는 김함보인데 김함보는 신라왕실 김씨의 후손이므로 금나라를 계승하여 후금을 건국한 누루하치는 당연히 김씨의 자손이 된다. 신라에서 고려로 왕조가 교체된 이후 신라왕실의 김씨 후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다시 김씨 왕조인 금나라를 세웠고 금나라는 황태극에 이르러 국명을 청나라로 바꾸었는데, 만리장성의 안과 밖을 통일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 판도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청나라였던 것이다. 청나라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김씨에 가서 닿게 되는데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라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청나라는 혈통적으로 따지자면 오늘의 한국인과 피를 나눈 발해조선의 후손들이다. 유득공柳得恭이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킨 것처럼 앞으로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국사가 중국역사에 귀속된다"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이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는 시진핑의 허튼소리는 저절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2024-07-01 13:47:06

  • [데스크 칼럼] K의료의 위기

    [데스크 칼럼] K의료의 위기

    정부와 의료계가 의대 증원을 놓고 넉 달 넘도록 싸우는 사이 K의료가 골병 들고 있다. 둘 다 '국민과 환자를 위해서'라는 이유와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국민과 환자는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의 한국 의료 시스템도 마비될 판이다. 병원들은 더 나은 시설과 서비스를 확충하고 업그레이드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뒷걸음질하고 있다. 시설 투자 지연·중단, 장비 구입 최소화, 신규 사업 축소 및 연기 등의 비상경영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게 K의료의 현실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의 최근 현장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공의 수련병원인 국립대병원과 사립대병원 47곳 중 75%에 해당하는 35곳이 비상경영을 선포한 상태다. 일반 병동 통폐합·축소, 중환자실 병상 축소 운영, 수술실·회복실 통폐합 운영, 진료과 축소 운영, 병상 수 조정, 긴급 치료 병상 확충 계획 보류, 근무 시간 단축, 야간근로·당직 근무 축소 등 '연명' 경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공의 이탈, 의대생 수업 거부 사태에 따른 상당한 후폭풍도 우려된다. 지난 2월 의대 증원 발표 후 떠난 전국 1만 명에 이르는 전공의가 아직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전임의, 전문의 배출 문제를 불러 향후 수년간 의료 공백을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수업 거부 중인 의대생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유급될 경우 전국 의예과 1학년 3천 명과 내년 신입생 4천500명(의대 증원분 1천500명 포함)을 합쳐 7천500명이 내년에 1학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예년 의대 정원의 2.5배다. 교수진·시설 부족에 따른 교육 질 저하 등 현장 혼란이 불가피하다. 과밀학급에서 수업 및 실습을 하며 6년을 보낸 뒤엔 전공의 취업 대란 사태에 직면해야 한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를 선결 과제로 고집한 의료계의 책임도 있지만, 필수의료 개선이라는 본질보다 의대 증원이라는 현상에 매몰된 채 유연하지 못한 대처를 한 정부의 잘못도 크다. 오죽했으면 보다 못한 환자 단체가 정부의 일방적인 의대 증원 및 2천 명이라는 숫자 집착에 일침을 가했겠는가.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최근 "정부가 갑작스레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과정에서 2천 명이라는 숫자에만 매몰됐다"고 꼬집은 바 있다. 다행히 정부도, 의료계도 한발 물러서는 분위기다. 대한의사협회는 27일부터 돌입하기로 한 무기한 휴진을 일단 유예, 29일 예정된 의대 교수와 전공의, 시도의사회 대표 등 3명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보고 향후 투쟁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정부도 의료계 소통 창구를 일원화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계기로 의료계와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기로 했다.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누구나 언제든 싸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K의료를 붕괴 위기에서 살릴 수 있는 기회다. 대학별 입시 시행 계획이 이미 확정돼 2025년 의대 증원 백지화나 원점 재검토가 불가능하다는 걸 의료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협상 가능성이 없는 의제를 계속 요구하는 건 대화 의지가 없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정부 역시 의대 증원에 발목 잡혀 의료 체계가 무너진다면 의료 개혁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모를 리 없다. 앞서 의대 정원 규모, 시기 등 조정이나 협의 여지, 기회가 있었지만 양쪽 모두 놓쳤다. 부디 이번엔 어렵게 조성된 절호의 대화 및 합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2024-06-26 19:30:00

  • [김용삼의 근대사] 대한민국을 구한 '영천전투'를 아십니까?

    [김용삼의 근대사] 대한민국을 구한 '영천전투'를 아십니까?

