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제 양광(楊廣)이 제1차 고구려 침공 때 내린 조서(詔書) 내용
수문제를 이어 즉위한 수양제 양광은 동북방의 강자 고구려를 복속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612년 세계역사상 유례가 드문 3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이때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전국에 반포한 조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고구려의 보잘것없는 추악한 무리들이 혼미하고 불공스러워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고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高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竭之間 荐食遼獩之境)"
이 문장은 아주 짧지만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고구려 강역의 정확한 위치를 밝혀줄 결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숭취(崇聚)", "천식(荐食)"과 같은 다소 생소한 단어가 보이므로 먼저 이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숭취(崇聚)"는 함께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때 양웅(揚雄)이 지은 『태현경(太玄經)』에 "사물이 서로 모여 있다.(物相崇聚)" 한나라 때 왕부가 지은 『잠부론(潛夫論)』에 "여러 하찮은 무리들이 모여 있다.(崇聚群小)"라고 하여 "숭취"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천식(荐食)"은 한두 번에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 침공하여 병탄한다는 의미이다. 천(荐) 자에는 자주, 누차의 뜻이 담겨 있고 식(食) 자에는 집어삼킨다는 뜻이 들어있다.
"천식"의 출전은 『춘추좌전』이다. 좌전 정공(定公) 4년 조항에 "오나라가 큰 돼지, 긴 뱀이 되어 큰 나라를 누차에 걸쳐 침략하여 병탄하였다.(吳爲封豕長蛇 以荐食上國)"라고 보이는데 두예(杜預)가 이를 주석하기를 "천(荐) 자는 자주 삭(數) 자의 의미이다.(荐數也)"라고 하였다. 이는 탐욕스러운 침략자인 오나라가 중원의 큰 나라를 누차에 걸쳐 침략하여 병탄한 행위를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것이다.
수양제가 내린 조서 가운데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다.(崇聚勃竭之間)"라고 말한 내용을 분석해보면 발해와 갈석산 사이가 수나라 시대에 고구려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고구려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와 갈석산의 위치를 추적하면 고구려의 중심지 즉 당시 고구려 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드러나게 된다.
역사상에서 갈석산은 한반도나 요녕성에는 존재한 적이 없고 하북성에 있었다. 그렇다면 수나라가 공격한 고구려 수도 평양성은 하북성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이 이상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여긴다.
수양제 조서에서 언급한 발해와 갈석산 사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구체적으로 어디쯤에 해당할까. 송나라 때까지도 조선성(朝鮮城) 유적이 남아 있었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의 창려현(昌黎縣) 일대가 그 지역이라고 본다.
창려현에는 현재 갈석산이 있고 갈석산은 발해를 마주하고 있다. 창려현은 지리적으로 발해 북쪽, 갈석산 남쪽에 위치하여 수양제 조서의 "발해와 갈석산 사이"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송나라 왕응린은 『통감지리통석』에서 "하북도 평주 치소 창려현에 당나라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平治昌黎 唐安東府)"라고 말하여 하북성 창려현이 고구려 평양성이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나라 시대 고구려의 수도가 오늘날의 하북성 창려현 일대였다면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가 국경을 마주한 국경선은 거기서 훨씬 더 서쪽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다.
수나라 때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하북성 창려현에서 서남쪽으로 더 나아가 북경시 남쪽의 역수(易水), 호타하(滹沱河) 유역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바로 수양제 조서에 나오는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荐食遼獩之境)"라는 내용이다.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천식(荐食)"은 그냥 한번 공격했다는 의미가 아니고 여러 차례 공격을 통해 그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병합했다는 다시 말하면 고구려에 귀속시켰다는 뜻이다.
수양제가 그의 조서에서 직접 밝힌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라는 내용은 수나라 시대 고구려 서쪽 국경선은 압록강이 아닌 하북성의 요수와 예하 유역이었음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고 하겠다.
◆고구려 수도는 발해 갈석산 사이, 서쪽 경계는 요수, 예하 유역
수나라 때 고구려 수도가 발해와 갈석산 중간지대 즉 하북성 동남쪽 창려현 일대였다면 수양제 조서에서 예하와 함께 등장하는 요수는 결코 오늘날 요녕성의 요하를 가리킨 것일 수 없다. 그럴 경우 고구려가 갈석산 서쪽의 수나라 영토가 아닌 갈석산 이동의 자국 영토를 공격하여 병합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양제가 말한 수나라 때의 요수는 어떤 요수를 가리킨 것일까. 남북조시대 대표적인 학자 유신(庾信, 513~581)은 시를 쓰면서 "비장하게 노래 부르며 요수를 건넜다(悲歌渡遼水)"라고 말했다.
형가(荊軻)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역수가(易水歌)를 부르면서 건넜던 오늘날 하북성 보정시 역현에 있는 역수를 가리켜서 유신은 요수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시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 남북조시대 후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수나라 당시 요수는 요녕성의 요수가 아닌 하북성의 역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요수와 함께 거론된 예하는 오늘날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강일까. 예(濊), 예(穢), 예(獩)는 고대에 통용되던 글자다. 그러므로 수양제 조서에 보이는 "천식요예(荐食遼獩)"의 예(獩)는 곧 예하(濊河)를 가리킨 것이다.
중국인들이 맥족의 맥자를 표기할 때 맥(貉), 맥(貊), 맥(貘) 등으로 모멸적인 의미를 담아 다양화했던 것처럼 예족에 대해서도 글자를 바꿔가며 다양하게 표현했다.
