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광복50년 해외 기획취재 시리즈-광복군 창설

청년전지공작대가 출범하던 39년11월에는 드디어 임정도 군대 창설 준비를실행에 옮긴다. 실제 창설은 그 10개월 뒤에 이루어지고,김원봉 계열의 조선의용대 보다 일년이 늦었지만, 창설 준비팀인 '군사특파단'이 이때 서안에서활동에 들어간 것이다.군대 창설은 임시정부 20년간의 소원이었다.

**3만명규모 계획**

임정은 당초부터 최대 3만명 규모의 군대를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이를 위해 자체 무관 양성학교를 운영해 보기도 했었다. 또 30년대 들어서도낙양군관학교에서의 장교 양성을 시도하고, 37년 중일전쟁이 난 뒤에는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해 또 군대 창설을 준비하기도 했었다.그에 앞서 1910년대 초부터 신규식선생 등이 많은 우리 젊은이들을 중국군사관학교들에 입학시키기 시작한것도 그러한 바람에서였다. 이범석-김홍일등등의 많은 청년들이 그때의 그같은 소원에 힘입어 길러진 군사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그 20년간의 몸부림은 거의가 이룰 수 없는 꿈으로 무산됐었다. 돈과 젊은이들이 없고, 형편도 안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정이 그 한맺힌 군대 창설 준비를 시작한 것은 39년7월이었다. 이때 임정은 황하 이북 지역에 한국인이 20만명 이상으로 늘었다는 등의 상황을 기초로, 드디어 시기가 왔다고 보고 군 창설 준비팀인 군사특파단을 운영키로한 것이다.

군사특파단은 이해 10월1일 결성됐다. 단장은 당시 국방장관(군무부장)이던 조성환선생, 위원은 황학수-나태섭-이준식선생 등 3명이었다. 그 밑에 공작원으로 노복선-서파 등이 임명됐다.

당시 64세이던 조단장은 1906년(31세) 신민회 조직에서부터 많은 활동을하다,1908년 이후 중국의 북경-만주-상해-중경 등에서 활동하던 중이었다.만주에서 김좌진장군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운영하고,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러시아령에서의 자유시 참변을 당하기도 했었다(광복후 48년 사망).구한국군 장교 출신의 황학수선생도 당시 이미 60세의 노투사였으며, 27년도에 망명한 나태섭선생(당시 38세)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출신이었다. 39세의 이준식선생은 일찍이운남강무당을 졸업한 장교로 만주 통의부에서 독립전쟁을 했었다(광복 후 국군 중장으로 예편).

**미교포지원 요청**

이들은 11월에 최전선인 서안으로 파견돼 청년전지공작대가 자리잡았던 바로 옆의 '통제방'이라는 마을을 터전으로 삼았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가중경에서 2천리나 떨어진 이곳에군사 거점을 만들고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중국군에 근무 중이던 70여명의 한국 출신 장교들에겐제대 및 합류 명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안춘생 노태준 조인제 이석화 김자동 등이 특파단에 합류했다. 그외 현지에서 김광 이건우 등도 스스로 참여했다.

특파단은 7개월 후인 40년6월에 단원 중 이준식을 대장으로 한 6명의 공작대를 산서성으로 파견해 병력 모으기에 나서는 등 활동을 적극화했다.이렇게 특파단을 보내 준비에 착수한 임정은 미국 교포들에게 군사비 지원을 요청했다. 40년2월에 취지 설명과 함께 지원을 당부하는 공문이 미국내국민회에 보내지고, 미국 현지의 교포단체 신문 신한민보에는 성금을 촉구하는 기사가 잇따라 실렸다. 당시 임정이 군대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경비가 나올만한 곳은 미국교포들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때 임정은 중국의 재정 지원을 바랐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이 광복군을 중국군의 일부로 예속시킬 것을 요구해 독자 군대로 하려는 임정과입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실제 광복군이 창설될 때 쓰인 행사 경비 4만원은 모두 미국 교포들이 보낸 것이었으며, 그 뒤 광복군 유지비도 교포들이 보내주는 월1천50달러로 충당됐다.