    1950년 8~9월 대한민국은 풍전등화라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포항-영천-대구-마산으로 이어진 동서 80㎞, 남북 160㎞의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처절한 항전을 계속했다. 어느 한 곳이라도 전선이 뚫리면 부산이 하루 이틀 사이에 공산군에게 점령당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낙동강 방어전에 투입된 아군은 국군 5개 사단, 미 8군 3개 사단 등 총 8개 사단이었다. 통상 사단 방어 정면은 아무리 길어야 15㎞인데, 8개 사단이 240㎞를 방어하자니 1개 사단이 통상 방어구역의 2배인 30㎞를 책임져야 했다(정일권, 『정일권 회고록』, 고려서적, 1996, 181~182쪽). 김천에 전선 사령부(사령관 김책)를 설치한 인민군은 2개 군단(총 13개 사단) 병력이 낙동강 방어선 일대에 배치됐다. 김일성은 김천에 나타나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다그쳤다. 이 무렵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주저항선이 무너져 유엔군이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할 때 부산항을 유지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 안쪽에 최후의 저지선을 극비리에 준비했다. 울산 동북쪽 17㎞의 서동리에서 경상남북도 경계선을 지나 밀양 북쪽의 유천과 서쪽 무안리 능선을 따라 마산 동북쪽 고지까지를 잇는 약 90㎞의 이 방어선은 '데이비드슨 라인'이라 명명됐다. 8월 18일 정부는 부산으로 임시 수도를 이전했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워커 장군은 미 8군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결정하고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한국 국방부와 내무부도 부산으로의 철수를 권고했다. ◆9월 4일부터 영천에서 혈전 벌어져 신 장관은 국방부를 부산으로 철수하려 했으나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절대 대구에서 물러나선 안 된다고 외쳤다. 그는 워커 장군을 찾아가 "대구를 포기하면 부산마저 잃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반드시 대구를 사수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부산으로의 철수 준비를 끝내고 있던 워커 장군은 조병옥 장관의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그는 "나도 사령관실에 침대를 갖다 놓고 작전 지휘를 할 것이니 귀하도 미군 작전에 협조해 달라"면서 미8군 사령부의 부산 이동 계획을 취소했다. 다부동과 포항에서의 격전에 이어 9월 4일부터 대구와 포항의 중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을 둘러싼 대혈전이 벌어졌다. 낙동강 전투 최후 결전장이 된 영천은 유재흥 장군의 국군 제2군단(8사단, 7사단, 6사단 일부)이 방어를 맡고 있었다. 인민군은 박성철이 지휘하는 15사단이 영천에서 국군과 혈투를 벌였다. 9월 8일, 영천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자 워커 장군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대구와 경주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고, 미군은 한국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 워커 사령관은 데이비드슨 라인으로의 전면 철수를 계획하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데이비드슨 라인으로 철수 준비 그는 정 총장에게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2개 사단과 한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군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 명을 제주도나 하와이, 괌 등지로 이송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정일권 총장이 이 내용을 이승만에게 보고하자 대통령은 "워커 그 사람 역전의 맹장이라고 듣고 있는데, 보기보다는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 하며 격노했다. "정 장군! 워커 장군에게 말하시오.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 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 미군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공산 침략군을 물리치고 정의와 자유를 지키자고 온 것 아닌가. 그런데도 좀 위태롭다 해서 가고 싶다면 자기들끼리만 떠나라고 하시오!"(정일권, 앞의 책, 238쪽). 이 무렵 영천을 점령한 인민군이 경주 쪽으로 진출할 것을 예측한 유재흥 군단장은 경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국군 5개 연대를 매복시켜 놓았다. 예상대로 인민군은 경주를 향해 내려오다가 국군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국군은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사흘 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영천 섬멸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인민군 3천799명을 사살하고 309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전차 5대와 장갑차 2대, 각종 화포 14문, 소화기 2천327정, 차량 85대를 노획했다. 인민군은 투입된 병력 거의 전부가 사살되거나 부상 당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반면 국군의 피해는 전사 29명, 부상 148명, 실종 48명 등이었다. 영천 섬멸전의 대승으로 미군의 데이비드슨 라인으로의 철수는 없던 일이 됐다. 영천 섬멸전이 시작되기 전날인 9월 9일에는 경주 지역 방어선이 적의 대공세로 위태롭게 됐다. 정일권 총장은 수도사단 18연대(일명 백골부대) 연대장 임충식 대령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대한민국의 명운은 오직 백골부대 여러분의 용전에 달려 있다. 본직(本職)은 여러분의 분발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히 말하노니, 여러분은 경주를 무덤으로 삼아 전원 옥쇄하라!"(정일권, 앞의 책, 217쪽) 수도사단 18연대는 서북청년단원들이 18연대에 자진 입대하면서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는 뜻으로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은 데서 부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전투를 했다 하면 승리하여 인민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긍지 높은 연대에 육군참모총장이 옥쇄를 명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임충식 연대장은 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시했다. "우리 연대의 영예 높은 백골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가 왔다. 참모총장 각하의 각별하신 격려의 뜻을 받들어 연대장은 진두에 서서 경주를 사수할 것이다. 이 연대장이 진두에서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누구라도 좋다. 이 연대장을 쏴 죽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연대장의 시체를 방패 삼아 최후의 일병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연대 장병들은 '결사(決死)' 두 글자를 백골 철모에 동여매고 경주를 지켜냈다. 그들은 지원 나온 미군 제19연대와 협동하여 안강·기계를 탈환하고 인민군 제12사단을 섬멸했다. 영천 섬멸전, 안강·기계 탈환 직후인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대한민국은 기사회생했다.

    2024-06-24 13:53:18

  • 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6기 동기회, 졸업여행 겸 2024년 워크숍

    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6기 동기회, 졸업여행 겸 2024년 워크숍

    매일탑리더스아카데미 16기 동기회(회장 황주철)는 23일까지 1박 2일 간 경남 통영 일대에서 회원 16명이 참가한 가운데 졸업여행 겸 2024년 상반기 워크숍을 가졌다. 또 정기총회를 열고 이순옥 수석부회장을 제3대 동기회장으로 선출했다.

    2024-06-24 12:12:17

  • (사)벤처기업협회전국협의회 제4대 권원현 회장 취임식

    (사)벤처기업협회전국협의회 제4대 권원현 회장 취임식

    (사)벤처기업협회전국협의회는 지난 31일 팔공산 평산아카데미연수원에서 본회 및 8개 지회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4대 권원현 회장 취임식을 가졌다. 권 회장은 이날 취임식에서 "지역의 특색에 맞는 벤처기업 선순환 생태계 조성에 앞장서고 정책 제안과 신규 벤처 발굴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본회와 지방 지회 간 소통을 강화하고 지역 간 협력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권 회장은 ㈜창림이엔지 대표이사로 영국 업체와 혈액분석기 개발을 진행 중이다. 현재 벤처기업협회 대구경북지회장과 한국산업단지공단 대구지역본부 성서 기계금속소재 미니클러스터 회장을 맡고 있다.

    2024-06-04 15:06:20

  •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5)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5)

