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마을 통장입니다. 조사할 게 있는데 집에 계시능교?" 찾아온 통장은 이것저것 캐물었다. 왜 혼자 사느냐, 가족은 어디에 사느냐, 한 달 수입은 얼마쯤 되나, 아픈 데는 없나, 급한 어려움이 생겼을 때 도움받을 데는 있나,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 있냐 등등. 보아하니 고독사 예방 모니터링 프로그램인 듯했다. 필자가 주민등록상 1인 가구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 사정을 말하자면 장성한 자식들이 취업해 나가 살고 있으며, 아내도 일 때문에 몇 년 전 다른 도시에 거처를 마련해 일주일에 이틀 정도씩 지낸다. 요즘 유행어로 '핵개인' 가족인 셈이다. 내가 고독사 우려 대상자로 분류돼 있었던 사실을 알고 나니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 복지 시스템이 그나마 제대로 작동하고 있구나. 구청 열일하네.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1인 가구 고독사는 출산 기피·고령화가 낳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초고령화 사회 진입이 확실시되는 나라다. 65세 인구 비중이 20%를 넘으면 초고령화 사회로 분류되는데, 2026년 우리나라는 초고령화 사회로 들어서게 된다. 2023년 6월 현재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0%다. 압도적 세계 최저다. 2017년 한국을 방문한 라가르드 당시 IMF 총재는 저출산율과 관련해 "한국은 집단자살 사회"라고 진단한 바 있다. 당시 출산율은 1.05명이었다. 지금의 한국 상황을 본다면 라가르드는 어떤 말을 할까? 더 강렬한 어감의 단어가 안 떠오른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은 풍요를 누려 왔다. 현대의 중산층 소비는 조선시대 왕후장상 못지않다.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이 있어서 가능한 풍요이지만, 꾸준한 인구 증가가 주요 원동력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 많은 것이 바뀐다. 인구 정점을 지난 대한민국은 경험하지 못한 상황들과 만나게 될 것이다. 만성적 인력난에 내수 소비의 급격한 위축이 기다리고 있다. 인구 감소로 인해 부동산 가치도 장기적 상승 기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부양받아야 할 사람이 늘고 부양 의무를 짊어져야 할 사람이 줄면서 세대 간 갈등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국민연금 및 건강보험 재원 조달 문제도 해법이 잘 안 보인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출산율 감소 그래프 기울기를 완화해 보겠다며 수백조 원 예산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헛돈만 허공에 날렸다. 인센티브를 통해 출산율을 높인 나라는 없다. 일본도 40년 동안 갖은 저출산 대책을 시행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실패가 뻔히 보이는 길을 뒤따라 걸었다. 우리는 적은 수의 젊은이가 많은 수의 노인을 부양하는 모습의 미래상을 그려 왔다. 그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일할 수 있는데도 일정 나이가 되면 은퇴하는 게 규범인 사회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해답이 없을 것이다. 원한다면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사회가 되어야 국가 재정 부담을 줄이고 세수 기반을 그나마 유지해 나갈 수 있다.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 사회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연착륙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고 사회 구성원들이 동의해야만 추진 가능한 시나리오다. 정치가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야 하는데, 지금껏 한 행태를 보면 잘할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2023-10-29 22:03:56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여당 참패로 막을 내렸다. 17.15%포인트(p) 격차다. 여권은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내년 총선이 암담할 것이라는 우려가 당내에서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하지만 우려만 만연할 뿐 쇄신책은 딱히 잘 안 보인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 주권자가 회초리를 들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 그래야 국민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린다. 하지만 이번 보궐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도 잘 안 보인다. 애먼 임명직 당직자들만 사표를 던졌다. 그들이 책임 선상에 있지 않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번 보궐선거 결과를 놓고 보수 언론들조차 비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위도 꽤 매섭다. 지난 1년 반 동안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대통령실과 여당으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수 있겠다. 하지만 언론들은 늘 그래 왔다. 언론이 주야장천 '외람되오나'를 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비판의 칼날은 진영을 안 가린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보수 언론의 화력이 좌파 언론보다 셌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표 차이가 왜 이리 벌어졌는지 냉정히 분석해 보자. 사실, 우리나라 선거는 중도층 20%의 마음을 얻는 경쟁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각각 30% 정도씩인 보수·진보 핵심 지지층은 웬만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나머지 국민이 40%인데, 20%는 투표소에 가지 않으니 남은 20% 표심이 캐스팅 보트다. 그런데 이번 보궐선거 표 격차가 17%p를 넘었다. 적어도 강서구에서는 투표하는 중도층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집권당으로부터 등을 돌렸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총선 승부처는 수도권인데 이번 보선으로 나타난 표심이 내년까지 이어지는 것은 국민의힘으로서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에서 0.73%p 표 차 신승을 거뒀다. 