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97매일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

"해무-장정옥" 모든 길이 바다로 열린 죽포에도 유일하게 뭍으로 연결된 길이 있다. 사람들은 이 실오라기같은외길을 따라 바다를 건넌다.

준희는 조금 전, 아이를 앞세우고 돌산대교를 건너 죽포에 들어왔다.

뒷동산엔 동백이 붉디붉은 꽃을 피우고 꺼멓게 덮인 먹장구름 한켠에 쪽빛 하늘이 너울처럼 일렁인다. 통치마를 입은 여인들은 검은 빛을 띤 돌에 퍼질러 앉아 그물을 뜯는다. 바닷바람에 새까맣게 그을린 아이들은 날이 저물도록 고무줄 놀이와 땅따먹기에 열중해 있다.

날마다 벽에 걸어두고 보아온 달력 속 풍경같은 모습을 준희는 담벼락에 팔을 괴고 서서 오랫동안 바라본다. 마치 그걸 보기위해 먼길을 온것처럼.

머리에 수건을 쓴 아낙은 날이 끄무레해서야 한 소쿠리 가득 넘실대는 봄동을 이고 문간을 들어선다. 아낙은 소쿠리를 받아내리는 준희를 향해 갓 뽑은 봄동처럼 푸른 웃음을 짓는다."먼데서 오신 손님을 이래 지달리게 해서 미안혀요. 허던 일을 냅두고 올 수가 없었구먼이라""미처 연락도 못드리고 불쑥 나타나서 놀라셨죠. 제 사정이…워낙 급했거든요""참말 야가 종구아들이란 말인겨? 갸가 늙은 즈 엄니 팽개치고 객지로 내뺀지가 원젠데 시상에이런일도 있소. 행적도 모르는 아부지는 나타나덜 않고 ?금없이 눈이 새카만 아들만 뽈뽈 걸어서올까잉"

"수영이아빠를 아시는 분이 헛걸음하는 셈치고 죽포로 가보라고 했어요. 어쩌면 할머니나 다른연고자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요"

"종구 엄니는 시들시들 앓다가 폴세 작년 이맘때 죽었지라. 자석이란 거이 즈 엄니가 죽으이 알기를 허나, 배라 먹을 놈으 인간. 어느 친척이, 지 입 살기도 바쁜 오지에서 쟈 맡어 키울 사람이워디 있겠어라. 나이 열댓마 넘기믄 너나없이 입벌이 하러 대처로 나가잖여"

갯바람에 그을려 반질거리는 아낙의 까만 얼굴이 아이를 물끄러미 본다. 지금껏 잊고 있던 근심덩어리를 대한 듯 난감한 얼굴에 갯가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엿보인다. 손가락에 온통 굳은 살이박히도록 그물을 뜯고 허리 뚝 끊어지도록 갯벌에 엎디어 바지락을 캐도 찌들린 살림은 늘 그만그만하고…그렇게 한참동안 근심덩어리를 뜯어보던 눈을 거두고 아낙은 잠자코 봄동을 다듬기 시작한다.

준희는 갑자기 말을 잃어버린 아낙을 두고 담벼락에 턱을 괸다. 담 높이가 하필이면 팔을 올려턱을 괴면 알맞은 높이다. 흙담에서 피어오르는 흙냄새와 코에 익숙지 않은 갯비린내가 바람결에뭉클 진하게 스며온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창백한 날개를 저어 눈앞을지나간다. 이제 준희는 더 이상 바다를 보지않고 나비의 뒤만 쫓는다. 흙담 위에 핀 풀에 앉았다가 담 밑의 갯꽃에 나풀 옮겨앉는다.

예전 어느날, 어린 소녀는 연한 배추잎에 붙어있던 애벌레의 등에 작은 날개를 달아주었지. 그러자 애벌레는 종이날개를 저어 정말 날았어. 그녀는 뒷동산에 훨훨 날아가는 흰나비를 보다 왈칵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다시 바다로 눈을 돌린다.

수영이 할머니가 죽었다. 더 이상 수영이를 맡길만한 연고가 없다. 준희는 아낙의 말을 되씹는 동안에도 쉬지않고 마음이 쩍쩍 갈라지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논바닥처럼 갈라진 마음이 묻는다. '이제 어떡하니! 끈질기게 매달려오는 저 굵은 매듭을'.

"무신 일로 저 어린 것을 내팽기치고 갔는지 모르것소만 설마하니 즈 새끼 가르치는 선생한테 얼라를 맡놓고 영영 안나타나기야 하겠어라 저도 사람인데. 천하없어도 새끼 내버리고는 절대로 멀리 못가게 돼있구먼이라. 그거이 에미 심정이니깨. 종구놈도 어데서 뒈지지 않았으므… 즈 엄니뼈가 묻힌 땅덩어리 영영 발 끊지는 못할겨. 배라 먹을 놈. 정이 안나타나면야 워쩌남요 엇다 갖다 맡겨부러야제".