    원시사회에서 인류는 자연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어떤 초자연적인 신비한 역량을 지닌 식물이나 또는 동물을 자신들 씨족의 조상신 혹은 보호신으로 여겨 숭배했는데 이를 토템이라고 한다. '시경'의 상송(商頌) 즉 상나라를 찬미한 시가 가운데는 "하늘이 현조에게 명하여 내려와서 상나라를 탄생시켰다(天命玄鳥 降而生商)"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현조란 우리말로 바꾸어 말하면 검은 새를 가리키는데 검은 새가 어떻게 상나라를 탄생시킬 수 있겠는가. '좌전' 소공 17년 조항에 "소호(少昊) 시대에 봉조씨(鳳鳥氏), 현조씨(玄鳥氏), 청조씨(靑鳥氏), 단조씨(丹鳥氏)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상고시대에 새를 토템으로 한 여러 씨족이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시경'에 말한 "검은 새가 상나라를 탄생시켰다"라는 기록은 검은 새를 토템으로 한 현조씨족에 의해서 상나라가 건국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겠다. '시경' 상송에 나오는 현조를 봉황이라고 할 경우 소호시대에 봉황을 토템으로 한 봉조씨가 이미 존재했으므로 이와 중복된다. 주희는 '시경'의 주석에서 "현조는 제비이다(玄鳥 鳦也)"라고 하였는데 상나라를 탄생시킨 현조를 제비라고 할 경우 상징성이 너무 빈약하다. 그러면 상나라를 건국했던 현조씨족이 토템으로 했던 현조는 과연 어떤 새일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삼족오가 아닐까 여겨진다. 다른 동물은 다리가 둘이거나 넷인 데 반해 삼족오는 특이하게 다리가 셋으로서 신비하다. 이 세 발 달린 검은 새는 어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역량을 지닌 새라고 믿어 씨족사회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특별히 3수를 숭배했던 동이족의 사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필자는 발해만의 하북성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일대, 옛 고죽국이 있던 지역이 발해조선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누차에 걸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시경'의 상나라 탄생을 찬미한 시가에 등장하는 "현조생상(玄鳥生商)"의 전설이 공교롭게도 노룡현 지역에서 유행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왜 노룡현에서 이런 전설이 유행하는 것일까. 사마천 '사기' 삼대세표(三代世表)에 "설의 어머니가 자매들과 현구수에서 목욕했다(契母與姊妹 浴于玄丘水)"는 기록이 보인다. 설(契)은 상나라를 건국한 국조로 말해지는데 그의 어머니가 자매들과 함께 현구수에서 목욕했다는 것은, 먼 옛날 상나라의 조상들이 현구수 부근에 거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구수란 어떤 강인가. 현수(玄水)로 비정된다.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경내를 구비쳐 흐르는 청룡하가 바로 고대에는 현수로 불렸다. '수경주(水經注)'에 "현수가 서남쪽으로 고죽성(孤竹城) 북쪽을 경유하여 서쪽으로 유수에 유입된다(玄水 又西南徑孤竹城北 西入濡水)"라고 말했는데 지금의 청룡하인 옛 현수는 난하(灤河) 즉 옛 유수(濡水)의 지류로서 도림구(桃林口) 장성(長城)을 경유하여 노룡현 경내로 진입하였다. '수경주'에 말한 현수가 경유한 고죽성은 현재의 노룡현이고 노룡현은 고조선의 발상지이다. 그러므로 노룡현의 청룡하를 배경으로 유행하는 현조 전설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고조선의 발상지에서 유행하는 삼족오 전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북성 노룡현의 삼족오 전설,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다 하북성 노룡현에서는 "현조생상"의 전설을 하북성의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고 2009년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승인하였다. 비물질문화유산이란 우리나라로 말하면 무형문화유산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노룡현의 삼족오 전설이 하북성 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두 가지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노룡현의 청룡하 즉 옛 현수 유역을 '시경'에서 말한 현조 전설의 발상지로 보는 데 중국 정부가 동의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은나라의 도성 유적 은허(殷墟)는 하남성 안양에 있지만 은나라의 산실 즉 발상지는 옛 고죽국 고조선 지역, 현재의 노룡현 일대라는 사실을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공인한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현재의 노룡현은 4,000년 전 고조선이 여기서 건국했고 상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전 여기서 터전을 닦았으며 다시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뒤이어 여기서 건국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사달(朝陽)에서 발견된 '중화용조(中華龍鳥)'는 고조선의 삼족오다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발해만의 노룡현을 중심으로 삼족오 전설이 유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발해만 일대는 조류의 지상낙원으로 불린다. 특히 하북성 노룡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요녕성 조양시(朝陽市)가 있는데 조양의 조(朝)는 아사, 양(陽)은 양달로서 조양은 우리말 아사달의 한자표기로 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악산 아사달은 단군조선의 제2기 도읍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 조양시 즉 아사달에서 세계최초의 조류화석이 발견되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 새를 '중화 용조中華龍鳥'라 명명하였고 여기에 요녕조양조화석국가지질공원(遼寧朝陽鳥化石國家地質公園)을 건립하여 세계적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세계 최초의 조류화석이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발견됐기 때문에 '중화'라는 명칭을 앞에 붙인 것이고, 새는 새이지만 일반 새와는 다른 특이한 새이기 때문에 '용조'라고 호칭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조양은 중원과는 멀리 떨어진 동북방의 고조선 아사달 지역이다. 특히 고조선의 토템은 삼족오였던 점을 감안 한다면 이 세계 최초의 새는 중화 용조라기 보다는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고조선의 삼족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조양시는 노룡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발해조선의 중심지대인데 이 일대는 상고시대에 조류의 서식지였고 지금도 새들의 지상낙원으로서 조류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발해조선이 새를 토템으로 했던 것은 이런 지역적 특성과도 관련이 깊어 보인다. ◆삼족오는 발해조선, 상나라, 고죽국의 토템이다 "후예가 태양을 향해 활을 쏘니 태양조(太陽鳥)인 삼족오가 떨어졌다(羿焉彃日 烏焉解羽)"는 기록이 '초사(楚辭)' 천문편(天問篇)에 나오는데 삼족오는 중원이나 한족의 유물유적 가운데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현재 발해유역의 고조선 발상지 하북성 노룡현에 삼족오 전설이 유행하고 있고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로 여겨지는 조양시에서 삼족오 화석이 발견되었다. 태양을 숭배했던 발해조선 사람들은 삼족오를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조 또는 태양에서 온 사자라고 믿고 이를 태양숭배의 연장 선상에서 숭배하였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삼족오는 고구려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삼족오 토템을 계승한 것이다. 한나라 때 건축한 산동성의 무씨사당 화상석(畫像石)에도 삼족오가 보인다. 무씨사당은 상나라 시조 치우 후손들의 사당이고 치우는 현조씨족의 수령이다. 상나라의 조상들은 동북방에 거주하던 동이족이며 이들은 고조선과 함께 태양조인 삼족오를 토템으로 삼은 조이족(鳥夷族)이다. '시경'에 말한 상나라를 탄생시켰다는 현조는 제비가 아니라 삼족오이고 그 역사의 현장은 노룡현이다. 태양을 숭배한 고조선과 상나라의 태양조 토템, 즉 삼족오 토템은 고죽국으로 전승되었으며 그 역사 전설이 오늘날 노룡현의 청룡하 유역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발해만의 고조선이 삼족오의 발상지라는 것은 조양시의 조류화석이 발견됨으로써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 하북성 정부가 노룡현에 전해오는 현조 설화를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함으로써 노룡현이 삼족오의 발상지임을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고조선의 토템이 곰이라는 반도사학의 주장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2024-06-03 14:05:36

