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도훈 기자의 한 페이지]1998년 대구 여대생 사망사건'···27년째 진실 좇는 아버지 정현조 씨

최근 책 '아빠의 전쟁' 펴내…"딸의 죽음 끝까지 밝히겠다"

정현조 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정현조 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27년 전 정현조(77) 씨는 딸을 잃었다. 당시 대구 계명대 1학년이었던 딸 은희 씨는 1998년 10월 16일 학교 축제를 마치고 귀가하던 길에 사라져 다음날 오전 5시 10분 대구 구마고속도로(지금의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23t 덤프트럭에 치여 숨진 채 발견됐다. 사고 전 성폭행 피해를 입은 정황이 발견됐는데도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정 씨는 그날로 생업을 접었다. 10년 넘게 전국을 다니며 진술을 듣고 증거를 모아 재수사를 요구했고, 수많은 탄원서와 고소장을 썼다. 그 결과 2013년 재수사에서 스리랑카인이 검거돼 재판에 넘겨졌지만 1심과 2심에서 증거불충분 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그러나 정씨는 처음부터 "진범은 따로 있다"고 주장하며 지금껏 외로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

정 씨는 최근 '아빠의 전쟁'이라는 책을 냈다. 20여 년 동안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을 이 책에 담았다. 새 정부가 재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난 4일 대구 수성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 업무를 하는 정 씨를 만났다.

정현조 씨가 최근 펴낸
정현조 씨가 최근 펴낸 '아빠의 전쟁' 표지 이미지. 정현조 씨 제공

-27년이란 긴 세월동안 직접 진상 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수사기관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랬나.

▶사고 당일 경찰의 연락을 받고 병원을 찾았을 때 영안실 직원은 "시신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확인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유족을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오후 가족들, 딸의 친구들과 함께 사고 현장을 둘러보다 딸의 속옷을 발견했다.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직감했다. 영안실로 달려가 딸의 주검을 살펴봤다. 영안실 직원에게 속옷이 있냐고 물었더니 청바지 주머니 안쪽 천을 꺼내 보이며 "이게 속옷"이라며 속이려 했다. 제가 "그게 왜 속옷이냐"며 소리치자 직원은 그제야 말을 바꿔 "부검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현장에서 찾은 속옷을 담당 경찰관에게 건넸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이건 동네 아줌마들이나 입는 팬티"라거나 "동네 아줌마들이 근처에서 성행위하고 버린 것 같다"며 딸의 것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같은 속옷을 선물 받았던 쌍둥이 동생이 맞다는데도 말이다.

결국 이 속옷은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야 '증거'로 인정받았다. 언론에 초동수사의 문제가 처음 보도된 1999년 3월에야 경찰이 속옷을 국과수로 보낸 탓이다. 처음엔 정액이 검출됐지만 시료 오염으로 혈액형이 감정되지 않아 피해자의 속옷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이듬해 6월 경찰이 다시 국과수에 유전자(DNA) 분석을 의뢰하면서 딸의 것이 맞다는 감정을 받았다.

-이것 말고도 의심스러운 사례가 더 있었나.

▶사고 현장이 계명대에서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7㎞ 떨어져 있는 고속도로인 것부터가 석연치 않았다. 또, 사고를 낸 차량 운전자는 시속 100㎞로 달리다 중앙분리대 쪽에서 사람이 나타나 어쩔 수 없이 사고를 냈다고 진술했는데, 급정거 시 남게 되는 바퀴 자국(스키드마크)이 없었다. 게다가 딸의 시신에 장기 파열이 없었다는 점, 복부에 날카롭게 절단된 상처가 있었음에도 현장에서 확인된 혈흔은 극소량인 점 등도 미심쩍었다.

이런 점을 근거로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수없이 주장했지만, 경찰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그럼 교통사고가 아닌 것을 증명해보라"는 것이었다. 결국 사건은 2개월여 만에 단순 교통사고로 종결됐다.

정현조 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정현조 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그래서 직접 진실을 밝히려 한 건가.

▶그렇다. 처음에는 '알아서 안 해 주겠나' 했었는데 안 해주더라. 경찰이 수사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말을 해도 오지를 않고. 그러니 결국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됐다. 그때부터 채소장사 일을 접고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증거를 모았다. 복지관에서는 컴퓨터를 배웠고 지인의 소개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 탄원서와 고소장 작성법을 배웠다.

담당 경찰관을 직무유기로 고소했고, 수사기관과 법원, 청와대 등에 재수사를 요청하는 탄원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보냈다. 트럭 운전자를 의심해 강간살인 혐의로, 때로는 성명불상의 진범을 고소하며 재수사를 촉구했다. 하지만 모두 각하되거나 무혐의로 끝났다.

-2013년 탄원서에 청와대가 주목한데다 대구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하면서 검찰이 재수사를 벌여, 은희 씨의 속옷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성범죄 전과가 있는 스리랑카인 외국인 노동자 A씨가 재판에 넘겨졌다. 결국 공소시효 만료와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범인은 나온 게 아닌가.

▶당시 검찰이 지목한 A씨는 범인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다. 검찰은 당시 여론에 떠밀려 수사를 벌여 짜맞추기식 기소를 했다고 본다. A씨의 DNA와 은희의 속옷에서 검출된 DNA가 일치한다는 발표도 고소를 한 지 단 5일 만에 나왔다.

앞서 경찰이 국과수에 넘긴 딸의 속옷 사진은 불로 태운 것처럼 검었다. 사건 직후 우리가 현장에서 수거한 것과 다르게 훼손됐단 의미다. 거들도 원래 것과 모양이 달랐다. 거기서 유전자가 어떻게 검출이 됐다는 건지 믿을 수 있겠나. 유전자 조사 과정을 다시 검증하고 확인시켜 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 사건이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건 초동수사가 부실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건 직후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밀어붙이면서 부검을 하면서도 은희의 체액에서 DNA 채취를 하지 않아서 진상 규명이 더 어려워졌다.

정현조 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정현조 씨가 지난 20여 년 동안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해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도훈 기자

-2021년 법원은 경찰의 초동수사가 부실했다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그렇다. 2017년 6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데 따른 것으로, 재판부는 7천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성급히 판단해 현장조사와 증거 수집을 하지 않고 증거물 감정을 지연해 극히 부실하게 초동수사를 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경찰이 신속하게 현장에서 유품과 증거물을 수거해 피해자의 몸과 속옷에서 정액이나 지문을 확인했더라면 이 사건을 성범죄 등 강력사건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피해자 주변인과 행적 등에 대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여 신속하게 범인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유족의 지속적인 진정에도 불구하고 사고 경위와 성범죄 관련 여부가 적시에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 긴 시간 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원한과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줄기차게 부실수사를 지적했지만 "네가 뭘 아느냐"는 식이었다. 과거 수사기관의 잘못이 인정되니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지만, 경찰이든 검찰이든 누구 하나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건에 매달리는 이유는 뭔가.

▶재수사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책을 내면서 정부와 수사기관, 언론 등 200여 곳에 책과 탄원서를 보낸 것도 같은 이유다.

경찰은 딸이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는 "부검감정서를 볼 줄은 아느냐", "우리가 교통사고라 하면 교통사고인 줄 알아라" 등 윽박지르며 유족을 무시했고, 사건 관련 자료를 갖다 줘도 눈여겨보지 않고 수사하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존재하는 이유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라면, 피해자의 편에 서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맞지 않나. 이런 억울함을 세상에 알려서라도 재수사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딸과 같은 억울한 피해자가 더 이상 나와선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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