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록씨=피습사건 당시인 1955년은 이승만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걸핏하면 '빨갱이' '용공분자'로 옭아넣던 경찰국가 시대였습니다. 당시경찰은 박정희정권때의 중앙정보부를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매일신문은 중동교 붕괴사건,미해결강도사건 등 경찰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련의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습니다.이 와중에 최석채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논설이 도화선이 되어 테러와 최주필의 구속으로 이어졌습니다.경찰권력 무소불위
◇권석진씨=피습사건 약 한달전인 55년 8월9일 나무로 만든 중동교가 철거중무너져 다리밑에서 쉬고있던 노인5명이 숨지고 10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그런데 당시 이순구경북도경국장이 "다리밑에 들어간 사람이 잘못"이라고논평했습니다. 국민을 우습게 보는 당시 경찰의 시각이 확연히 드러난 말입니다. 이순구의 말을 그대로 인용,보도했지요. 이 때문에 다음날 아침 나는'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말로 유명해진 경북도경 사찰과장 신상수와 보안과장 박원달에의해 연행됐습니다. 도경에서 형사들은 "기자면다냐. 맛좀 봐라"며 나를 다그쳤습니다. 이에 "나는 대구매일신문을 대표한 기관장이다. 기관장에게 형사들이 이럴 수 있느냐"면서 이름과 주소만대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쓰라고 버텼습니다.
도경은 결국 조서도 꾸미지 못하고 '징병기피자'로 영장을 신청했으나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않자, 이날 저녁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내가 경찰의 미움을 사게된 건 중동교 붕괴사건보다 지금 민주당 국회의원이된 김말룡씨 체포기사가 결정적 이었습니다. 당시 경북도청과 도경은 지금중앙공원자리에 있었는데 도경 바로앞 국민회의 경북도지부사무실 2층에서노동운동가 김씨는 자유당 정권의 주구였던 대한노총에 반대하는 '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하려고 했습니다. 경북도경 사찰과 직원들은 김씨를 국민회의 2층사무실에서 밖으로 집어던져 협의회 결성을 방해했지요. 이 사건 보도로 나는 경찰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습니다.
◇김승록씨=신문사가 피습을 당하고 최주필이 구속된 뒤 전국의 신문과 국민들이 보내준 자발적인 성원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이름이 기억나지않습니다만 동성로의 한 인쇄소… 인쇄소 주인의 성은 이씨였습니다. 그인쇄소는 경찰의 서슬이 시퍼런데도 피습사건과 최주필 구속 사실을 다룬 유인물을 인쇄해주었습니다. 불빛이 새나갈까 두려워 가마니로 창문을 가리고밤중에 몰래 인쇄물을 찍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렇게 인쇄한 유인물을당시 이우백주간겸 편집국장과 이호래부국장이 밤기차로 서울로 가져가서 각신문사와 국회에 돌려 사건의 전모를 알렸습니다.
서울의 모 신문은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최주필의 논설제목을그대로 사용하면서 최주필이 쓴 글보다 훨씬 강도높은 논조의 논설을 실어우리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신문사간의 경쟁이 치열했고 전국적인 기자나편집인 단체조차 결성되지 않았던 그 시절, 이 사건은 전국의 언론 동인들이공동투쟁에 나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권석진씨=당시 사장이었던 임화길신부와 매일신문 사우들의 단결력도 대단했습니다. 임신부는 사건직후 전 사원들을 회사옥상에 모아놓고 "용기있게싸우라"며 격려했습니다. 신문사가 피습된 뒤 대건학교안에 있는 대건인쇄소에서 약 열흘간 신문을 인쇄했습니다. 경찰은 당시 매일신문기자는 물론일반직원들까지 감시하고 다녔는데 원고를 뺏길까봐 경찰의 미행을 따돌리며직원들이 릴레이식으로 원고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문양변호사=최주필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재판당시 이승만정권은'관제 빨갱이'를 양산하고 있었습니다. 사법부도 이를 잘알고 있었습니다.최주필에대한 검찰의 공소사실을 봐도 역시 그래요. 최주필은 기억력이 비상했고 이론도 정연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법치주의에 대한 신념도 확고한 인물이었습니다.
사건을 아무리 검토해봐도 최주필이 빨갱이거나 용공분자일 수 없다는 것이명백했습니다. 경찰서장(성주·문경·영주)으로 재직한 적이 있는 사람을 우익인사로봐야지 빨갱이로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법관들도 당시 이승만정권의 횡포에대해 말은 못했지만 판결을 통해 자기의사를 표시하자는 게 전체적인 분위기였습니다. 항소심은 4개월정도 진행되었는데 다섯번째 공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김승록씨=판사들 뿐아니라 검찰에서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박찬변호사는당시 검사로서 최주필 사건을 담당했던 한옥신부장검사와 한 방을 사용하고있었는데 우리에게 요긴한 정보를 주기도 했습니다.
◇권석진씨=당시 신문은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 '명피의자에 명판관'이라고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문양변호사=이 사건은 1심에서부터 3심인 대법원까지 갔으나 결국 모두 무죄가 나와 당시 자유당정권의 공안통치하에서도 사법부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준 것으로 법조인의 한사람으로서 긍지를 가졌었습니다. 이 당시 정부는사법부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가져 이승만대통령이 김병로대법원장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습니다.
◇김승록씨=9·14피습사건과 최주필의 구속을 통해 매일신문의 반자유당적인태도에 일침을 가하려던 자유당 정권은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몰락을 재촉한꼴이 됐습니다.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고 국민들을 얕잡아본 탓이지요.전국민과 전국의 신문들이 공동투쟁에 나선 계기가 된 이 사건은 언론자유수호운동에서 출발해 민권운동으로 승화됐습니다.
매일신문은 이 사건을 겪은 뒤부터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가정에 배달할 신문이 모자라 가판을 중지할 정도였으니까요. 4·19때 대구시민들에게돌팔매를 당하지 않은 유일한 신문이 매일신문이었습니다. 또 전국 어디를가나 매일신문 기자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권석진씨=그런데 요즘 신문기자들을 볼 때 역사기록자로서의 자긍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모두 샐러리맨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때는봉급을 제대로 받지못하면서도 자기 돈 써가며 취재했어요.◇김승록씨=당시 편집국 인원은 모두 합해봐야 12~13명 정도였는데 큰 사건이 터지면 내·외근 할것 없이 모두 신문사 부근에서 죽치고 있었어요. 중동교 붕괴사건때도 기자 전원이 투입돼 인근 사진관을 샅샅이 뒤져가며 사망자들의 사진을 구할 정도로 단결력이 대단했지요.
◇권석진씨=과거 신문은 고발위주였습니다. 앞으로 신문은 우리사회의 환경을 감시하는 기능에다 지속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신문이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흥미 본위로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김승록씨=신문의 건망증을 얘기하는 거군요. 매일의 후인들은 매일신문 발전의 초석이 된 9·14테러사건을 잊어선 안됩니다. 〈정리·조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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