  • [김용삼의 근대사] 대한제국 패망과 1907년 열강의 외교 혁명

    [김용삼의 근대사] 대한제국 패망과 1907년 열강의 외교 혁명

    최근 미국이 중국 포위전략을 본격화하면서 동아시아에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물밑에서는 각국의 국익과 생존을 위한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외교전에서 소외되면 그 나라는 망국 혹은 쇠망의 길을 걷게 된다. 비슷한 상황이 20세기 초에 벌어졌을 때 대한제국은 열강 외교전의 희생양이 되어 일본에 병합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21세기 격전의 화두가 중국 포위전략이었다면, 20세기 초의 화두는 영국이 한 세기 내내 벌어왔던 러시아 포위전략(영·러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하고 모든 역량을 신흥강국 독일 포위전략으로 전환하면서 비롯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함대에 대패하여 태평양함대와 발트함대를 상실했다. 그 결과 영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이 와중에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베를린-바그다드 철도(3B 정책) 부설, 건함 경쟁, 격렬한 해외 팽창 등 공세적인 세계정책으로 영국의 해양 패권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독일의 도전에 직면한 영국은 전 세계에 분산 배치한 자국 해군력을 본토 주변으로 재배치하여 유럽에서 독일의 공세에 대응해야 했다. 이를 위해 동맹국 일본의 협조와 숙적 러시아·프랑스를 끌어들여 견고한 독일 포위망 형성을 위한 외교 공작에 나섰다. 영국은 러일전쟁 막바지인 1905년 8월 12일, 일본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핵심 내용은 러시아가 인도를 침공할 경우 일본은 영국 편에 참전하는 조건으로 영국은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 조약을 계기로 일본은 그해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여 보호국으로 삼는 데 성공했다. ◆불일 협정이 외교 혁명 촉발 영국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았으니 일본도 영국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프랑스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일본이 자국 세력권인 인도차이나반도를 침공하지나 않을까 우려했다. 이 와중에 일본은 영국의 부추김을 받고 프랑스와 비밀 접촉에 나서 1907년 불일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협정의 핵심 내용은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 지배, 일본은 대한제국 지배를 묵인하는 상호 유쾌한 거래였다. 불일 협정을 신호탄으로 러시아와 일본, 영국과 러시아가 연쇄적으로 외교 접촉을 개시하면서 1907년 외교 혁명이 폭발하게 된다. 불일 협정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후 관계가 불편해진 러시아와 접촉을 시작했다. 러일전쟁은 전투에서는 일본이 승리했지만, 외교전에선 러시아가 승리했다. 러시아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승전국 일본에 배상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고, 전쟁의 핵심 목표였던 대한제국의 독립 문제도 러시아의 뜻을 관철했다. 즉,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은 수용했지만, 대한제국의 독립을 인정했고, 또 대한제국의 주권을 변경하려면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동의 받아야 한다고 못 박는 데 성공했다. 포츠머스강화조약에서 미봉된 대한제국 '보호권' 문제로 인해 러일 간에 외교 갈등이 일어나자 러일 양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07년 3월부터 비밀협상에 나섰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병합을 러시아가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핵심 쟁점이 합의되지 못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일본을 한 방 먹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고종을 이용하기로 했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여 만국 평화회의장에서 일본의 침략 야욕을 폭로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그런데 고종의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하기 전날, 러일 양국은 극적으로 핵심 쟁점 사안에 타협하게 된다. 덕분에 대한제국 밀사는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 ◆4국 협조체제 탄생 1907년 7월 30일 체결된 제1차 러일협약은 하얼빈-지린(吉林)을 분계선으로 만주를 분할하여 일본은 대한제국, 러시아는 외몽골을 특수이익 지역으로 나눠 갖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러시아는 외몽골을 차지하는 대가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을 묵인한 것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프랑스·러시아가 손잡는 데 성공하자 이번에는 영국이 러시아와 접촉했다. 영국은 19세기 내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치고받는 열전(그레이트 게임)을 벌였던 앙숙 러시아와 1907년 8월 31일 영러 협상을 체결한다. 핵심 내용은 페르시아 북부는 러시아, 남부는 영국 세력권으로 정했고, 아프가니스탄은 영국의 세력권으로 인정, 티베트는 영토 보전에 합의했다. 영국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는 인도 보호를 위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 대가로 영국은 러시아의 발칸반도 진출을 묵인함으로써 양국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배를 타게 된다. 1907년 외교 혁명의 핵심 본질은 영일동맹과 러불동맹의 결합이었다. 이로써 오랜 기간 적대관계였던 영국·러시아·프랑스가 동일 진영으로 뭉쳐 삼국협상(Triple Entente)이 출범한다. 여기에 일본을 끌어들여 독일 포위망을 형성하는 4국 협조체제의 출범이 제1차 세계대전의 거시 구조적 기원이다. 독일은 4국 협조체제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미국·청나라와 접촉한다. 독일 주도로 삼국간섭이 일어나면 대한제국 병합이란 대어를 놓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미국과 독일을 갈라놓기 위해 미국과 접촉한다. 그 결과물이 1908년 11월 30일 체결된 루트-다카히라 협정(태평양 방면에 관한 미일 교환공문)이다. 이 협정의 핵심은 미국의 하와이 왕국 병합, 필리핀에 대한 관리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한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과 남만주 지배권 승인이었다. 미국마저 일본의 대한제국 병합에 찬성한 것이다. 대한제국 지도부는 긴박하게 움직이는 열강 간 이합집산, 변화무쌍한 국제정세를 파악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그 결과 고종은 러시아에 의지하여 왕권 유지를 시도했다. 헤이그 밀사 파견, 의병 봉기마저 실패하자 고종은 러시아에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미 일본과 모든 거래를 끝낸 러시아가 고종의 망명을 수용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결과 1907년부터 대한제국 관리권이 일본에 넘어갔고, 그 마지막 귀결점은 1910년 일본에의 병합이었다. 1907년 열강의 외교 혁명이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한 셈이다.

    2024-05-27 11:33:47

  • 이동건 ㈜동남KTC 대표, 중기부 '모범중소기업인' 표창

    이동건 ㈜동남KTC 대표, 중기부 '모범중소기업인' 표창

    이동건 〈주〉동남KTC 대표는 최근 공구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중소벤처기업부의 모범중소기업인 표창을 받았다.

    2024-05-26 14:30:35

  • 삼덕교회·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 경로잔치

    삼덕교회·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 경로잔치

    대구 삼덕교회(강영롱 목사)와 중구재가노인돌봄협의체는 25일 가정의 달을 맞아 지역 내 취약 어르신 370여명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열고 다양한 공연과 양·한방 진료 및 미용 서비스, 기념품 및 식사 등을 제공했다.

