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도훈 기자의 한 페이지] 사진기록연구소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 꼭 기억해야"

광복 80주년 맞아 사진전 '잊혀진 이름 남겨진 자리' 선봬…24일까지 계명대 극재미술관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8일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은경·최덕순·박창모·박민우·우동윤·장용근 작가. 김도훈 기자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8일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은경·최덕순·박창모·박민우·우동윤·장용근 작가. 김도훈 기자

사진기록연구소.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가 단체다. 이름처럼 '사진의 기록적 가치'에 방점을 두고 작업을 한다. 장용근 현 사진기록연구소 소장이 2014년 몇몇 사진가들과 대구도시철도 3호선 건설 기록 작업을 한 것을 계기로 창립했다. 지금까지 11차례 기획전시와 7권의 사진집을 냈다. 그간 10여명의 사진가가 거쳐 갔고 현재 9명의 회원이 활동한다.

사진기록연구소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난 11일부터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기획전 '잊혀진 이름, 남겨진 자리_조선인 강제동원의 기록'을 열고 있다. 일본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흔적을 기록한 사진을 선보이는 자리다.

박민우·박창모·우동윤·장용근·최덕순 등 5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이들은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 60여 곳을 답사하고 그 흔적을 촬영했다. 이들이 이동한 누적 거리는 7천㎞가 넘는다.

여기에다 대학원에서 기록학을 전공하는 박은경 한국애드 대표가 객원 기록작가로 참여했다. 그는 연구소 회원들이 촬영한 장소의 역사적 사실과 의미를 취재해 기록했다. 그 결과물은 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사진자료집 '잊혀진 이름 남겨진 자리_조선인 강제동원의 기록'(라브리움/312쪽/2만8천원)에 담겼다.

지난 8일 작품 설치를 위해 모인 6명의 작가를 극재미술관에서 만났다. 이들은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을 흔히 전쟁에 국한된 일본의 국가 폭력으로 알고 있지만, 조선인 노동 착취는 1910년 불법적 한일합방 이전부터 광범위하게 이뤄졌다"며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꼭 기억해야 할 우리 역사"라고 입을 모았다.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8일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광복 80주년 기념전을 앞두고 작품 설치를 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8일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광복 80주년 기념전을 앞두고 작품 설치를 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이번 작업은 어떻게 시작됐나.

▶(우동윤)개인적으로 근대사, 특히 일제강점기에 관심이 많았다. 지난해 초 직장에서 1개월 정도 길게 휴가를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목적지를 일본으로 정하고 사진 작업할 소재를 찾아봤던 게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흔적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니 당시 조선인들이 전쟁에만 동원된 게 아니라, 일본의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기반시설을 닦는데도 많이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지난해 4월 한 달간 일본 내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을 찾아다니며 사진 작업을 했다.

돌아와서 사진을 정리해보니 빠진 곳도 많았고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란 점을 실감했다. 마침 2025년이 광복 80주년인 만큼, 연구소가 매년 1차례씩 여는 기획전으로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용근 소장께 이 같은 뜻을 전했고 회원 모두가 흔쾌히 호응했다. 이후 회원들은 각자 자료조사와 추가 대상지 발굴에 나선 뒤 취재 지역을 나누고 개별 일정에 맞춰 작업을 했다. 공간적으로는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일본 전역 60여 곳을, 시간적으로는 1901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강제동원의 흔적을 촬영했다.

-5명이 답사한 곳이 상당하다.

▶(장용근)최근 한일 양국의 큰 관심을 받는 야마구치현 조세이 해저탄광,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논란이 된 니가타현 사도광산, '군함도'란 영화로도 제작된 나가사키현 하시마 등은 널리 알려진 곳이다. 반면, 효고현의 쇼와못과 아마루베철교, 기후현의 노다터널 등도 대표적인 노동착취 현장이지만 그동안 국내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젝트를 계획한 이후 다들 자료조사에 많은 공을 들인 것도 그동안 국내에 덜 알려진 곳을 보다 깊이 있게 조명해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슈마리나이호 우류 제1댐이라는 곳도 낯설다.

