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KGB와 나-흐루시초프 우크라이나 편애

흐루시초프시대에 민족문제가 대두됐다.우크라이나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우크라이나인 동료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흐루시초프는 명백히 그들의 편이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서슴없이 표현했다. 공식자리에서조차 수가 놓인 우크라이나 셔츠를 즐겨입거나 우크라이나 속담과 격언을인용했다.

이때 우크라이나는 다른 공화국과는 달리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모스크바와단절된 채 진행됐다. 당시 끼예프나 드네쁘로빼뜨롭스끄를 비롯한 기타 우크라이나 도시들에서 모스크바나 러시아연방으로 인사이동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로 내려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심지어 업무상 파견된 KGB요원이 우크라이나의 비협조로 되돌아오기 일쑤였다.

1957년까지 소연방의 중등학교는 두개의 언어, 즉 러시아어와 소수민족어를 가르쳤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소수민족어를 우대하는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다. 러시아어가 선택과목으로 채택됐으며 일부지역에서는 의무적인 것이아니었다.

이는 심각한 결과를 야기시켰다. 전혀 불필요한 민족 문화 대립 양상이 발생한 것이다. 어떤 나라이든 민족간의 공통어가 있다. 우리나라 역시 다양한민족이 모여 있는 군대나 문학가들 사이에 통용되는 것도 러시아어였다.언젠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에 흐루시초프가 참석했다. 수천명이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였다.(흐루시초프는 일 대신 탁상공론이 오가는그런 대규모 집회를 좋아했다)

이때 누군가가 러시아어로 연설을 시작하자 흐루시초프가 이를 가로막으며고함쳤다. "당신은 우크라이나어를 모르오? 우크라이나에서 일하고 있으면서말이오!"

이 고함소리는 '오랫동안 방치돼온'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흐루시초프는 또 대규모 행사이면 행사일수록 남들을 비난하기 좋아했다.당연히 참석자들은 당위원회의 지도자나 내각들을 공개적으로 질책하는 것에환호를 올렸다.이것을 흐루시초프의 민족주의에 대한 견해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대중영합주의였다.

'냉전'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는 참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몇몇 정치가와 학자들은 이때를 정의가 승리를 얻었고 10월 혁명으로 중단된 러시아의역사가 회복한 시기로 본다.

그러나 이와관련해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같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소연방의 사회주의 체제는 왜 붕괴됐는가?

국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30년대의 테러가 얼마나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던가. 스탈린의 지도하에 개최된 1938년 2-3월의 당중앙위원회총회는 테러를 엄중히 비판한 것으로 보여졌을지 모른다. 만약 스탈린이 이결정을 계속 지켰더라면 국가는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총회의 결정은 공허한 선언에 불과했다.

스탈린에게도 인민들 앞에서 자신의 죄과를 씻을 기회는 있었다. 만약 그가 정치 특사를 선언했더라면 30년대에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죄과를 조금이라도 벗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행하지 않았다. 왜? 오늘날이 문제에 대해 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L·M·까가노비치가 죽기 얼마전 한 인터뷰에서 "물론 누군가 무고하게 고초를 겪을수는 있겠지만 거기에는 어쩔 도리가 없소. 나무를 베자면 부스러기가 튀는 법 아니오"라고 말했다.

스탈린의 주요 원칙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

강인하고 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거느닐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충분하다.

문제는 스탈린이 누군가의 중상을 믿고 오직 그것 때문에 무자비한 탄압정책을 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학자나 예술인, 군사령관이나 당,정 지도자들에 대한 탄압을 그만두지 않았다. 이들은 정직하고 재능있고 조국과스탈린 개인을 위해 희생을 했는데도 말이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하자 다음날 벌써 새로운 중앙위원회 간부회가 소집됐다. 총 10명의간부회는 19차 당대회가 개최되기 전의 정치국원들로 구성됐고 후보위원 4명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간부회는 후에 정치국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당이 경제영역에 손을 뗄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고 오히려 중앙위원회 기구 속에서 공업,운송,농업의 각 분과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경제 분과의 지도부는농촌 지구 위원회에서부터 중앙위원회 기구의 임원들까지 모두 다양한 계급의 당원들이 장악했다

당 지도자는 대중 조직가의 정치활동가로서 자신의 역할을 잊고 전적으로경제 담당자로 변모했다. 모두가한 순간에 옥수수 정방형 파종법 전문가이자 선전가가 됐다. 몇 알의 종자를 한 곳에 모아 일정한 간격으로 뿌렸던 그파종법은 노련한 옥수수 재배자들에게 한낱 비웃음만 자아냈을 뿐이었다.당원들은 항아리를 들고 들판으로 나가 몸소 '진보적' 파종법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와 더불어 군-산 복합체는 인민 경제로부터 돈을 수탈하고가장 유능한 근로자들의 주요 임무를 박탈하면서 나라 안의 거의 모든 지적인 잠재력을 직접 가동시키려 했다.

따라서 '냉전'의 절정기에 당 선전가들의 아주 제한된 인원만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종사했다.

제19차 당대회의 결정은 나라의 앞날에 대한 기대를 심어 주었으나 흐루시초프가 택한 길은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19차 당대회 이후 그런 전망이 예정돼 있었다 하더라도 스탈린은 당의 권위를 다시 세울 기회를 두번이나 놓쳤다. 흐루시초프 역시 그 기회를 이용하지 못했으며, 이번에는 돌이킬 수없는 실수까지 범하고 말았다.

그의 후임자들도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없었고 이는 결국 당과 국가를 붕괴시킨 주요 원인중 하나로 작용했다.

나를 스탈린주의자라고 비난할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그러나 나는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스탈린이 역사 속에 영원히 피의자국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입장이다.

그러나 만약 진실을 말한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국가를 강화시킨 그의 공훈을 깡그리 없앨수는 없다. 역사를 개작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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