    2024-05-26 14:24:48

  • [데스크칼럼] 의정 갈등, 잔인한 5월 기회의 5월

    [데스크칼럼] 의정 갈등, 잔인한 5월 기회의 5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의료대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던 5월이다. 의대 증원에 따른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으로 의료 공백이 발생한 지 세 달째. 다행히 우려했던 대란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란'이 일어날 걸 알면서도 치킨 게임만 하고 있는 의료계와 정부가 무섭기까지하다. 이달 중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에 대한 법원의 결정이 예고돼 있어 그 결과에 따른 '5월 대란' 우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의 의대 증원 필요성은 일리 있다. 투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수치 근거와 추진 과정이 문제다. 의료계도 증원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2천명 증원 근거를 모르겠다며 같이 따져보고 적정한 규모와 시기를 정하자는 것이니 이 또한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에 대한 정부의 계획도 확인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양쪽은 서로 상대에 귀 닫고 자기주장만 하고 있으니 무모하고 무한 동어반복만 하는 진흙탕 싸움이 돼버렸다. 그러던 사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법원의 결정, 대입전형 시행계획 승인 및 대학 수시모집요강이 나오는 5월이 지나면 파국이다. 전공의 3천명도 20일까지 복귀하지 않으면 자격 미달로 내년도 필수의료 분야 등의 전문의가 될 수 없다. 병원들도 전공의 이탈 등 의료진 부족에 따른 적자로 무너지기 직전이다. 이는 결국 의료 서비스 저하든 치료비 상승이든 환자의 피해, 손해로 돌아간다. 그런데 양쪽 모두 더는 물러설 데가 없다는 게 문제다. 법원의 집행정지 각하 결정으로 의대 증원이 확정되면 의료계는 벼랑 끝 투쟁에 돌입할 게 불 보듯 뻔하다. 반대로 법원이 받아들이면 정부의 올해 증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동력을 상실, 이후 증원 계획과 추진 일정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건 당사자 간의 해결이다. 증원을 하든 안 하든 직접 당사자들의 대화, 소통을 통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래야 후유증도 적다. 그런데 의정 간 만남도 대화도 소통도 없다. 정부를 못 믿어 대정부 대화 소통창구인 의료개혁특별위원회에도 의료계는 참여하지 않는다. 위원회, 협의체 더 만든다고 소통이 되고 사태 해결이 될 리 만무하다. 마침 윤석열 대통령의 적극적인 소통 행보가 시작됐다. 대통령 취임 후 2년 만에 처음으로 야당 대표와 회동도 하고, 지난 2022년 8월 취임 100일 회견 이후 처음으로 기자회견도 하기로 했다. 의료계와도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 좋은 타이밍이다. 기왕이면 9일 윤 대통령 취임 2주년 기자회견 때 모두발언을 통해 또는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제안하면 자연스러울 거 같다. 생중계로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윤 대통령이 주재하고 해당 정부 부처, 전공의·의대생·의대교수·의사협회 등 의료계 각 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긴급 토론 형태가 돼야 한다. 누가 맞고 틀린지, 누가 승자고 패자인지 가리자는 게 아니라 정부가 고집하는 2천명 증원 정책의 근거와 현실성이 명확한지, 반대하는 의료계의 주장에 타당성이 있는지 다 꺼내놓고 규모와 시기, 분야, 방법 등을 논하고 정하는 자리여야 한다. 단 전공의·의대생 복귀가 전제돼야 한다. 결과와 상관 없이 양쪽 모두 깨끗하게 받아들이고 화해하고 의료 사태를 곧바로 정상화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 잘못 알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쿨하게 인정하고 수정, 조정해야 한다. 고수하던 주장을 꺾는다고 욕하거나 비난하는 국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박수 받을 수 있다. 지금은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 퇴로나 주장 철회 명분을 만들어 줄 필요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검사와의 대화를 한 적이 있다. 수모도 겪었지만 지금도 '노무현'하면 떠오르는 명장면, 대표적인 모습으로 깊이 남아있다. 윤 대통령도 진짜 승부사이고, 의대 증원 근거가 분명하다면 지금이라도 직접 만나야 한다. 현재 이 문제만큼 급하고 중요한 현안도 없다. 소신도 좋고 원칙도 좋다. 그렇다고 국민보다 앞설 순 없다. 국민의 생명보다 중할 순 없다. 정부든, 의료계든, 대통령이든 중심엔 '국민'이 있어야 한다. 국민을 위해 더는 의료 공백이 이어져선 안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일 수 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이 그때다.

    2024-05-08 17:20:16

  •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4)

