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소설을 무대화할 경우, 대체적으로 서사 구조의 뼈대만 남기고 플롯의 골격을 재구성하는 해체 방식의 무대화가 아닌 다음에야 원작의 결을 연극적으로 살리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임도완의 <이방인>이 원작 소설을 감각적 무대로 전환하며 인간 존재의 고립을 탐색하는 작업이라면, 극단 문지방의 <시추>는 인간 내면으로부터 분열되어 파괴되는 공동체 붕괴의 심층을 파헤치는 연극이다. 두 작품 모두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배치하면서도,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미장센과 감정의 층위를 분절하는 방식으로 감각적인 무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방인>이 프레임 안의 고립이라면 <시추>는 생존 욕망으로 분열된 극한의 고립이다. 다른 장르와 형식이지만, 인간의 내밀한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은 닮아 있다.

◆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임도완스러움의 <이방인>
임도완 연출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극중 인물들의 그로테스크한 스타일, 언어, 배우들의 신체와 움직임, 극적인 퍼포먼스, 오브제와 소품을 통해 연극으로 무대에서 전환될 수 있는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임도완스러움의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소송>, <보이첵>, <십이야>, <한여름 밤의 꿈>, <휴먼코미디> 등이 대표작품들이다. 제46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품인 <이방인>(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도 알베르 카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영화적 기법과 배우들의 신체(움직임), 탁자(테이블)와 오브제를 활용해 공간의 관계성을 무대에서 확장시키며 사다리움직임연구소 스타일로 시각화한 것이 특징이다. 1999년도부터 롱런하고 있는 <휴먼코미디>의 강점(재료)을 작품마다 살려내니 임도완 형식의 정점이 되는 구조가 된다. 90년대 유홍영 배우와 콤비를 이루며 다져진 마임리스트의 감각,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치, 가면 마임을 활용한 디테일, 교육극단 사다리를 창단한 시절부터 아동극과 인형극을 섭렵한 놀이성과 코미디적 요소들, 지성적인 스타일이 <이방인>에서는 총체적인 연출의 재료가 되고 있다.

◆ '몸, 오브제, 영화스크린의 다층적 미학'
공연에서는 영화적 프레임 형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주인공 뫼르소의 심리, 재판 과정에서의 극중 인물들의 내면성과 인간실존의 양가성, 사회로부터 타자화되는 억압과 불안감, 국가와 법의 부조리성과 사회 규범의 모순성이 충돌된다. 어머니의 죽음과 살인에도 감정이 무감각한 뫼르소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형까지 임도완 연출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초기의 사회적 불안을 담아낸 필름 누아르(Film Noir) 스타일로 무대 후면을 스크린화해 인물들의 심리와 내면, 국가 권력(재판)의 폭력성을 영상으로 이미지화한다. 연극 <이방인>은 연극 구조 안에 영화적 프레임을 연결해 마치 필름 누아르 유성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능동적인 형식을 보인다.
인물을 프레임 속에 가두는 듯한 공간 연출은 뫼르소와 인간의 고립감,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억압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이 작품의 연출적 장치이다. 인물표정과 감정을 카메라 앵글로 시각화할 수 없는 연극표현의 한계를 대체한 내면의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조리한 세계를 감각적으로 영상으로 분할하는 느낌이다. 특히 뫼르소의 범행 장면을 재현하는 극중 장면에서, 나무로 된 프레임을 활용해 영화 <이방인>의 촬영장 분위기로 확장되고, 영화 필름의 연속성을 시각화한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와 임도완 연출스러운 배치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연출은 무대 자체를 하나의 '감각의 편집 공간'으로 전환한다. 소설 속 1인칭 시점의 뫼르소의 진술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나레이션으로 활용된다. 의자와 탁자는 좁히고 분할되어 거리, 재판정, 교도소 등으로 변주되기도 하며,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탁자들이 모여 단두대가 된다. 그 길을 따라가는 뫼르소와 디졸브되는 것은 <이방인>의 엔딩 스크롤(ending credits)이다. 프레임 안에 이미지화되는 웹툰의 영상은 커다란 돌을 움직이며 한 인간이 살아가는 짓누른 고립과 무게감, 진실이 몰락한 부조리한 현실에서는 죽음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뫼르소의 운명이나 지금 우리가 보고, 걷고 있는 한국 사회의 길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
1940년대 소설이지만 뫼르소의 삶과 운명은 요즘 사법 재판이 정치 재판으로 둔갑되어 진실이 대한민국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시점에, 임도완의 <이방인>은 프랑스(알제리)의 이야기가 아닌 대한민국의 현실로 읽혀진다. 이 작품은 고전 명작을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스타일로 무대화한 것이 장점이고, 특히 고교생이나 연극(배우) 전공자들이 볼 만한 명작 소설 무대화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다리움직임연구소 단원이었던 고창석 배우가 검사 역과 앙상블로 출연해 오랜만에 무대에 섰음에도 연극적 감각이 살아 있고, 김미령, 정은영, 뫼르소 역의 지승찬 등 배우들의 피지컬적인 앙상블도 좋다.