정부 정책과 이념을 안정적으로 추진해 나가려면 국정 지지율이 중요하기에 중도층 마음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의 주요 정책은 지지층으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았지만 중도층에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실 참모진과 여당 지도부의 조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번 보선만 해도 이렇게 판을 키울 일이 아니었다. 행정 일꾼 뽑는 선거로 조용히 치러도 됐을 법한데 공천 과정에서 '윤심'이라는 말이 오가고 당 지도부가 총출동하는 등 난리를 피웠다. 이번 총선을 미니 대선급으로 키운 것은 여당이었다. 국민들이 이번에 보낸 첫 신호를 여권은 엄중히 여겨야 한다.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을 공천해서는 안 된다" "눈도장 찍겠다고 강서구에 출동하는 당 지도부를 말려야 한다"는 식으로 조언한 대통령실 참모 또는 여권 인사가 혹여 있었는지 모르겠다. 인사가 만사라 했다. 이런 인물이 있다면 중용함이 마땅하다. 입에 발린 달콤한 말로 대통령 심기 경호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계할 일이다. 듣기엔 쓰지만 옳은 소리에 귀를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부 정책의 실패 확률이 적다. 대통령 중심제인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실패'는 '국민의 고통'과 동의어이다. 이는 진영을 따질 일이 아니다. 대통령의 시간은 길지 않다. 임기 후반으로 갈수록 정책 추진 동력은 약해질 것이다. 윤 대통령은 실리를 중시하는 정책을 펴 미래로 나아가기 바란다. 그래야만 중도층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특히, 경제가 중요하다. 경제 상황이 더 나빠지면 백약이 무효다.
2023-10-15 20:01:15
3일 굶으면 사람은 남의 집 담을 넘는다고 했다. 식욕은 그만큼 강렬한 욕구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곡기(穀氣)를 스스로 끊는 선택을 한다.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은 최대·최장 규모 단식 사례로 꼽힌다. 아일랜드의 무장단체(IRA) 활동 혐의로 체포된 양심수 수십 명은 당시 영국 정부를 향해 자신들을 정치범으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하며 극한의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0여 명이 아사(餓死)했다. 사망은 55~75일 사이에 발생했다. 이 사례를 근거로 의학계에서는 인체의 단식 한계를 72일로 본다. 기적을 바란다 해도 75일은 넘길 수 없다고 판단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박관현 씨가 5·18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며 1982년 50일간 단식을 벌이다가 숨진 사례가 있다. 강의석 씨가 사립학교 종교 교육을 반대하며 46일 단식을 했으며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씨도 46일 단식을 했다. 앞서 밝힌 72일은 의학적 한계치일 뿐이다. 단식이 2주일을 넘으면 당사자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 그만큼 단식은 사회적 약자나 정치적·종교적 소수자 등이 자기 목숨을 걸고 선택하는 최후의 카드다. 그렇다고 해서 단식투쟁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무릅쓴다는 각오가 없다면 단식은 조롱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힘 있는 자의 단식도, 자기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단식도 그렇다. 목하 대한민국에서는 제1야당 대표의 단식이 정치 이슈를 빨아들이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단식이 18일로써 19일째다. 그는 무기한 단식 돌입의 이유로 ▷민생 파괴·민주주의 훼손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 ▷일본 오염수 투기에 대한 국제재판소 제소 ▷전면적 국정 쇄신과 개각 등을 내세웠다. 이 대표의 단식투쟁 명분에는 대다수 국민이 공감할 만한 대의가 있을까? 그의 단식과 거물 정치인의 역대 단식을 비교해 보자. YS는 1983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등을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했다. DJ는 1990년 내각제 반대 및 지방자치제 실현을 요구하며 13일 동안 단식했다. 요구가 분명했고 대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대표의 요구에는 그러한 선명성이 결여돼 있다. 윤 대통령이 응할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이 대표의 단식에는 '사법 리스크 방탄용' '민주당 내부 결속용'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게다가 '출구'도 안 보인다. 명분이야 어찌 됐든 단식은 길어질수록 효과가 극적으로 커진다. 야당 대표의 단식 장기화는 정치에 부담이다. 처음에는 비판적 거리를 두던 여권도 대응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16일 SNS에 "저는 며칠 전 이재명 대표께 단식 중단을 요청한 바 있다"며 "이 대표께 단식 중단을 다시 한번 정중히 요청드린다"는 글을 올렸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16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단식 초기 철부지 어린애 밥 투정 같다고 했던 말을 사과드린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목숨 건 단식을 조롱한 건 잘못"이라며 단식 중단을 권고했다. 이 대표로서는 단식투쟁을 통해 이미 그 나름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민주당 내부 단속을 이끌어 냈고 뉴스 중심에도 섰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홍준표 시장이 권언했듯이 세상사는 '신외무물'(身外無物) 즉, 몸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이 대표는 단식을 멈추기 바란다. 대한민국을 위해 필요한 행동이며, 그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다.
2023-09-17 19: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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