    [심백강의 한국고대사]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24)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기치를 내걸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를 과감하게 받아들여 가난한 중국을 부강한 중국으로 만든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는 등소평이다. 등소평은 1992년 88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근 한달 동안 심천深圳, 주해珠海, 상해上海 등지를 시찰하며 연도에서 개혁개방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이것을 남순강화南巡講話라 한다. 여기서 등소평은 검은 고양이가 됐든 흰 고양이가 됐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30년 전에 등소평이 대담하게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경제발전의 혜택을 누리는 곳은 주로 중국 장강長江 남쪽이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문명과는 거리가 먼 지역도 많다. 현재 중국에서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장강 유역의 강소, 절강, 복건은 본래 동이족이 살던 땅이다. 황하중류를 중심으로 출발한 한족 정권은 한무제 유철劉徹(서기전 156~서기전 87) 이전에는 만리장성 안쪽을 모두 지배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는 장강 유역마저도 제대로 손아귀에 넣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기전 111년 한무제는 장강 남쪽의 남월과 동월을 침략하여 한나라에 복속시켰다. 남월은 오늘날의 복건성이고 동월은 오늘날의 절강성 지역이다. 본래 동이족의 땅이었던 복건성, 절강성 일대는 2000년 전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한왕조의 영토로 편입되게 되었는데 오늘날 이 지역이 중국의 경제발전을 선두에서 견인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무제 유철은 한족 역사를 새로 쓴 최고의 위대한 영웅이다. ◆한무제 유철의 발해조선 침략 남쪽의 남월과 동월을 침략하여 절강성, 복건성 일대까지 한나라의 강역을 넓힌 한무제 유철은 다시 동북쪽의 발해유역에 있던 고조선을 침략하여 정복하려는 야심을 품게 된다. 서기전 110년 한무제는 전국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18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병력을 북쪽 변방과 동쪽 바닷가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서기전 109년 가을 섭하涉何를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우거왕을 저들에게 복종하도록 회유했다. 고조선의 우거왕이 이를 거절하자 한나라의 사신 섭하는 돌아가는 길에 조, 한 국경선인 패수 즉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동쪽의 조백하에 이르러 자신을 전송하기 위해 따라갔던 고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서 도망치는 외교상에 어긋나는 비열한 행위를 자행했다. 고조선에 대한 노골적인 만행에 분노한 고조선 왕은 그에 대한 보복적 조치로서 요동군동부도위를 습격하고 섭하를 잡아 살해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조선의 국력이 중국의 눈치나 보는 약소국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전쟁 준비를 끝낸 한무제는 고조선 정벌의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일부러 분쟁을 야기시켰는데 고조선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서기전 109년 바다와 육지 양면으로 고조선 침략에 나섰다. 한무제는 서기전 109년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수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발해 쪽에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에 있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양복을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그가 서기전 111년 남월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공을 세우는 등 해전의 전투경험이 풍부했으므로 그에게 해군의 총지휘를 맡긴 것이다. 한편 육군의 총사령관은 좌장군 순체荀彘를 발탁했다. 그는 북방의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야전 경험이 풍부한 장수였다. 순체로 하여금 육로를 이용하여 패수 즉 지금의 북경 동쪽의 조백하를 건너서 양복의 해군과 함께 고조선의 왕검성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을 공격하게 하였다. 순체의 육군은 당시 하북성에 있던 요동군에서 출발하여 고조선 서쪽을 침공했고 양복의 해군은 발해 쪽에서 출발하여 고조선 동쪽을 공격했다. 한무제는 수륙 양군의 합동작전에 의해 고조선의 수도는 쉽게 함락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전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첫 전투에서 한나라의 수륙 양군이 모두 대패를 한 것이다. 해군 총사령관 양복은 병졸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산속으로 도망쳐 10여 일간 숨어 지내다가 겨우 살아남은 패잔병들을 다시 긁어모으는 상황이었으니 이는 당시의 전황이 어떠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전쟁 중 평화협상 실패한 심복 두 명이나 처형시킨 한무제 전쟁이 예상과 달리 한나라의 패색이 짙어지는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한무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 위산衛山을 보내 고조선의 우거왕과 평화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그러나 양측의 팽팽한 줄다리기로 협상은 결렬되었고 위산이 돌아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전쟁을 마무리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자 화가 난 한무제는 협상 결렬의 책임을 물어 위산을 처형했다. 양측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 패전한 한나라의 군대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고 평화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공격 자세로 전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육군대장 순체와 해군대장 양복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따라서 수륙 양군의 합동작전을 통해 조선을 함락시키려는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한무제는 위산이 평화회담에 실패하고 또 순체와 양복은 둘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전쟁이 아무런 진전도 없이 세월만 흐르게 되자 이번에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守를 전권특사로 파견하여 대책을 강구토록 했다. 공손수는 현장에 가서 해군장군 양복을 체포하여 가두고 양복의 수군을 순체의 육군에 포함시켜 순체가 총지휘하도록 조치한 다음 이를 한무제에게 보고했다. 한무제는 보고를 받자마자 공손수를 또한 사형에 처하였다. 천하의 한무제가 전쟁 도중에 자신의 심복을 평화협상 진행을 위해 조선에 급파하고 또 자신이 파견한 특사를 두 사람이나 책임을 물어 처형시킨 것을 본다면 한과 조선의 전쟁이 얼마나 한나라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전쟁 참전한 육군, 해군 총사령관 극형 한무제는 조선전쟁 후 전쟁에 참전한 육군, 해군 총사령관을 극형으로 다스렸다. 한무제는 전쟁 도중에 평화협상을 성공시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두 명의 특사를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에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이끌었던 좌장군 순체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하고 해군 총사령관 누선장군 양복은 평민으로 강등시켰다. 기시형은 고대사회에서 집행하던 사형 중의 하나인데 여러 사람이 모인 저자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했다. 극악무도한 죄인에 대해서 이 형벌을 시행했는데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 대해 포상을 하기는커녕 순체는 기시형이란 극형에 처하고 양복은 평민으로 강등시키는 처벌을 한 것은 한무제의 조선침략은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실패한 전쟁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무제 유철의 발해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 이상은 사마천이 쓴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조, 한 전쟁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의 조선열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조선 전쟁에 참여한 중국측 장군들은 처형이나 처벌을 받은 반면 논공행상에서 오히려 조선의 재상이나 장군들이 제후로 봉해지는 영광을 안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나라가 군대를 통한 조선과의 정면 승부에서 실패하자 몰래 간첩을 들여보내 조선조정 내부를 이간시킴으로써 야비한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했다는 반증이라고 본다. "조선의 이계상尼谿相 참參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와서 항복했다"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서, 위기에 몰린 한무제는 정정당당한 승리가 아니라 내부교란을 이용한 비열한 방법을 통해 승리를 거둔 사실이 행간에서 묻어난다.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한무제의 조선 침략은 실패한 전쟁으로서 조선은 이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었고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은 고조선의 서쪽 강역 즉 현재의 하북성 서남쪽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 이는 마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그 일부 지역을 러시아에 편입시킨 것과 같았다. 이때 한무제가 대동강 유역에 있던 고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반도사관이다. 고조선을 멸망시켰다는 것도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shimbg2001@daum.net)

    2024-05-06 14:01:01

  • [김용삼의 근대사] 이승만이 이완용보다 더 나쁜 죄인?

    [김용삼의 근대사] 이승만이 이완용보다 더 나쁜 죄인?

    이승만 반대론자들이 이승만을 공격하는 논리 중의 하나가 1919년 3월 3일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위임 통치 청원이다. 위임 통치란 패전국의 영토 또는 식민지를 병합하던 종래의 관행과는 달리, 해당 영토에 대한 병합을 금지한다는 전제 하에 국제연맹이 영토를 관리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이 제도는 당시 국제사회에 횡행하던 식민 제도 극복을 위해 창설된 것이다. ◆미국 자유통상과 칸트 영구평화론에 뿌리 둔 위임 통치 제도 위임 통치 제도는 미국의 자유통상 제도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뿌리를 대고 있다. 식민지의 단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식민지가 식민 모국의 착취로 인해 구매력을 잃기 때문에 식민 모국은 새 식민지를 끊임없이 찾는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식민 모국들이 새로운 식민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벌인다는 점이다. 이런 전쟁의 악순환을 끊고 지구촌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이 보유한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켜 자유통상을 하는 세계 질서를 뿌리내리자고 외친 인물이 윌슨 미국 대통령이었고, 이것이 위임 통치의 근본정신이었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미국의 경험과 칸트의 논리를 통합한 내용이 이승만의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하의 중립』이고, 이 논문의 지도 교수가 미국 대통령이 된 윌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이 정한경과 함께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 통치해 달라고 요청한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분명히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에 두도록 청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이고, 극동에 하나의 완충국을 탄생시켜 동양에서 특정 국가(일본)의 확장을 방지하고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한국을 일본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모든 나라가 자유롭게 통상하는 국제연맹 위임 통치 지역으로 만들면 모든 나라가 자유통상을 하여 이익을 볼 수 있고, 그 결과 일본이 식민지 획득을 위해 팽창하는 것을 막아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위임 통치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신채호·이동휘 문제는 당시 상해에 집결한 한국의 지도자들이 위임 통치가 무슨 뜻인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개신 유학자 출신의 신채호는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 놈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극언을 했다(이강훈,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서문당, 1999, 19~20쪽). 공산주의자 이동휘는 "이승만은 썩은 대가리, 자치운동이나 위임 통치를 원하는 외교가는 원치 않는다"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1920년 12월 8일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은 1921년 1월 1일부터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의 집무를 시작했다. 1월 5일 이승만 대통령과 모든 각원이 참석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국무총리 이동휘는 "민족자결주의가 고창되던 때에 나온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과 정한경의 자치론은 외교상 실패이며, 한민족의 독립 정신을 현혹시킨 행동이다. 이로 인해 사회의 비난이 정부로 밀려들고 있으니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라면서 이승만을 공격했다. 자기 뜻이 수용되지 않자 이동휘는 1월 24일 임정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다. 1921년 2월에는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과 학무총장 김규식이 위임 통치 청원을 비판하며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을 요구했다. 위임 통치 청원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한 사람은 김규식이다.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은 이승만‧정한경의 독단적 행위가 아니라, 안창호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논의를 거쳐 준비된 것이다. 또,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자신도 거의 같은 내용의 청원서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그런데도 김규식은 "'한국인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어찌하여 위임 통치 청원자 이승만을 대통령에 임명했는가'라는 각국 인사들의 반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비웃음을 샀다"며 이승만의 위임 통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김규식의 이중적 태도는 자기 보호를 위한 보신성 자구책이었다(오영섭,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위임 통치 청원 논쟁」, 이주영 외 지음,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46쪽). 1921년 4월 17일 박용만·신채호 등은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소집하고 상해 임정을 부인했다. 4월 24일 북경 군사통일회 소속원 17명은 공동 명의로 상해 임정과 임시 의정원을 불승인하고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시책을 모두 무효화한다는 최후통첩을 상해로 보냈다. 이유는 "임정이 위임 통치 사건을 일으킨 이승만을 수령으로 삼았으니 존재 이유가 없으며, 임시 의정원은 위임 통치 사건의 주모자인 국적(國賊)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그 연루자 안창호를 노동국 총판으로 선임했으니, 이는 위임 통치 청원을 묵인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중국에서 문호개방정책을 통해 유럽 열강을 견제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일본의 영향력을 저지해주기를 기대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이 구상한 위임통치제도는 '통상의 자유'를 원리로 하는 세계적 통상망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라는 점을 꿰뚫어 보았다. ◆일본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단수 전략 이 제도 구축의 최대 장애물은 열강 간에 영토쟁탈전을 야기하고 있는 식민지 문제였다. 이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식민지 해방을 위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이다. 이승만은 한반도를 문호 개방 지역으로 만들어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승만·정한경이 준비한 위임통치안은 한국이 미국의 위임 통치 하에서 중립적 지위를 누리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다. 그동안 미국과의 자유통상을 통해 국부(國富)를 증대시켜 실력을 다진 후 국제정세 변화를 활용하여 완전 독립을 달성한다는 구상이었다. 비판자들은 청원서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독립보장'과 '중립화 구상' 구절을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악질적인 매국노이자 국적(國賊)"이라고 이승만을 매도했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는 유엔, WTO(세계무역기구), FTA(자유무역지대)가 자유통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과 윌슨, 칸트가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제도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2024-04-29 14:02:16

