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학준(69) 씨는 몇 년 전 독극물을 마셨다. 세상을 등지려 했으나 간신히 살았다. 그는 이후에도 몇 차례 극단적 선택을 하려 했다. 우발적인 일은 아니었다. 학준 씨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삶을 끝내고자 했다. 외환위기 당시 사업이 실패한 뒤로 이혼과 자녀와의 관계 단절이 정해진 수순처럼 찾아왔다. 밑동이 부러진 나무 같은 처지였다. 더는 살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지긋지긋한 삶에 순순히 투항"하자는 심정으로 대구 북구 칠성동의 쪽방에 기거했다. 10년간의 쪽방 생활은 그를 더 깊이 고립시켰다. 만취한 이웃들은 밤마다 시비를 걸었다. 갈등을 피하려 방에 틀어박히는 날이 늘었다. 보름 넘게 문을 잠그고 지낸 적도 있었다.
변화의 계기는 2021년 찾아왔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던 사회복지사가 말을 건넸다. "아버님, 원예 프로그램 한번 들어보실래요. 그냥 가볍게요." 늘 흘려듣던 권유였지만, 그날은 달랐다. 큰 기대 없이 몇 차례 수업에 나갔다. 처음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과 말을 섞고, 취미활동을 하는 날이 쌓이며 학준 씨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다른 취미도 만들고 싶어서 기타와 하모니카도 배웠다. 학준 씨의 일상은 조금씩 바깥과 연결됐다. "내가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한참 힘들던 때 관심을 가져주고 따뜻한 말을 해준 사람들 덕분이에요."
바뀐 환경은 학준 씨의 삶을 다시 붙들어줬다. 그는 지금 주기적으로 안부를 나누는 사람이 20명 가까이 된다. 최근에는 남구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자살 예방을 주제로 발표까지 했다. "내 자신이 부끄러워서 아들 결혼식도 못 갔었거든요. 요즘은 조금씩 용기가 생겨요. 조만간 만나려고요."
학준 씨의 변화는 개인의 의지로만 설명되기 어렵다. 그가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반복된 방문, 부담 없는 참여 제안,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느슨하게 연결하는 제도적 장치가 맞물린 결과였다. 학준 씨의 사례는 분명한 단서를 남긴다. 고립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은 '집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학준 씨처럼 스스로 문을 열고 다시 세상과 소통한 사례는 손에 꼽힌다. 대구엔 사회적으로 고립된 고독사 위험군이 1만682명(2023~2024년 조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가족 관계 단절, 경제적 어려움, 만성질환 등 연쇄적이고 상호강화적인 과정을 겪으며 회복의 계기조차 만들지 못한다.
본지는 전문가 6명에게 타 지역보다 빠르게 심화하는 대구의 사회적 고립에 대응하기 위한 방향성을 물었다. 전문가들은 '단순 발굴 이후 사후 대응'에 초점을 맞춘 현행 제도로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하며, 고립((孤立)에서 연립(聯立)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합적인 대응 체계 구축을 주문했다.
◆ 정확하고 세밀한 발굴이 시작…"주민 조직 활성화"
사회적 고립 해소의 출발점은 신속하고 정확한 발굴이다. 전문가들은 행정 정보에만 의존하기보다 주민 조직을 활성화해 현장에서의 관찰과 접촉을 병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가 고립 가구를 선별하기 위해 활용하는 전기요금 체납 등 공과금 정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김석주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공과금 정보가 수천 건에 달하기 때문에 일선 공무원들이 일일이 확인하기 어렵다"며 "지역 내 통장·반장을 중심으로 주민 조직을 구성해 고립 위험군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주민 조직이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제도적·재정적 인프라가 마련돼야 한다"고 했다.
위험군 발굴에도 더 많은 행정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구에서 확인된 고독사 위험군은 8천599명이다.