또 다시 어른의 얼굴을 한 아이들로 가득찬 그곳에다 수영이를 밀어넣으라고? 퍼렇게 멍든 가슴으로 날마다 기다림에 목이 휘다 마침내 눈물까지 말라 마른 잎새처럼 바삭거리게 하라고. 준희는 뿌옇게 시야가 흐려져 눈을 씀벅거린다.

영원히 삭여지지 않는 멍자욱같은 얘기, 차마 시려서 가슴에다 재워둘 수밖에 없는 그런 얘기를그녀도 알고 있다. 그녀는 가슴 한켠에 밀쳐둔 묵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집어든다.'하얀 들꽃을 한움큼 꺾어쥔 여자아이가 와 쏟아지는 햇빛 속에 앉아 있었지. 소녀는 날마다 하얗게 비어있는 길을 보며 누군가를 기다렸어. 기다림에 지친 소녀는 흙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곤 했어. 얼굴에 검버섯이 가득한 할머니가 흔들어 깨울때까지 그렇게.

-야가 또 예서 자고 있네. 준희야, 집에 가서 자자 이러다 더위 먹을라. 넓은 대청마루 다 놔두고와 어린 것이 청승스레 맨날 문간에 쪼그리고 앉아 이러노. 에구 가여운 내 새끼!할머니는 거북이 등껍질같은 손으로 소녀의 이마에 솟은 땀방울을 닦아내며 무겁게 혀를 차곤 했지. 할머니는 시든 들꽃을 쥔 소녀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며 원피스 자락에 묻은 흙을 털어주셨어.멀리 삼각터널을 이룬 버드나무 가로수에선 하루종일 귀가 쨍쨍하도록 매미가 울어제쳤고…''할머니!'준희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리움을 누르고 바람에 너풀거리던 종이꽃과 구슬픈 상두가를 생각한다. 미처 가슴에 묻지 못한 씨톨 하나가 맘에 걸려 끝내 눈도 감지 못한 서러운 삶만큼초라했던 상여였다.

먼바다 쪽엔 먹구름이 밀려나며 점차 하늘이 개고 있다. 햇살 한 쪽이 물결 위로 나붓이 떠다닌다. 얇게 포를 뜬 물살은 쉼없이 갯가를 핥아댄다.

아이는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입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으며 주먹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쓱 문질러 닦는다. 먼길을 시달려 오는 동안 솜털 켜켜이 앉은 먼지로 땟국이 짜르르 흐른다.

분실물 보따리처럼 수용시설에 끼여 있을 때는 한가롭고 자연스런 저 얼굴이 아니었다. 눈치 빠르게 변화에 대한 조짐을 강하게 느낀, 바로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짐승의 얼굴이었다. 마음 속에인간을 향한 적개심이 터를 잡아버린 아이들에게서 동심의 영역을 잃어가는 자신의 자화상을 미리 봐버린 것일까. 아동수용소가 지닌 외로움의 색채는 아이의 본능으로 하여금 필사적인 노력으로 상황에 저항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준희가 돌아서서 문턱을 넘기도 전에 치마끝을 잡고 자지러졌다.

지금,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꾸벅꾸벅 졸고있다. 아낙은 나물 다듬던 손을 멈추고 얼른 방으로 들어가 베개와 얇은 이불을 가져온다. 아이는 낯선 이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잠을 깨고 준희를 찾는다. 준희는 깔린 이불 한자락을 당겨 아이의 배를 덮어주고 가만가만 토닥여준다."걱정말고 한숨 푹 자 수영아, 선생님 아무데도 안갈테니까"

그제서야 아이는 졸음에 겨운 눈을 감고 고른 숨을 쉰다.

그래! 떠나는 사람은 언제나 버림받는 사람이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짓말을 꾸며댔지. 버림받는 이는 거짓 희망이지만 믿어본다, 일단은….

준희는 말없이 잠든 아이를 내려다 보고 서 있는 아낙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볕에 닳은 피부에굵은 주름이 성글게 잡혀있다. 잠시도 바다곁을 떠나본 적 없지만 늘 떠나고 싶었더란다. 바다는사람이 믿고 살기에 너무 버거운 상대란다.

