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폭동의 불길은 만주벌에서 계속 타올랐다. 1930년 8월1일 돈화부근 조선족들은 소고가와 교하,유수하사이의 나무다리를 불살랐고 세곳의 전화선을끊어 버렸다. 일본군과 교전을 벌여 6명을 사로잡았다. 적위대원들은 탈취한무기로 황니하 공안 3분국을 습격,일본군 2명을 부상시켰다. 8월 한달동안훈춘 연길 화룡왕청등 연변 4개현에서는 4천4백73명이 무장투쟁에 참가했다.투쟁은 연변에서만 아니라 남만주와 북만주에서도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이처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한 한민족과 중국인들의 반일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28년 '12월테제'로 중국공산당이 만주의 공산계열단체를 총지휘하게 되면서 무장투쟁은 더욱 조직화되고 격렬해졌다. 일제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세계최강이라는 '관동군'을 파견하고 '만철'회사를 설립하며 중국대륙침략교두보로 정성껏 다져 놓았던 만주가 오히려 반일투쟁의 최대중심지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일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만주침략을 도모하게 됐다. 바로 반식민지 상태인 만주를 완전식민지로 만들고자 한것이다. 먼저 동북군벌 장작림(장작림)을 폭사시키고 만몽에 5개철도 부설을 중국측에 요구했다. 만주병탄을 위한 노골적인 조치였다. 더욱이 1929년부터 불어닥친 세계적 경제공황은 일본을 곤경에 빠뜨렸다. 드디어 일제는 1931년 9월18일 9·18사변을 일으켰다.일본군은 9월18일 봉천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던 북대영을 습격하고 봉천거리를 폭격하였다. 봉천수비대는 싸우지도 않고 도망쳤다. 이튿날인 19일,일본군은 만주의 중심도시인 봉천(현재의 장춘)을 점령했다. 곧이어 길림 요녕성 주요도시를 수중에 넣었다. 한민족이 많이 거주하던 연변도일본군의 지배하에들게됐다. 불과 3~4개월사이에 일본군은 광활한 만주를 완전 점령했다.'이미 반(반)식민지로 된 중국의 한 넓은 지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모택동의 지적('모택동선집' 제2권)처럼 만주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었다. 일제는 만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나아가 중국본토침략의 전초기지로삼기위해 대대적 작업에 착수했다.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탄압이 뒤따랐다.항일운동에 어느민족보다 열성적으로 앞장섰던 한민족은 일제로부터 가장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 했다.
1932년 4월 일본군은 동만과 남만의 조선족 거주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연변지구만 하더라도 연길현(연길현) 만만구(만만구)를 여러차례 토벌하여 1백50명의 조선족을 살해했다. 골짜기 5㎞안 모든 마을이 불탔다고 한다.
9·18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일본군은 94차례나 해란구(해란구)에 대한 토벌을 해 1만7천여명에 이르는 혁명가와 군중들을 무참히 죽였다. 이중 약 4천여명이 조선족이었다. 후일 '해란강대참변'으로 일컬어진 비극적 사건이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1931년무렵 만주 전지역 조선족은 약63만 9백여명. 사망자수를 보면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무차별적 살육을 자행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조선족에 대해 탄압과 경제약탈을 했다. 혹독한 민족동화정책도 추진하였다. 한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고일본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소학교 4학년부터 조선어 대신 일본어를 가르쳤다. 일본어를 국어로하여 학습용어를 만들었고 일본역사와 일본지리만교과과정에 넣었다. 중학생들에게는 학교에서나 일상학습생활에서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했고 조선어를쓰면 엄하게 처벌하거나노동을 시켰다. 마음대로 군사훈련과 노동봉사시간을연장하기도 했다. 공장 광산 기업을 장악하고 농민들로부터 무자비한 수탈을했다. 한민족은우마(우마)보다도 못한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고 도탄속에서허덕이게 됐다.
용정시 길안가(길안가)10호 옛 일본총영사관. 일제의 만주침략과 통치에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이었다. 1910년 이전엔 조선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로 사용됐으나 한일합병이후 총영사관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용정시 인민정부 (시정부) 사무실로 쓰이고 있었다. 지상4층,지하1층(반지하). 이곳에서 수많은 항일지사들이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과 한많은 죽음을당했다. 영사경찰은 당시에가장 악명을 떨쳤다.
일제는 영사관 건물을 항일지사 탄압에 사용하기 위해반지하실로 통하는문과 창문을 철판으로 만들었다. 그때의 참혹함을 전해주려는듯 철판은 피빛으로 녹이 슬었다. 반지하실 내부를 취재하려고 했으나 인민정부 건물관리자장연민씨(54)는 한사코 거부했다. 장씨는"건물외형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나반지하실 내부는 인민정부에서 공개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워 곤란하다"고 말했다. 일제는 영사관 앞뒷마당을 시멘트로 두껍게 포장했다. 중국을 영구히 식민지로 하겠다는 그들의 야욕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는 괴뢰 만주국의수도로 정한 봉천의 지명조차 일본식인 신경(신경)으로 바꾸었다. 일본군국주의의 치밀한 침략성에 분노와 함께 전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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