우리민족을 예맥족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 학계에서 지금까지 예하의 정확한 위치를 밝힌 연구는 거의 없었다. 수양제 조서에 나오는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荐食遼獩之境)"라는, 예맥사 연구에서 결코 빠뜨려서는 안 될 이 진귀한 기록을 우리 학계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는 우리 역사학계의 한심한 고대사 연구수준의 민낯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명일통지(明一統志) 권3, 북경시 직할 진정부(眞定府) 조항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예하는 평산현 서북쪽 60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흘러서 평산현 동남쪽을 경유하여 호타하로 유입된다.(濊河 在平山縣西北六十里 流經縣東南 入滹沱河)"
이 기록을 통해서 본다면 예하는 명나라 시기까지도 진정부 평산현 서북쪽에 있던 강물로서 평산현 동남쪽으로 흘러 호타하에 유입된 강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때 평산현에 있던 이 예하는 부여(扶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 조항에 "본래는 예의 땅이다.(本濊之也)"라고 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부여조항에는 부여 왕은 "그 도장에 '예왕의 인'이라고 적혀 있다.(其印文 言濊王之印)" "나라에 옛 성이 있는데 예성이라고 한다.(國有古城 言濊城)"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은 예하는 바로 고대 부여국의 강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명나라 때 진정부 평산현은 현재의 하북성 석가장시 평산현으로서 당나라 때(756) 안록산의 난을 평정했다는 의미를 취하여 평산현으로 지명을 변경했다. 서한 초기에는 평산현에 포오현(蒲吾縣)을 설치했는데 『대청일통지』 예하 조항에 "예하는 또한 포오거라고 한다.(濊河 亦名蒲吾渠)"라고 하였다.
'포오'는 바로 '부여'의 다른 한자 음차표기다. 중국어에서 포(蒲)는 pu 오(吾)는 yu로 발음하여 부여(扶餘)의 puyu와 발음이 같다. 곧 예하는 중국어로는 푸위(puyu)강, 우리말로는 부여강이었다.
예하가 위치해 있었던 북경시 진정부는 춘추시대에는 선우국(鮮虞國), 진(秦)나라 때는 거록군(鉅鹿郡), 한나라 초기에는 항산군이 있던 지역으로서 송나라 시기에 이르러 진정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의 중국 하북성 보정시 석가장시 일대가 바로 그 지역이다.
예하는 지금 중국 지도상에는 지워지고 없다. 그러나 이상에서 인용한 자료를 검토해 본다면 예하는 오늘날 하북성 중남부 호타하 부근에 위치했던 강으로서 하북성 보정시 역현에 있는 즉 남북조시대의 학자 유신이 요수라고 말한 역수와 이웃한 강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荐食遼獩之境)"라는 수양제의 조서에 나오는 이 기록은, 수나라 시대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하북성 서남쪽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역수와 그 부근의 호타하 일대였다는 경이로운 역사적 사실을 반도사관에 찌들어 있는 오늘 우리 한국인들에게 일깨워준다.
수양제 조서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영토는 고조선, 부여의 고토를 모두 회복하여 한반도 북쪽 동북 삼성은 물론 오늘날 북경시를 넘어 하북성 남쪽 역수, 호타하 유역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고구려 전쟁에 직접 참가한 수양제의 조서는 조작되지 않은 1차 사료
중국 황제의 조서는 황제가 직접 신하와 만백성들에게 반포하는 글이란 점에서 역사 사실을 조작하기 어렵고 후세 사가들의 위조나 날조 또한 쉽지 않았다.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고 요수와 예하 지역을 병탄하였다."라는 발해유역 고구려 제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런 내용은 수양제 조서에만 보이고 다른 중국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사서를 편찬하면서 중국의 사관들이 중국의 국익에 위배된다고 여겨지는 동이족 관련 기록들을 임의로 삭제 수정했지만 황제의 조서에 대해서는 저들이 감히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전쟁에 직접 참가한 인물이고 황제의 조서는 후세의 사관들이 감히 한 글자도 보태거나 뺄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에 오늘에 전해지는 수양제의 조서는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 1차 사료다.
그러므로 수나라 때 고구려의 수도는 발해 갈석산 사이에 있었고 서쪽 경계는 하북성 보정시 역수, 호타하 부근 예하 유역이었다는 것은,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황제 조서의 1차 사료를 통해 고구려의 속살이 빨갛게드러난 것이라고 하겠다.
◆수양제 조서에 의하면 고구려 살수는 결코 청천강이 될 수 없다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에 모여서 살고 있고 요수와 예하 지역을 자주 침공하여 병탄하였다."라는 이 기록은 『수서』 양제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우리나라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조항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한양조선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이 문장을 보았을 것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사대 사관에 물든 때문일까. 한국 고대사 연구에 지각변동을 가져다줄 만한 이 귀중한 자료를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신채호와 정인보 또한 이런 자료를 인용하여 고구려사를 연구하지 않고 살수가 청천강이라고 말하는 우를 범하였다.
지난날 우리 선배학자들이 일찍이 이런 내용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공론화시켰더라면 오늘날 고구려의 살수가 북한의 청천강이라는 엉터리 논리는 아예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한반도 중심의 우리 국사는 지금과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고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국수주의자의 잠꼬대가 아닌 중국 황제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공개적으로 천하에 천명한 발언 "숭취발갈지간 천식요예지경(崇聚勃竭之間 荐食遼獩之境)"!
글자는 열 두자 밖에 안 되지만 지금까지의 식민 반도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연구를 뒤엎고 근본적으로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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