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장군상 앞은 여느 집회와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채워졌다. 확성기와 구호 대신 전통 안동한지로 만든 길이 100m가 넘는 상소문이 펼쳐졌고 한복을 차려입은 영남 유림과 시민들은 말없이 자리를 지켰다. 집회나 시위가 아닌 조선 시대 공론의 형식인 '상소'였다.
이날 열린 행사는 '제8차 영남만인소 봉소(奉疏) 행사'.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과 시민들은 독립운동가 20인에 대한 서훈 재평가와 등급 상향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상소문에는 전국에서 모인 대한민국 국민 1만1천여명의 서명이 담겼다. 이름들은 위아래 구분 없이 한 줄로 적혔다. 모든 뜻이 같은 무게로 모였다는 상징이다.
이번 봉소는 이날 오전 7시 30분 안동시청 앞에서 시작됐다. 영남만인소 집행위원회(이하 집행위)와 안동청년유도회, 안동 유림들은 안동에서 먼저 봉소 의례를 올린 뒤 '만인의 뜻'을 받들고 서울로 이동했다.
집행위는 "안동은 영남만인소의 출발점이자 정신적 뿌리"라며 "지역에서 출발해 국가를 향하는 공론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절차"라고 설명했다.
만인소는 '만인의 뜻이 곧 천하의 뜻'이라는 원칙 아래 조선 시대 유교 사회의 공론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집단 상소다. 1792년 사도세자 신원 청원을 시작으로 일곱 차례 이어졌으나 1884년 이후 중단됐다. 이 전통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제8차 영남만인소는 이를 오늘의 시민 참여 방식으로 되살린 사례다.
이번 만인소의 핵심 요구는 독립운동가 20인에 대한 서훈 전면 재평가다.
집행위는 현행 서훈 체계가 1962년 군사정부 시기 사료 부족과 정치적 환경 속에서 정리된 이후 충분한 연구 성과가 축적된 지금까지도 구조적인 재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만주 무장투쟁의 핵심 지도자 일송 김동삼 선생 등의 서훈 등급이 대표적인 형평성 문제로 거론된다.
이날 봉소의 소두를 맡은 류목기 풍산홀딩스 고문은 "이번 만인소에는 1만1천명이 넘는 시민의 이름이 담겼고 그 이름들은 모두 한 줄로 적혔다"며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행사에서는 독립운동가 유족들을 향한 상읍례와 상소문 낭독, 봉함 절차가 차분하게 진행됐다. 상소문 행렬은 광화문과 경복궁 담장을 따라 청와대 인근까지 이어졌다. 시민과 관광객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 조용한 행진을 지켜봤다.
조재성 안동청년유도회장은 "집회가 아니라 상소이기에 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다"며 "조용히 걷는 이 길 자체가 영남 유림과 시민들의 뜻이고 침묵 또한 하나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황만기 집행위원장은 "이번 만인소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현재의 불합리를 묻고 미래의 기준을 세우는 공론 행동"이라며 "독립운동가 서훈 문제는 특정 가문이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상소문 전달을 마친 뒤 참가자들은 박수나 구호 없이 묵묵히 자리를 정리했다. 한지 위에 남은 것은 이름과 서명뿐이었지만, 광복 81년을 사는 시민들의 질문은 도심을 가로지른 길 위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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