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보다 의리를 택했다."
1478년 경북 안동의 선비 13명이 내린 선택은 548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향촌 공동체 '우향계(友鄕稧)'가 학술대회를 통해 다시 조명되며 공동체 정신의 의미를 되짚는 계기가 마련됐다.
경북유교문화원은 4일 안동 경북유교문화회관에서 '우향계의 계승과 역사적 위상'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고, 전통 공동체의 역사와 현대적 가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이번 행사는 단순한 과거 회고를 넘어 공동체 해체가 가속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전통이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자리로 의미를 더했다.
◆권력 대신 도의를 택한 선비들의 결단
우향계는 1478년 성종 9년, 안동권씨, 흥해배씨, 영양남씨, 고성이씨, 안강노씨 등 다섯 성씨 선비 13명이 뜻을 모아 결성한 모임이다. 이들은 덕업을 권하고 풍속을 바로 세우며 지역 공동체를 이끌겠다는 목표로 결사체를 만들었다.
당시 조선 사회는 권력 변화의 여파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많은 인물들이 정치적 선택 앞에서 현실과 타협했지만, 우향계 구성원들은 다른 길을 택했다. 이들은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권력 중심의 삶이 아닌 도의 중심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의 선택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었다. 자연 속에서 학문을 이어가며 지역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공동체 질서를 회복하는 데 힘을 쏟았다. 개인의 출세보다 공동체의 안정을 우선한 결정이었다.
우향계는 단순한 친목 모임을 넘어 지역 사회의 핵심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향촌 여론을 형성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자발적 시민 공동체이자 초기 지방 자치 모델로 해석된다.
이들이 내세운 '선한 선비끼리 벗한다'는 정신은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실천의 기준이었다. 서로를 감시하고 격려하며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식은 지금의 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400년 기록으로 남은 공동체의 기억
우향계가 오늘날까지 주목받는 또 다른 이유는 치밀하게 이어진 기록 전통에 있다. 창립 당시 제작된 '우향계축'을 시작으로 '우향계안', '계회시첩' 등 다양한 문헌이 축적됐다.
이 자료에는 계원 명단과 활동 내용, 계회 개최 장소, 시문 교류, 향약 규정 등이 상세히 담겨 있다. 단순한 기록을 넘어 당시 선비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공동체를 운영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특히 400년 이상 이어진 계승 과정이 문헌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이는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구조와 변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우향계 기록은 시대 변화 속에서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계의 명칭은 진솔회, 세호계, 수호계 등으로 변화를 겪었지만 그 정신과 운영 방식은 지속됐다. 이러한 연속성은 우향계를 단순한 역사적 유산이 아닌 살아 있는 전통으로 만든 핵심 요인이다.
현재 이들 자료는 보물과 경북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고 한국국학진흥원 등에서 보관·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를 '향촌 사회의 집단 기억'으로 평가하고 있다.
◆끊기지 않은 전통… 오늘의 공동체에 질문 던져
우향계의 전통은 기록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동 성곡동에 건립된 우향각과 우향사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8일 제향을 이어가고 있다. 다섯 문중이 순번제로 제사를 주관하는 방식은 공동체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전통은 단순한 의례를 넘어 선조들의 정신을 현재로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제향을 통해 후손들은 공동체의 뿌리를 확인하고 세대를 잇는 연대를 체감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우향계의 형성과 전개, 향촌 사회에서의 역할, 현대적 의미를 주제로 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임노직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은 우향계의 성립 배경과 조선 전기 향촌사회에 대해 기조강연 했다. 또 황만기 경국대 연구교수는 우향계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정리했고, 남재주 한국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은 관련 사료와 계승 구조를 분석했다. 김주부 상주박물관 학예관은 문화유산적 가치와 지역사적 의미를 조명했다.
발표자들은 우향계를 단순한 유교 전통으로 한정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자발적 연대와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 모델이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도 적용 가능한 가치가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공동체가 약화되는 현실에서 우향계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공동체는 제도보다 사람의 의지와 약속으로 유지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548년이라는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가치의 축적이다. 권력보다 의리를 개인보다 공동체를 선택한 선비들의 결단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재업 경북유교문화원 이사장은 "우향계는 우리나라 유계사상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자 지금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전통"이라며 "이번 학술대회를 통해 우향계의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하고 지역 사회와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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