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써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루이스 캐럴. 사실 그의 진짜 이름은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 수학과 교수였다. 루이스 캐럴이란 필명으로 이 소설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는 사진에도 재능이 있었는데 24년간 앨리스를 닮은 듯한 소녀들의 초상 사진 2천여장을 남겼다.
미국 다큐멘터리 사진가 유진 리처드. 그는 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했지만 사진인류학자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그의 사회·인류학적 지식을 만나 사진이 엄청난 흡인력을 갖게 된 덕분이다.
이처럼 사진은 촬영자의 독특한 지식이나 경험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력해지기도 한다. 지난 1일부터 다음달 31일까지 대구 북구 복현어울림센터 서관 3층에서 사진전 '복현문화'를 열고 있는 박정일 사진가의 작품이 그렇다.
그는 대학에서 응집물질물리 이론을 강의하고 있는 물리학 박사다.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 중이던 1994년부터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경북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던 2000년대 초반 무렵 취미 삼아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한 건 2010년이었다. 뜻 맞는 이들과 함께 흑백으로 대구를 기록한 게 시작이었다.
2020년쯤부터 그는 부산 사하구 홍티마을을 시작으로 경주 희망농원, 대전 소재동 철도관사마을, 의성 성광성냥 공장 등 사라져가는 곳의 흔적을 사진에 담고 있다. 그사이 10여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부산국제사진제(BIPF) 운영위원도 맡고 있다.
2일 복현어울림센터에서 만난 박정일 사진가는 "사진가의 삶은 늘 가슴을 뛰게 만든다"며 "물리학을 공부할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열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복현문화'는 어떤 전시인가.
▶대구 북구 복현1동엔 '도심 속 섬' 같은 마을이 있다. 경진초등학교 남쪽, 경북대 담벼락을 따라 들어선 이 마을은 좁은 골목길 사이로 낡고 오래된 무허가 단독주택이 즐비했던 곳이다. 상당수 주민들이 공동화장실을 사용했을 정도로 생활환경이 열악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피난민촌이란 이름을 얻었다. 많을 때는 30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하는데, 북구청이 2019년부터 도시재생사업에 나서면서 지금은 상당수 주민이 이주하고 그 자리에 신축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대다수 대구시민은 이곳에 피난민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40년 가까이 경북대를 오간 저도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사라져가는 이 공간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이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빛바랜 골목의 담장, 금방이라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모여 담소를 나눌 것 같은 골목의 벤치, 집 앞 고무통에서 자라는 붉은 고추와 상추, 대문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 이번 전시는 복현1동 피난민촌을 기록한 결과물이다.

-지금 경북 의성문화원에서도 사진전을 열고 있다.
▶우리나라 마지막 성냥공장으로, 지난 2020년 폐업한 의성 성광성냥공업사를 기록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성광성냥공업사는 한국전쟁 직후 1954년 실향민들에 의해 세워진 공장이다. 성광(城光)이란 이름은 의성을 빛낸다는 의미로 지어졌다. 전성기인 1970년대에는 경상도 전역과 강원도의 동해안 일대까지 퍼졌고, 한때는 200명에 가까운 직원들이 하루 1만5천 갑을 생산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등장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매출부진에 몸부림치다 2013년 가동을 중단하고 2020년 11월 최종 폐업했다.
사용하던 기계와 집기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공장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의 일이었다. 당시 의성군은 이 공장을 정비해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미룰 수 없었다. 의성군의 협조를 받아 대구와 의성을 20여 차례 오가며 촬영했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기록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20년 부산 홍티마을 작업을 시작한 게 출발점이었다. 홍티마을은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에 위치한 포구 마을이다. 무지개 언덕과 함께 낙동강이 유입되는 하구와 연결돼 무지개 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마을 서쪽 해안에 무지개 공단이 조성됐고 해안은 좁은 수로의 형태로만 남았다.
공단 조성으로 산기슭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포구의 기능도 거의 상실됐다. 하구둑 건설 이후 약해진 조류 탓으로 어자원은 크게 줄어들었고, 주민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떠났다. 이런 현실에 마음이 끌려 사진으로 담게 됐다.
이후 경주 천북면에 있는 한센인 집단마을 '희망농원' 작업으로 이어졌다. 희망농원은 1959년 정부가 경주·칠곡의 한센인 260여 명의 자활을 위해 경주 보문관광단지 일대에 조성한 양계장 마을이다. 1978년 보문단지 개발로 지금의 자리로 강제 이주됐다. 현재 한센인을 포함해 100여 명이 이곳에 산다.
이들은 정부에 의해 두 차례나 삶터를 옮겨야 했지만, 정작 정부는 이들의 불편한 삶에 대해선 외면했다. 40여 년이 지나며 정부가 지어준 집단계사 450동은 낡고 열악해졌고, 재래식 정화조와 하수관로도 노후돼 심한 악취가 발생했다. 게다가 마을 생활하수는 이웃 포항시민 식수원인 형산강으로 흘러들어 또 다른 민원을 낳고 있었다. 희망농원 주민을 만나 열악한 환경에 시달렸던 한(恨)을 듣고, 마을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사진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나.
▶물이 찬 병에 잉크를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어느새 퍼진다.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도 시간이 갈수록 자세가 흐트러진다. 자연이나 시스템은 그대로 두면 무질서가 증가한다. 이러한 현상은 물리학에선 '엔트로피 증가'로 설명된다.
돌이켜보면 사라져가는 마을 등에 이끌린 것도 이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지난 6년 동안 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과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기록해왔다. 특히 폐허가 된 장소, 기능이 정지된 사물, 그 속에 파묻힌 관계 등에 집중했다.
제 사진이 '삶의 흔적', '사라져가는 곳에 대한 기록'이란 점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생성과 소멸이 하나의 연결된 선상에서 순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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