◆ 〈오셀로〉를 오마주하는 극단 문지방의 〈시추〉
초연결 네트워크 사회는 '감정의 과잉 시대'이다. 가짜뉴스와 거짓은 진실로 포장되어 현혹되는 시대에 선악은 취사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6·3 대선을 앞두고도 극단적인 정치 이념으로 분열되고 있는 아수라장에서 진실은 한국 사회 해수면으로 실종되고 위선과 선동의 현혹만이 판을 치는 사회다. 연극 〈시추〉(극단 문지방) 작품에 기대감을 가지게 된 것은, 대사로 채워진 공동창작 희곡의 재료들을 연출적으로 무대와 장면으로 응축하는 구도감 때문이다.
연극 〈시추〉(Drilling)는 인간의 질투와 배신, 거짓으로 파멸되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의 오셀로, 이아고, 데스데모나, 카시오 등 극중 인물들과 유사한 심리적 관계가 닮아 있다. 남극이라는 극한의 공간을 배경으로, 고립된 인간의 내면을 해부하는 서사극 형식의 연극이다. 빈 무대 위로 로프 형태로 매달린 당산나무 설정이 인상적이다. 당산나무는 마을 공동체를 수호하는 한국 문화의 상징적 오브제다. 〈시추〉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오마주하며 인간의 질투, 배신, 열등감과 결핍, 거짓이라는 내면의 심리를 탐사한다. 열등한 결핍의 조작과 거짓으로 공동체는 파괴되고, 남극 월동 대원들도 생존 욕망으로 분열되어 '당산나무'는 불완전한 인간, 공동체의 붕괴를 상징한다.
배경은 남극의 한 시추기지(극지 연구기지)이다. 수십만 년에서 수백만 년 전까지의 지구 기후 정보를 얻기 위한 남극 빙하 시추 작업은 빙하 1,000m 이내만 파고들어가도 수년이 걸리는 극한의 작업이다. 시간성이 무감각해지는 극야 현상 때는 남극이 암흑기로 변하고, 정서적으로 견디기 힘든 시기이다. 극단 문지방은 남극에 가까운 고립된 공간을 무대의 주요 배경으로 삼는다. 공동체로부터 단절되고 감정이 동결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탐사 대원들의 심리적인 변화는 의료담당관 김지혜(조휘경 분)로부터 관찰 대상이 되면서 극지연구소는 진실과 거짓으로 파멸되는 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의 내면을 투영시키는 밀페된 괸찰 실험실처럼 작동된다. 〈오셀로〉의 중심 인물은 오셀로였다면, 연극 〈시추〉에서는 이아고를 연상하게 하는 극중 인물은 해양과학 연구원 이규혁(박준우 분)이다.

