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소 포로명단 발굴과 과제

일제 강점시 징병돼 일본 관동군과 섞여 싸우던 3천여명의 조선인중 2차대전이 종료되자 소련 포로병으로 처리돼 구사일생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고작 46명에 불과했다.이들은 지난 92년 서울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조직을 결성, 회원간친목 도모와 함께 궁극적으로는 '대일본피해보상 청구문제' 해결에 관심을기울이게 되었다.

삭풍회는 그간 러시아로부터 그들이 당시 포로병이었다는 사실증명서를 발급받기위해 한국 외무부, 주러 한국대사관, 러시아 외무부, 러시아연방 국립문서보관소 등과 접촉, 확인을 기다리던 중 마침 본지의 한국인 포로병 명단발굴작업으로 인해 손쉽게 사실증명서 발급이 이뤄졌다. 지난해 9월 이미 삭풍회는 사실증명서 발급을 신청해 두고 있었으나 근 1년이 다 되도록 아무소식이 없던 상태였다.

한국인 포로병 명단은 모스크바내 한 장소에 보관돼 있던 것이 아니라 군,KGB, 경찰 아르히브(문서보관소)에 산재돼 있었다. 포로병 문제이므로 군문서보관소에서 대부분의 명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KGB와 경찰의 협조를 빌려그곳에서도 한국인으로 체포된 사람이면 누구든 기록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주소나 생년월일이 잘못 기재된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이름조차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단순한 포로병이 아니라 일본이름을 사용하는 한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이렇듯 소홀한 취급을 받았는지도모른다.

한편 3천명이 넘는 우리 포로병 명단을 분석하면 대부분이 사병으로 구분돼있으나 일부는 초급장교에서 장성급도 3명(임준해, 박병두, 마천산 1894~5년생으로 관동군이 아닌 만주군으로 추정됨)까지 나타나 있다.이들 포로병은 1948년석방되면서 김일성의 요청으로 북한에 넘겨져 인민군창설의 토대가 됐으며, 그중 이활 등 몇몇은 인민군 공군 중장까지 지내는등 주요 군요직을 맡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 인계된 2천여명의 포로병들 중 남한 출신 4백70명은고향을 찾아 38선을 넘어 남한에 왔으며, 또 그들 중 고성만씨(하바로프스크한국어방송국 고문), 유학규씨(전모스크바 국제방송국 일본어 번역원)등 극히 일부는 러시아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삭풍회가 당면한 문제는 조속한 '대일 피해보상 청구문제' 해결이다.삭풍회는 일본정부에 보상금 약6천만엔씩을 피해자 개인에게 지급할 것을 요청해 둔 상태다. 지난 2월에도 일본 관방장관을 방문, 회원1인당 5천만~7천만엔의 보상 청구서를 전달하고 유엔인권 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한국 정부의 태도도 냉담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이미 1967년 한일관계정상화를 위한 회담 당시 '김종필-오히라 각서'에 의해 피해보상을 포함한 모든 돈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문제를 거론할 수 없다는 회답을보내왔다는 것.

이태호 삭풍회 총무는 "올해 유엔인권소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예정"이라며 피해보상청구건이 조만간 타결될 것이라는 기대를 보이고 있고일부회원들도 러시아측의 사실증명서 발급이 이뤄졌으니 어렵지 않게 문제해결을 볼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못하고 있는 정신대 문제나 사할린한인교포 보상건과 같은 일들이 하나씩 풀려나가려면 좀 더 사태추이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 〈모스크바·송광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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