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대한제국에 고이율의 차관 강요
19세기 말~20세기 초,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군사적 압력을 배경으로 경제적 침략을 단행했다. 1904년 일본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정부로 하여 강제적으로 고이율의 차관(借款)을 도입하게 했다.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 전에 재정·화폐·금융을 장악하여 경제적으로 일본에 예속시키려고 억지로 차관 공세를 한 것이다.
1907년 국채 총액은 1,300만 원(환)이었다. 당시 1,300만 원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물가는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고 관련 단체나 연구자에 따라 보는 정도가 달라 정확하게 환산하기가 어렵다. 다만 대한제국 정부의 1906년 세입 총액이 약 1,318만 원이었으니 국채 총액은 정부의 1년 예산과 비슷한 고액이었다. 고이율의 차관이 강제적으로 계속 들어옴으로써 나라의 빚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907년, 2천만 민족이 국운의 절박함을 느끼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대구를 중심으로 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전개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 정부에 강제적으로 떠넘긴 차관부채 1,300만 원을 갚고자 남성들은 담배를 끊고 절주(節酒)하며, 여성들은 가락지 등 패물을 내어 거행한 거족적 애국운동이다.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절박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개한 경제적 주권회복운동이었다.

1907년 1월 29일, 애국계몽과 교육운동을 전개한 단체이자 민족자강 의식 고취를 주도한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에서 사내 조직인 문회(대구광문사 문회)의 회명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하기 위한 총회가 열렸다.
이때 서상돈(徐相燉)이 한 달 담뱃값으로 20전 정도가 드니까 2천만 국민이 석 달 동안 담배를 끊어 모은 돈 60전씩 내면 국채를 갚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회원들이 서상돈의 제안에 호응하면서 새로 조직된 대동광문회를 중심으로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대구광문사와 대동광문회는 국채보상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국채보상운동 본격 전개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부산 동래에서 먼저 있었다. 그러나 부산지역에서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발표되고 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여 뒤인 3월 10일에 '동래부국채보상일심회'를 설립한 이후부터 국채보상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7년 2월 21일, 김광제와 서상돈, 박혜령 등이 중심이 되어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한 후 북후정(北後亭)에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했다. 북후정은 옛 서문시장 인근에 있던 팔작지붕 모양의 관영 건축물로 현재 대구의 상업특화거리인 인교동 오토바이골목 인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2월의 한파 속에서 개최된 대구군민대회에는 신분과 나이, 빈부를 초월한 남녀노소가 참여했다. 대구군민대회에서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고 언론 게재와 함께 각 지방에 발송하면서 전국적으로 전파되었다. 이날 2월 21일은 국채보상운동 공식 기념일이다.
대구광문사는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를 조직하고 대구 수창사(壽昌社)에 의연금을 담당하기 위한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收合事務所)를 설치하는 등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수창사는 의연금을 모금하는 사무실 역할을 했던 국채보상운동의 거점 공간이었다.

한편, 대구경북지역이 국채보상운동의 진원지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기 위해 '경북국채보상도총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취지를 함께하는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3월말까지 27개의 국채보상소가 각 지역에 설립되면서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는 대구경북 41개의 모든 군을 비롯해서 전국의 318개 군에서 30만여 명이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치하여 국채보상기성회취지서를 발표했다. 국채보상운동을 총괄하는 기구로 대한자강회 사무소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가 설치되었고 의연금 관리를 위해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사는 기사와 논설 등으로 호응하면서 언론 캠페인으로 국채보상운동을 확산했다.


◆남성은 담배 끊고,여성은 패물폐지
국채보상운동은 일반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국민운동이었다. 1907년 2월 24일,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제2차 대구군민대회 이후에는 여성 참여가 확대되었다. 여성들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돈을 의연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부인회를 조직했다. 여성단체는 패물을 헌납하거나 머리카락을 잘라 내놓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특히 1907년 2월 23일, 대구에서 결성한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여성 참여의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이 단체는 정경주와 서채봉, 김달준 등 대구 남일동 진골목 일대에 살던 부인 7명이 모여 결성한 단체다. 패물폐지(佩物廢止)란 반지나 비녀 같은 패물을 몸에 지니지 말자(폐지)는 의미다. 국채를 갚고자 은가락지와 은장도 등의 패물을 내놓으면서 시작한 이 단체의 활동은 근대 여성운동의 효시가 된다.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1907년 3월 8일, '삼가 우리 부인 동포에게 알리노라'라는 의미인 '경고아부인동포라'라는 제목의 취지서를 발표했다. 순 한글로 된 이 취지서에는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라며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주체적 참여의지가 담겨 있다.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에 이어 '남산국채보상부인회'와 '국채보상탈환회' 등의 여성단체가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1907년 2월 26일, 고종황제는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을 지지하고자 스스로 단연을 실천하고 국채보상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칙어(勅語)를 발표했다. 이는 많은 관료와 지도자급 인사들의 단연과 의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채보상운동에는 애국 선각자들과 외국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고, 그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도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를 통해서 동참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안창호,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헤이그 특사 이준 등 많은 의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솔선수범하였다. 아울러 프랑스 선교사 '명약일(明若日)'과 영국인 신부 '부재열(夫在烈)' 등 외국인이 많이 참여하였으며 심지어 평안북도 이화학교의 일본인 교사 '세이리우(正柳好彬)'도 의연에 동참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은 미국 LA와 하와이 등 국외의 한인사회에까지 파급되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800여 명의 유학생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류하는 교포들도 국채보상운동을 함께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민족적 단결에 불안을 느낀 일본제국주의의 방해로 쇠락하고 말았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금연과 패물을 내어놓아 주권을 회복하려던 민족경제 부활의 큰 물줄기였다.
모든 계층의 국민들이 힘을 합쳐 함께했다는 것과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위로 전개되었다는 소중한 가치를 내포한다. 구국 정신을 대표하는 표상으로서 최초의 국민운동, 금연운동, 기부운동, 여성운동, 언론캠페인이었다는 큰 의의를 가진다.

국채보상운동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으로 재현되었다. 또한 중국 국채상환운동(1909), 멕시코 모금운동(1938), 베트남 황금주운동(1945), 터키 금모으기운동(2012), 말레이시아 부채상환운동(2018) 등 외국의 유사한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치는 등 국채보상운동은 과거와 현재까지 살아 숨 쉬며 재조명되는 역사적 문화유산이다.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과 국채보상운동기념관,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 국채보상운동기념도서관,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로 등 국채보상운동 관련 얼이 서려 있는 기념공간이 곳곳에 조성되어 있다. 대구지역이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적 경험과 독창적 자산을 보존․활용하고 역사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다.
국채보상운동의 공식 기념일은 2월 21일이다. 국채보상운동 제안을 대구시민과 함께 본격적으로 실천한 날로서 대구시에서는 국채보상운동 정신을 대구 시민정신의 원천으로 삼고자 이날을 '대구시민의 날'로 지정하였다.
또한 2017년 10월 31일,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제적으로도 희귀한 유례로 세계가 함께 기려야 할 유산으로 평가받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인이 함께 기억하고 공유해야 할 가치인 국채보상운동의 불꽃을 피운 대구는 구국정신의 산실이다.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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