◆ 고립된 인간의 결핍과 열등의 욕망으로 붕괴되는 공동체
남극 탐사 대원(월동 대원 연구팀과 기술팀) 7명으로 진행되는 연극의 서사 구조는 단순하다. 오셀로의 데스데모나를 향한 인간의 욕망처럼, 〈시추〉도 여성 연구원 강선호(김양희 분)와 이혼남 백운천(표경빈 분) 사이를 두고 삼각관계를 이루는 내밀한 심리적 욕망과 막장의 관계들이 이규혁을 통해 추악한 거짓으로 조작된다. 진실이 시추의 빙하면에 도달할 즈음, 마지막 장면에서는 백운천이 애인관계인 강선호를 시추기에 넣는 살해욕망에 시달리게 된다. 연극 〈시추〉에서 응시하는 것은 극한의 밀폐된 환경에서 사랑의 욕망을 소유할 수 없는 한 인간이 열등과 결핍으로 인해 정신이 분열되고 거짓으로 인해 공동체가 무너지는 과정이다.
연극<시추>의 중심서사는 우울증의 대표적인 계절성 정서장애(SAD, Seasonal Affective Disorder) 증상을 의료연구관 김지혜(조휘경 준)가 심리 상담으로 대원들을 관찰하는 시간과, 그 과거와 현재의 시간의 연속성에서 밝혀지는 극중 인물들의 내면의 심리 상태, 사건과 상황의 변화들을 관찰하는것이다. 시간의 사이는 강선호와 백운천을 사이에 두고 이규혁의 거짓과 조작에 의해 '원팀'을 외치는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극중인물들의 내밀한 위선의 심리변화를 응시하게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각기 감정의 균열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를 상담(정신과 진료), 고백, 독백 등을 통해 드러내는데, 작품은 결핍과 열등으로 분열되어 가는 인간의 어두운 본성, 공동체의 붕괴, 감정의 해체를 '시추'라는 은유로 응축해 보여주며, 인간 내면의 심층적 구조를 연결하는 미장센으로 서사구조를 이룬다. 무대에 변변한 재료들도 없는데도, 조명의 빛과 톤의 대비감, 시추 작업 소음, 배우들의 동선의 대비감으로 승부수를 띄우며, 고립된 남극 기지에서 인간의 심리적 내면을 파고드는 무대구도가 좋고, 배우들은 거칠면서도 남극 월동 대원들이 다 되어 있는 익숙함을 보인다. 연출은 과거와 현재의 장면을 극중장면의 동일프레임으로 연속화 한다던가, 공간과 시간의 분리를 장면으로 분할하지 않으며 동일구조안에서 심리적 대비감을 주는 방식들이다.

무대는 간결하다. 위치와 각도가 다른 조명은 인간 내면의 심층을 시추하듯 분절되어 있고, 이동식 의자, 립스틱, 휴지통 등의 간단한 소품은 인물의 불안정한 위치를 상징한다. 연극은 감정보다 극중 인물의 상태를, 사건과 진술의 특정한 시간 구간에서, 인물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해석하며 '관찰자-화자'의 역할로 수행하는 서사극적으로 구조화해 재생하고, 스톱모션으로 반복해 월동 대원들의 고립감과 분열을 장면으로 감각시키는 연출의 방식이다.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Lee DeWyze의 'Blackbird Song'은 빙하의 지표면을 알 수 없는 시추 작업과 극야의 남극 탐사 속에서 오는 우울과 고립, 무기력한 인간의 절망감을 메타포적 장치로 활용한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남극의 자연, 죽음, 고립과 결핍, 우울과 침묵, 삶의 쓸쓸함을 노래하며, 공동체의 붕괴와 개인의 고립, 그리고 여전히 시추의 작동 소리가 들리는 감정의 잔해 위에 남은 생존의 침묵을 상징한다.
극단 문지방의 〈시추〉는 한국 사회 정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배우들의 등퇴장을 무대 후면으로 열어두는 개방적이면서도 단조로운 구성은 단출해 보였지만, 조명과 음향,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연출력으로 극을 110분 동안 끌고 간다. 서사를 응시하게 하는 속도감이 좋고, 장면들 사이에서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는 연출미장센도 감각적이다. 배우들 또한 연극이라는 장르의 본질로 승부를 보려는 당돌함이 엿보인다. 유행에 기대지 않고, 소재로 감정을 끌어내려는 얄팍한 장치도 없이, 거칠지만 단단한 밀도로 무대를 밀고 나간다. 연출 박한별과 문지방 단원들 (표경빈, 김양희, 이제우, 박준우, 정성준, 양정욱, 조휘경)은 '가능성 있는 연극'을 보여주었다. 극단 문지방의 〈하붑〉은 6월 12일부터 22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된다.
김건표 대경대학교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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