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서울 도심 한복판은 이례적인 고요 속에 잠겼다. 확성기와 구호로 가득한 여느 집회와 달리 광화문 이순신장군상 앞에는 전통 안동한지로 만든 길이 100m가 넘는 상소문과 한복을 차려입은 영남 유림, 시민들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집회도 시위도 아닌 조선 시대 공론의 형식인 '상소'가 142년 만에 다시 도심을 걸었다.
이날 열린 행사는 '제8차 영남만인소 봉소(奉疏) 행사'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림과 시민들은 독립운동가 20인에 대한 서훈 재평가와 등급 상향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상소문에는 전국에서 모인 대한민국 국민 1만1천여 명의 서명이 담겼다. 이름들은 위아래 구분 없이 한 줄로 이어졌다. 누구의 뜻이 더 크거나 앞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뜻이 같은 무게로 모였다는 상징이다.
◆안동에서 시작된 봉소… "뜻을 모아 서울로"
이날 봉소는 서울에서 갑자기 시작된 행사가 아니었다. 같은 날 오전 7시 30분 안동시청 앞에서는 제8차 영남만인소의 첫 봉소 행사가 엄숙하게 진행됐다. 영남만인소 집행위원회(이하 집행위)와안동청년유도회, 지역 유림들은 이른 아침 안동에서 상소문을 받들고 봉소 의례를 올린 뒤, '만인의 뜻'을 안고 서울로 이동했다.
안동에서의 봉소는 이번 만인소가 지역의 요구가 아닌 지역에서 출발해 국가를 향하는 공론임을 분명히 하는 상징적 절차였다.
집행위는 "안동은 영남만인소의 출발점이자 정신적 뿌리"라며 "상소는 반드시 이곳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142년 만에 다시 움직인 '공론의 전통'
만인소는 '만인의 뜻이 곧 천하의 뜻'이라는 원칙 아래 조선 시대 유교 사회의 공론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집단 상소다. 1792년 사도세자 신원 청원을 시작으로 조선 후기까지 일곱 차례 이어졌으나 1884년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전통은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며 국제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제8차 영남만인소는 이 공론의 전통을 오늘의 시민 참여 방식으로 되살린 사례다. 지난해 11월 안동에서 발의된 이후 약 100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서명을 모아 1만 명이 넘는 시민의 뜻을 모았다. 기념이 아니라 질문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번 만인소는 과거 재현이 아닌 현재형 공론으로 평가된다.
이번 만인소의 핵심 요구는 독립운동가 20인에 대한 서훈 전면 재평가다. 집행위는 현행 서훈 체계가 1962년 군사정부 시기 사료 부족과 정치적 환경 속에서 급히 정리된 뒤 축적된 연구 성과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재검토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과 만주 무장투쟁의 핵심 지도자 일송 김동삼 선생 등의 서훈 등급은 대표적인 형평성 문제로 거론된다.
◆"이름은 한 줄, 뜻은 하나"
이날 봉소의 소두(疏頭·상소의 취지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를 맡은 류목기 풍산홀딩스 고문은 인사말에서 "독립된 자유로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이 자리에 서니, 독립운동에 앞장선 선열들께 감사한 마음이 더욱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만인소에는 1만1천 명이 넘는 시민의 이름이 담겼고, 그 이름들은 모두 한 줄로 적혔다"며 "이는 누구의 뜻이 더 크고, 누구의 목소리가 더 앞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뜻이 같은 무게로 모였다는 증표"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과거처럼 역사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앞에 당당히 서는 선택을 했다"며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잡는 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행사에서는 전통 예법인 상읍례도 진행됐다. 독립운동가 유족들에게 예를 올리는 이 절차에는 김상옥·이상룡·이육사·김동삼 선생의 후손들이 함께했다. 성우의 상소문 전문 낭독이 이어진 뒤 상소문은 봉함돼 봉소 행렬의 선두에 놓였다.
◆100미터 상소문,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대표단이 들고 나온 상소문은 길이 100m가 넘는 전통 안동한지로 제작됐다.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재평가해 달라는 요청과 시민 서명이 촘촘히 적힌 상소문이 광화문과 경복궁 담장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시민들과 관광객들은 걸음을 멈추고 이 장면을 지켜봤다. 과거 99m 상소를 들고 한양으로 향했던 유생들의 결기가 오늘의 시민 언어로 재현되는 순간이었다.
조재성 안동청년유도회장은 현장에서 "집회가 아니라 상소이기 때문에 소리를 높일 이유가 없다"며 "조용히 걷는 이 길 자체가 영남 유림과 시민들의 뜻이고 침묵 또한 하나의 메시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봉소는 박수나 구호 없이 끝까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국가가 답해야 할 역사적 과제
황만기 집행위원장은 "이번 만인소는 과거를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현재의 불합리를 묻고 미래의 기준을 세우는 공론 행동"이라며 "독립운동가 서훈 문제는 특정 가문이나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 성과와 사료가 충분히 축적된 지금까지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이상의 미루기는 역사에 대한 책임 회피"라며 "100미터 상소문에 담긴 만인의 뜻이 제대로 된 답을 얻을 때까지 공론화와 기록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상소문은 청와대 인근에서 전달 절차를 마친 뒤 봉소를 마무리했다. 참가자들은 박수 대신 묵묵히 자리를 정리했다. 한지 위에 남은 것은 이름과 서명뿐이었지만, 광복 81년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던진 질문은 그날 서울 도심을 가로지른 길 위에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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