그러나 2017년부터 2024년까지 대구의 고독사 누적 사망자는 1천114명으로, 사망자 대비 위험군 발굴 배수는 약 7.7배에 그쳤다. 이는 광주(누적 고독사 사망자 881명·고독사 위험군 3만159명·발굴 배수 34.2배)의 4분의 1 수준이다. 서울(발굴 배수 11.1배), 인천(발굴 배수 9.0배) 등 다른 주요 도시에 비해서도 뒤쳐진다. 사회적 고립이 빠르게 심화되는 대구의 현실을 감안하면, 현재의 위험군 발굴 규모는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보다 적극적이고 촘촘한 발굴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상위 전달체계 구축해야"…지자체 역량 강화 주문
1인 가구를 위한 체계적인 지원 제도도 핵심 과제다. 고립 돌봄 문제를 제도적으로 다루려는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그러나 타 시도와 비교하면 대구는 관련 제도 정비에 소극적이었다. 17개 시도 가운데 상당수 지자체는 2016년부터 2023년 사이 '1인 가구 지원 조례'를 제정한 반면 대구는 지난 18일에서야 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진숙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그간 대구는 1인 가구에 대한 조례나 정책 범위가 없어서 촘촘하지 않고 서비스가 분절됐다"며 "조례가 제정됐다면 실질적으로 정책들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최소한의 틀을 제시하고 추진해야 한다. 1인 가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동시에 필요한 서비스들을 묶어서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립사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위험으로 떠오른 만큼, 지자체 차원에서 컨트롤 타워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서울시의 사례를 눈여겨볼 만하다. 서울시는 지난해 7월 고립사를 예방하기 위해 전담부서인 '돌봄고독정책관'을 신설했다. 올해와 내년에 각각 750억에 달하는 예산을 투입해 ▷24시간 이용 가능한 콜센터 '외로움안녕120' ▷고립 가구 소통공간 '서울마음편의점' 4곳 운영 ▷미션을 통한 보상으로 외출을 유도하는 '365 서울챌린지' 등의 사업을 시행해 큰 호응을 이끌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외로움이 사회적인 문제로 부상하면서 정책의 영역에서 지원할 필요가 생겼고 총괄적으로 대응하는 조직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 교수는 "서울시는 전담 부서를 두고 1인 가구의 복지·고용·보건을 아우르는 상위 전달체계를 구축했다"며 "1인 가구가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를 한 곳에 모은 원스톱 창구를 마련해 정보 접근성도 높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구 역시 서울시 사례를 참고해 사회적 고립을 보편적으로 다룰 수 있는 상위 전달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제도가 우선돼야
사회적 고립에 대응하기 위해선 복지 인력의 전문성도 강화해야 한다. 복지 인력은 집 밖으로 한 발을 내딛기까지의 마중물이다. 이들의 역량은 고립의 해소를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대구에서는 매년 500여 명의 '즐거운 생활 지원단(즐생단)'이 고립 가구 상담, 안부 확인 등을 맡고 있다. 고립 가구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로 좋은 평가를 받는 사업이지만, 전문성 부족으로 추가 복지 서비스를 연계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김향아 대구시행복진흥사회서비스원 부연구위원은 "즐생단원들이 보다 잘 대응할 수 있도록 사례 중심의 교육 등 다각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홍일 작은거인의꿈 대표는 "대구에는 은둔·고립 관련 전문 인력이 거의 없다"라며 "자격증을 보유했다고 전문가가 아니다.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사람의 마음을 여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어 "대구에도 사회적 고립 관련 협의체를 구성해 최소 5년 정도는 사례를 공유·연구하며 역량을 키우는 게 우선이다"고 덧붙였다.
사회복지관의 역할을 주민 밀착형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커뮤니티 공간 제공과 프로그램 중심으로만 운영되는 기존 복지관은 밖을 나오지 않는 고립 가구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주거유형별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지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강상훈 대구보건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금의 복지관은 물리적 공간에 머무는 서비스 전달에 그치고 있다. 고립된 주민과 유의미한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라며 "동 단위 생활권에 자리 잡은 지역밀착형 복지관은 고립 가구를 조기에 발굴할 수 있다. 또 주민과의 소통을 통해 관계망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역밀착형 복지관이 가동되면 고립 가구의 주거유형에 대응한 지원책을 제공하기도 좋다"라며 "예컨대 (장애인과 만성질환자들이 많은) 영구임대아파트에는 단지 기반 통합사례관리와 정기적 안부, 주민 주도 관계망 형성 프로그램을, 쪽방촌에는 주거지원과 의료, 정신건강, 알코올 치료 통합 프로그램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고립 예방 정책에서 중장년이 소외된 점 또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중장년층이 고립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생애주기 전반을 아우르는 대응 체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송인주 사회적 고립 전문 연구소 스스로랩 대표는 "중장년 고립과 고독사의 출발점은 실직이나 조기 은퇴, 사업 실패인 경우가 많지만 이를 회복할 공적 자원은 거의 없다"며 "문제를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떠안는 사이 가족과 친척 관계까지 끊긴다"고 말했다. 이어 "은퇴 이후 재기를 준비하는 중장년에게 기초 생계 지원과 함께 자격 취득 기간을 보장하거나, 중장년에 대한 사회·정부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국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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