  • [이런일] 대구문인협회 강원도 영월서 문학기행

    [이런일] 대구문인협회 강원도 영월서 문학기행

    대구문인협회 문학기행 추진위원회(위원장 이병욱)는 지난 13일 강원도 영월 김삿갓문학관, 장릉, 청령포에서 회원 160명이 참여한 가운데 문학기행 단합대회를 가졌다.

    2024-04-16 13:43:34

  •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대구 삼덕교회는 오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교회 야외주차장(중구 공평로 4길 11)에서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를 연다. 이날 바자회에선 비빔밥, 떡갈비, 밑반찬, 다슬기국, 떡볶이 등 먹을거리와 중고 가전제품 및 주방용품, 구제 옷, 머플러, 머리핀, 브로치, 맛사지팩, 책, 엽서, 에코백, 친환경 수제 비누, 실크스카프, 가죽공예 핸드메이드 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판매된다. 또 팔찌 만들기 등 체험을 할 수 있고, 어린이를 위한 전통놀이도 마련된다. 이와 함께 참여자들을 위한 축하 공연, 경품 추첨 등도 진행될 예정이다. 바자회 수익금은 중구 지역 독거 어르신들의 집 수리 및 청소, 경로잔치 등에 사용된다.

    2024-04-15 13:12:18

  •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삼덕교회 20일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 개최

    대구 삼덕교회는 오는 2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교회 야외주차장(중구 공평로 4길 11)에서 '지역과 함께 하는 삼덕바자회'를 연다. 이날 바자회에선 비빔밥, 떡갈비, 밑반찬, 다슬기국, 떡볶이 등 먹을거리와 중고 가전제품 및 주방용품, 구제 옷, 머플러, 머리핀, 브로치, 맛사지팩, 책, 엽서, 에코백, 친환경 수제 비누, 실크스카프, 가죽공예 핸드메이드 제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이 판매된다. 또 팔찌 만들기 등 체험을 할 수 있고, 어린이를 위한 전통놀이도 마련된다. 이와 함께 참여자들을 위한 축하 공연, 경품 추첨 등도 진행될 예정이다. 바자회 수익금은 중구 지역 독거 어르신들의 집 수리 및 청소, 경로잔치 등에 사용된다.

    2024-04-14 18:32:31

  •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박스)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박스)

    나는 지난 시절의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8~9일 시내 여러 술집을 누볐다. 현재 지역 문화계 최고령 현역 주당이기도 한 80대 초반의 도광의 시인과 홍종흠 전 매일신문 논설주간을 남산동 '도루묵식당'으로 초대해 대담인터뷰를 벌였다. 도 시인이 잊혀져 가던 대구가 낳은 낭만시인 박훈산을 추억하는 육필 원고를 내밀었다. 이하는 간추린 내용이다. 이봉구가 '명동백작'이라면 박훈산은 큰 발로 큰 키로 걸어 다닌 '지역 대감'이었다. 향촌동 다방마담을 짝사랑하다 자살 소동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바람이 무성할 때는 '가보세', '혹톨', '쉬어가는 집'에 나타나 술을 마셨고, 바람이 시들어갈 무렵에는 행복‧은정‧밀밭식당에 가끔 자리했다. 아주까리 밤 수풀이 휘청이도록 술을 마셨다. 술값 떼어먹는 것이 항다반사인데도 술집 주모들은 바람맞아 구겨진 마음을 잘 다림질해 주었다. 박훈산이 걷지 않는 대구거리는 낭만이 죽고 무미건조한 도시로 바뀌었다.