가벼운 해풍이 불어온다. 끈끈한 머리칼이 모래톱에 버려진 가발처럼 뒤로 휘휘 날린다. 그녀는자기것 같지 않은 머리칼을 손가락 빗으로 빗어내린다. 머리칼에서 바스락거리며 소금이 묻어나는 듯 하다. 비누냄새 나는 머리를 털어 말리고 까슬까슬한 속옷을 갈아입었으면, 그런 다음 두툼한 요를 깔고 홀가분한 자세로 낮잠을 자고…. 준희는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정말 그렇게 푹 잠들고 싶어진다.

가시에 찔린 듯 눈이 따끔거려서 잠들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부터 아이의 존재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황사현상처럼 부옇게 흐린 공단의 새벽, 볼이 발갛게 언 채로 종일 골목어귀에내동댕이쳐진 아이들, 수영이는 준희에게 그런 삽화같은 정경들을 일깨워주었다. 준희는 또 다시아이가 풀기 어려운 마디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만 그 마디에서 생각이 멈춰 더이상 나아가지를 않았다.

그건 처음부터 무모한 시도였다. 추운 겨울 밤, 술 취한 아비가 무등 태운 아이와 한 덩어리가 되어 땅바닥에 나동그러졌다. 아이가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우는데도 아비는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제 몸도 못가누었다. 반은 봉사하는 심정으로 도시의 마지막 달동네에 놀이방 간판을 걸었다. 그날쌔게 돌아가는 피댓줄에 옷자락이 감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감히 세상의 거죽이 채 살갗에닿기도 전에 선뜻 손을 내밀다니 어떻게 그런 무모한 행위를.

'한가람 놀이방'.

준희는 자신이 떠나온 도시를 생각하듯 다소 무시무시한 느낌을 가지고 굵은 고딕체의 글귀를 떠올린다. 문을 열 때마다 맞부딪혀 맑은 종소리를 내는 금속모빌과 벽마다 붙은 그림과 귀여운 동물들, 참! 그렇지, 그 가운데는 아직 생명을 가진 동물도 있었지. 물도 갈고 모이도 다시 채워줘야하는데…. 근 보름 전부터 산란기를 보이던 호금조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그래서 얼추 비슷한 시기에 산란의 기미를 보이던 십자매의 둥지에 채란한 호금조의 알을 세개 넣어두었다. 새 중에도생리적인 욕구는 가졌으되 종족보존을 위한 기본욕구가 다소 결여된 종자가 있었다. 금정조나 호금조, 소문조등 깃털이 이쁘긴 하지만 번식엔 거의 무책임한 종자들을 대신하여 곧잘 가모로 선택되는 새가 바로 십자매였다. 가격이 싸고 번식력도 강하지만 남의 알도 서슴지않고 품는 끈끈한 본능이 늘 남의 새끼를 품게 만드는 줄 모르는 바보같은 새이기도 하다. 그 바보들은 모이가떨어져도 암수가 번갈아 둥지를 드나들며 남의 알 품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처음 밝은 창가에다 새장을 걸고 토끼를 그리고 사슴과 기린을 오려 붙일 땐 그래도 꿈이 있었다. 작지만 어디든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그러나 지금 준희는 미처 잠에서 화들짝 깨기도전에 모두가 다 악몽이었으면 하는 것처럼 자신이 판함정의 깊이를 실감했다. 피해의식이 강한사람은 남에게 베풀어줄 넉넉한 사랑이 결여되기 십상이다. 지금껏 그걸 깨닫지 못했다. 준희는자신에게 결여된 그 사랑에 새삼스레 목이 마르다.

치맛자락을 단단히 걸머지고 놓치않으려던 아이가 그토록 몸서리치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아이는 겨우 놀이방 선생님일 뿐인 그녀를 마지막 동아줄 쯤으로 여긴 것이 분명했다. 자지러지게 우는 것으로 과감하게 운명에 맞서는 어린 강단에 기가질려 별다른 대책없이 도로 데려와버렸다.진드기처럼 한 번 늘어붙으면 평생을 두고 따라다닐 흉터처럼 느껴졌지만 아이의 완강한 손은 좀처럼 준희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 땀이 다 솟았다. 결국 아이는 작은 배낭을 메고 활기차게 놀이방으로 돌아왔다. 준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더 이상 우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활달해서 마음이 조마조마할 지경이었다. 장난감으로 친구를 때려 울리기 예사고 앙다문 이빨자국이 성하도록 팔뚝을 물어놓기도했다. 얼굴이 새파래져서 따지러 온 학부형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고 또 숙이고. 창가에 매달아놓은 새장에 장난감을 던져 새장이 와당탕 떨어지던 날 처음으로 매를 들었다.-수영아, 약한 동물을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라고 했지.

-자꾸 시끄럽게 울어요.