40년6월에는 중국군에 복무 중이던 이범석 장군도 합류하는 등 창군 준비가 진척돼 9월17일 역사적인 광복군 창립식이 중경의 유명 호텔이던 가릉빈관(가릉빈관)에서 열렸다.

**송미령참석 축하**

광복군 창립은 남의 나라 땅에서 우리 군대를 만드는 것인만큼 중국의 승인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승인 없이 강행됐다. 그런데도 창립식에는 중국의요인들과 주은래 등이 참석해 축하해 줬다. 장개석의 부인인 송미령은 자신이 이끄는 부인 단체 이름으로 축전을 보내고 축하금 10만원을 보내기도 했다.

광복군의 총사령은 이청천장군, 참모장은 이범석장군이었다.이렇게 광복군을 출범시킨 임정은 사령부를 서안에 설치했다. 서안은 중경에서 2천리나 떨어져 서로 연락도 쉽지 않은 곳이지만, 거기가 최전방이고따라서 병력 모집도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광복군은 예하부대도 없고병력 역시 겨우 40여명에불과한 이름만의 군대였다. 우선 사령부를 만든 후 차츰 병력을 늘려 가자는것이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목표는 1년내에 3개 사단을 만드는 것이었다.그런 다음 중국-미국 등의 연합군에 교전 단체로 가입한다는 계산이었다.그 직후 만들어진 예하 부대는 1-2-3지대였다.

1지대는 이미 파견돼 있던 군사특파단이 개조돼 형성됐다. 단장 조성환선생은 군 창립 후 국방장관으로 복귀, 중경으로 돌아가고, 단원이었던 이준식이 지대장이 됐다. 대원은 모두 9명이었다.

2지대는 갓 출범해 서안으로 옮겨간 총사령부 요원들을 중심으로 편성됐다. 총사령 이청천장군 밑에서 만주에서부터 활동하던 공진원(공진원)을 지대장으로 한 6명이 전부였다.

3지대장은 역시 만주 독립군 출신의 김학규였으나,총사령부 일을 겸임했고대원은 없는 형태였다. 그런데도 굳이 3지대를 둔 것은 3개 사단을 만들겠다는 포부의 반영이었다.

이렇게 모두 다 해야 40여명에 불과한 광복군은 지대 운영 보다는 병력 모으기에 더 치중, 실제로는 지대들이 '징모처(징모처)'로 운영됐다. 지대 자체가 한개씩의 징모분처로 활동하고, 그 후 인력이 늘 때마다 분처를 늘려 5개까지 운영하는 것이다.

**통행증 발급않아**

더불어 실제 활동도 41년11월까지는 크게 제약되는 상황이었다. 중국측이승인을 않으면서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는 등 발을 묶는가 하면, 자금도달렸기 때문이었다. 중국측은 41년11월 강제로 광복군의 중국군 편입을 명령하고, 임정은 이를 받아들였었다. 임정으로서는 편의상 그랬던 것이지만, 그이후에야 중국이 광복군에 대해 재정 지원을 하고 활동도 지원해 여건이 나아지는 것이다.

이렇듯 힘들게 역사적 출범을 한 광복군의 성립식장은 중경 가릉강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대구에 신천이 있고 서울에 한강이 있듯이 중경의 강은 가릉강이라고 얘기했었지만, 옛 유명 호텔자리답게 가릉빈관은 가릉강을 굽어보는 명당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흐른 56년의 세월은 어쩔 수 없는 듯, 이 가릉빈관 자리도아파트군이 차지하고 옛 모습은 찾을 길 없었다. 중경시 시중구(시중구) 아령산(아령산) 아령공원 밑 가릉신로(가릉신로)18호 그곳의 아파트는 7층짜리였다.

주민들도 해방전 이곳에 호텔이 있었음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곧바로 아파트지구가 돼 3층 짜리 목조 아파트가 세워졌다가 5년전에 지금의 시멘트 아파트가 건립됐다고 했다.

이곳에서 40년9월17일 열린 성립식은 이날 아침 7시부터 시작됐었다. 당시일본군의 중경 폭격이 워낙 심해 새벽을 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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