    2024-04-10 17:24:41

  •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상)

    [문화식객 이춘호의 미각기행] <8>주막과 주점 사이에서(상)

    이제 주막(酒幕)은 없다. 주막은 수많은 주점을 낳았다. 한때 음주가무(飮酒歌舞)의 1호 공간이 된다. 선술집, 니나노집, 막걸리집, 대폿집, 선술집, 목로주점, 실비집, 구이집, 통술집, 다찌집 등으로 굽이쳐갔다. 주막이 '해'라면 주모는 '달'이었다. 모두의 사람이었던 주모. 그 너른 품은 꼭 다산(多産)의 상징이었던 '삼신할매'의 형용이었다. 주막이 술집으로 건너갈 동안 이 나라는 선진국 대열에 가세했다. 하지만 청년세대들에게는 그 시절 문화사랑방의 낭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일상의 소비 속에 머물다 가는 세월인 탓일까. ◆예천 삼강주막 2006년 기념비적 주막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88세의 예천 삼강주막 주모 유옥연 할매가 세상을 등진 것이다. 국내 언론은 그녀를 '이 시대 마지막 주모'라 칭했다. 낙동강과 금천, 그리고 내성천이 합류되는 예천 삼강 언저리, 찌그러진 농짝 같은 단칸 주막에서 평생을 보냈다. 회나무 한 그루와 외딴 주막 하나, 바로 옆에 강둑이 곡장(曲墻)처럼 둘러싼다. 아무튼, 삼강주막의 가치를 알아본 주민과 지자체가 손을 합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한 건 너무나 다행이다. 거기 평상에 앉아 먹었던 배추전은 타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막걸리 안주였다. 한국 최초 피아노가 1900년 화원유원지 사문진나룻터를 통해 들어온 걸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사문진주막촌, 이것도 삼강주막촌과 한 호흡 사이에 있다. 근처 남평문씨 세거지 근처 '작가와 커피' 주인장 임종 씨는 정크아티스트인데 옛날식 프리미엄급 사문진막걸리를 빚어 거기에 공급한다. ◆남도의 주막 육자배기의 고장, 사철가 같은 단가와 궁합이 잘 맞는 남도. 그 자체가 거대한 주막이다. 황톳길과 주막은 찰떡궁합. 영남과 달리 남도에서는 영화 '서편제'의 한 구절처럼 늘 노랫가락이 꽃비처럼 흣날렸다. 삼강 할매의 눈빛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는 남도판 주막촌이 있다. 바로 전남 강진읍 도암면에 있는 복합힐링타운 '사의재'(四宜齋). 아는 사람만 안다. 가톨릭신자였던 다산 정약용은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서학쟁이'였던 그를 살갑게 챙겨준 건 뜻밖에도 주모였다. 1801~1804년 거기 머물면서 강학을 하면서 제자를 길러낸다. 이후 귤동마을 다산초당으로 가면서 사의재 현판으로 보답한다. 사의재를 부활시켜 준 건 문재인 전 대통령. 나중에는 사의재를 지켜줄 주모까지 공모했다.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는 '막걸리골목'이 있다. 그 근처인 경원동 한옥거리 부근에 문화주막 '새벽강'이 있다. 아직 70년대 풍의 청년문화를 머금고 있다. 풍물미학자 김원호‧시인 박남준 등과 함께 풍물패 '갠지갠' 활동을 했던 강은자가 1989년쯤 문화예술인, 민주화운동권, 사회운동가들의 사랑방 삼아 연 집이다. 대구로 보면 반월당 '곡주사', 계산동 '바보주막' 같은 계열이다. 새벽강의 흐름은 부산의 문화주막과 조응한다. 현재 부산의 대표적 주모는 얼마 전 타계한 부산의 대표적 향토사학자였던 주경업의 아내 강정자. 그는 현재 '다락방'이란 선술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 방계 술집은 양산박, 부산, 계림 정도다. 자갈치시장 충무해안시장 공영주차장 맞은편 선창에 따개비처럼 앉아 있는 '순영찻집'도 관광객은 절대 모르는 낭만파들의 성지다. 여사장 순영 씨는 거기 조폭들도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아쌀한 육두문자가 일품이다. 대구에 있는 시인 몇이 만든 '허당회'의 일원으로 2년 전 거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기념 휘호를 전하자 그날 술값을 한푼도 받지 않을 정도로 통이 컸다. ◆용두방천 번지없는 주막 삼강주막에 필적할 정도의 추억의 주막이 2010년 어름까지 용두방천 언저리에 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봉덕래미안아파트가 서 있다. 나도 몇 번 족보연구가 겸 화가인 김성택, 그리고 야당 정당인이었던 조희락과 박유남 등과 거기서 술잔을 들었다. 3대 주모 가게였다. 1대 주모(김수비)는 타계하고 이봉득‧김천호 모녀 주모가 가업을 잇고 있었다. 1946년 문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연 지역의 노포가 몇 있다. 따로국밥의 발생지인 '국일식당', 추어탕의 명가 '상주식당', 설렁탕의 명가 '부산설렁탕' 등이다. 간판도 필요 없었다. 단골의 공간인 탓이다. 이 집 가보(家寶)는 나무 주탁 두 개. 지난 시절의 젓가락 장단 흔적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용두방천은 앞산공원, 수성유원지, 화원유원지, 강정유원지, 동촌과 청천유원지 이전의 시민놀이터였다. 50년대에는 가창면에서 벌채된 장작을 소·말 달구지에 싣고 남문시장 근처로 가서 팔았다. 삼산리 주인수처럼 나무장수의 쉬어가는 집이었다. 낭만파 주당들의 노래삼매경은 경쟁적이었다. '(초략)/목욕탕에 옷을 벗긴 다 같은 인생/무엇이 달라 돈 하나 많고 적은 그것 뿐인데'로 끝나는 '코리안 맘보'도 그때의 산물이다. 이 씨 할매는 인심도 좋아 통행금지에 걸려 집에 못 가는 손님을 위해 방 한 칸을 일부러 비워놓기도 하고 아침엔 속풀이 시래기국도 끓였다. 60∼70년대 아침에는 부근에 있던 쓰레기 하치장으로 가던 환경미화원들의 급식장이기도 했다. 그 집에 대한 각별한 추억을 갖고 있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 대구공고 다니던 시절 그 주막 바로 근처에 살았다. 그는 어머니‧누나와 함께 신천 빨래터로 따라가다가 주막 앞에 사시장철 놓여 있는 평상에 쉬다 가곤 했다. 그 시절이 생각났을까, 이순자 여사와 그 동네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다. 고인이 된 이효상 전 국회의장도 앞산에 등산하러 갈 때 가끔 들러 막걸리 한 잔을 걸치고 갔다. 일부 주당파 효성여대 여학생들도 비 오고 궂은 날 수업을 빼먹고 여기서 술잔을 들었다. 전성기 때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공유한다. 일명 '막사모'(막걸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사랑방으로도 사용됐다. 지금은 불로막걸리지만 60년대는 대봉·봉덕양조장 술을 사다가 팔았다. 참고로 1979년 5월 17일부터 대구의 49개 양조장이 '대구탁주 합동'으로 통합된다. 짐 자전거에 한 말들이 나무 술통 두 개를 싣고 오면 그걸 받아 땅에 묻어 놓은 장독에 부었다. 아이스박스조차 없던 여름철엔 조각낸 얼음을 비닐봉지에 넣어 독 안에 띄웠다. 두석 달 만에 한 번씩 놋 대폿잔을 광내기 위해 기왓장을 가루 내 짚으로 반들반들 닦던 그 모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2024-04-10 17: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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