▶(최덕순)1938년부터 1943년까지 홋카이도 북부 우류강 상류에 건설된 대형 수력댐으로 많은 조선인이 노동력을 제공한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적게는 1천명, 많게는 6천명의 조선인이 동원됐다고 한다. 취재를 하며 놀란 사실은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숨기려는 일본 정부와 달리, 이곳엔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강제노동박물관이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더욱 의미가 있는 건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이 이곳 주민들에 의해 밝혀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박물관 자리는 고켄지(光顯寺)란 사찰이 있던 곳이다. 이곳 주지 스님은 1976년 사찰 경내에서 이름과 사망 일자가 적힌 위패 80여개를 발견했는데, 조선인의 이름도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이후 스님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위패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공사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인 50여명의 시신이 공사 현장 근처에 있던 고켄지로 옮겨진 후 매장됐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유골 반환으로까지 이어졌다.

8일 작품 설치를 위해 모인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창모·최덕순·박은경·장용근·박민우·우동윤 작가. 김도훈 기자
8일 작품 설치를 위해 모인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창모·최덕순·박은경·장용근·박민우·우동윤 작가. 김도훈 기자

-박민우 사진가의 유리건판(필름이 발명되기 이전 널리 쓰인 근대적 방식의 촬영 매체) 사진이 눈길을 끈다.

▶(박민우)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8월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이곳에도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이 있었다. 원폭으로 나가사키에서 6만~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추정되는데, 조선인 2만여 명이 피해를 당했고 그중 약 1만 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둘러보며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설명이 소극적이란 걸 실감했다.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도 인적 드문 외진 곳에 있었다.

군함도도 마찬가지였다. 섬을 둘러볼 수 있는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셔터를 누르며 생각했다. '진실을 기억하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 오늘날 우리의 몫이구나.'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유리건판으로 촬영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일제강점기 때 널리 쓰인 유리건판 방식을 활용해, 사진을 보는 이들이 이런 역사적 의미에 좀 더 깊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도광산엔 조선인 강제 동원 언급이 아예 없지 않나.

▶(박창모)그렇다. 사도광산은 1902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던 74개 작업장 중 하나다.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던 1945년 7월엔 무려 1천200여명의 조선인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인 강제 동원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 박물관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설명이 있긴 했지만 '강제동원'이 아닌 '조선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 노동자의 삶'이란 문구로 모호하게 표현돼 있었다. 사도광산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광산의 상징이 된 V자형 봉우리 '도유노와리토(道遊の割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을 보며, 가려진 진실과 묻혀버린 기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8일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은경·최덕순·박창모·박민우·우동윤·장용근 작가. 김도훈 기자
사진기록연구소 회원들이 8일 대구 계명대 극재미술관 블랙홀에서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은경·최덕순·박창모·박민우·우동윤·장용근 작가. 김도훈 기자

-과거의 흔적뿐만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도 기록했다.

▶(장용근)1905년 1월 경부선 철도가 완공되자 일본은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연락선을 같은 해 5월 개통했다. 경부선 철도를 이용해 물자와 인력을 부산에 모으고,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항으로, 시모노세키항에서 다시 모지코항으로, 모지코역에서 철도를 이용해 일본 전역에 조선의 물자와 인력을 쉽고 빠르게 보급할 수 있는 수탈 경로가 완성된 것이다.

그렇게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은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모두가 귀환한 건 아니었다. 일부는 귀환선을 기다리다 기회를 놓쳤고, 일부는 일본 내 노동시장에 잔류했다.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개인적 관심은 조선인 집단 거주지와 오사카·나라·교토에 흩어져 있는 강제동원 장소에 쏠렸다. 그리고 이 징용 루트를 되짚어 가며 작업을 했다. 특히, 조선인이 겪었을 비하와 차별이 마을 이름에 고스란이 묻어있는 똥굴 동네, 아파치 마을, 우토로 마을에서 후손들을 만나 과거와 현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활동가들이 "일본이 왜 이런 역사적 사실을 숨기는지 모르겠다"며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모습에 크게 감동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관심이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며 부끄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연구소가 그동안 낸 책은 사진집 형식이었던 반면 이번엔 글이 많이 들어간 '사진자료집'에 가까운 모습이다.

▶(박은경)아마 그게 제가 필요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제가 한 일은 사진가들이 기록한 현장과, 그것을 보는 이들을 연결시키는 작업이었다. 예를 들자면 강제동원된 조선인 집단거주지였던 똥굴 동네 사진도 맥락을 알지 못한 채 본다면 "그냥 빈민촌이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자료가 너무 부족했던 탓이다. 게다가 작성한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기록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기록을 대조하고 수치와 연도를 확인하며, 한일 양국의 공식문서와 증언 자료를 교차 검토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울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건, 우리의 아픈 역사이고 꼭 기억해야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 모두가 그런 생각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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