-그건 우는 게 아니고 즐거워서 지저귀는 거야.

-그래도 듣기싫어요.

-전엔 이러지 않았잖아.

-엄마한테 보내주셔요. 엄마! 다섯밤 자면 온다고 해놓고 순 거짓말쟁이야.

아이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왕왕 터뜨렸다.

-울지마 수영아. 선생님이 내일 바다 구경 시켜줄께.

바다라는 말에 아이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역을 향하는 아이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준희는 늘상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조리던 어머니를생각했다. 미움의 근원을 애써 거부하려 들지말고 그것이 바로 내 부처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라던말을 마치 반찬을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다는 식으로 들려주시던 분이셨다. 왜 절 주워다 키우셨어요? 저 말고도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요. 참 못된 소리도 한다. 안 한 번도 널 주워다 길렀다고생각해본 적 없다. 그래도 귀찮았던 적 많았을 것 아녜요. 대학까지 시켜주시고…. 그 은혜 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손때에 절어 반질거리는 굵은 염주알이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빠르게 굴렀다. 뭐 섭섭했던 게 있었나 보구나. 그렇다고 에미마음 이렇게 할퀴는 거 아니다. 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

흰 선이 일직선으로 그어진 멍게 양식장을 지나 느릿느릿 배가 들어온다. 어부는 뱃전에서 천천히 노를 젓고 있다. 그는 바다에 일직선으로 뜬 흰공을 들어보고 놓고 하는 일을 반복한다. 귀여운 아기를 들여다보듯 울퉁불퉁한 멍게가 날마다 얼마큼 자랐나 보고싶은 거겠지라고 생각하며잔잔한 물결의 움직임에 가만히 몸을 맡긴 작은 배를 신통하게 여긴다. 바다의 거칠고 포악한 기질에 망가지지 않고 꿈쩍없이 견디다니 참 용하기도 하지. 바다는 아주 먼곳에서부터 밀고 온 파도를 기슭에다 착착 접어놓는다. 밀려온 파도는 사람의 훈기를 가득 들이마시고 다시 왔던 곳으로 나아가고. 순환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다소 불리하게 느껴질망정 참고 받아들일 자세만 갖춘다면 아무런 무리가 없다. 언제나 나쁜 상황일수록 상반된 개념을 허용치 않는 습성이 있다. 이미거센 흐름의 물살을 따르기 시작한 기류는 좀처럼 방향을 틀어잡기 어렵다. 준희는 그냥 그 흐름의 물살에 모든 것을 맡겨두고 자신조차 그 속에 융화되어 함께 흐르고 싶어진다.'내마음의 부처! 부처!'

미움의 대상을 향하여 허리가 끊어지라고 절을 하며 마음을 닦는다던가. 그게 어머니가 자신을다루어가는 방식이라면 저 매듭은 무엇으로 풀어야만 할까. 살아가는 일이 곧 자신이 진 빚을 갚는 과정이라면 지금껏 시린 가슴으로 안고 온 그 긴 배반의 세월은 도대체 무엇인가.준희는 자고 있는 아이를 버려두고 뒷산 언덕배기로 향한다. 한걸음 한걸음 묵직한 돌을 메단 듯한 다리를 힘겹게 들어올리며 오솔길을 따라 걷는다. 저만치 등뒤에서 토닥토닥 뛰어오는 소리가들리지만 못들은 척한다. 어느새 잠이 깨어 헐레벌떡 뛰어온 아이는 잠자코 준희의 뒤를 따르며가쁜 숨을 몰아쉰다. 선뜻 달려들지 못하고 꼭 그래야한다고 일부러 누가 가르친 것처럼 반가움과 안도감을 감추고 슬금슬금 뒤를 따르는 여섯살의 조숙함이 참을 수 없도록 화가 난다. 왜 아이가 아이답지 못하고 저 나이에 벌써 애늙은이 흉내를 내는가 싶더니 기여코 눈물을 끌어내고야만다.

준희는 함초롬히 피어난 들꽃을 왁살스럽게 밟으며 잰걸음으로 올라간다. 토닥토닥 뒤따르는 발소리도 덩달아 빨라진다. 아이의 무게가 발치에 묵직하니 매달린다. 흘낏 뒤돌아보지만 아이는 저만치 뚝 떨어져 있을 뿐이다. 종종 걸음으로 따르다 그녀가 휙 돌아보자 아이는 불에 덴듯 움찔몸을 오그려 멎는다.

작은 동산 전체가 해장죽과 동백으로 덮혀 있다. 검은 윤기가 반들거리는 동백잎사이에 붉은 꽃이 햇살처럼 걸려 있다. 추운 겨울내 안으로 삭여온 눈물과 한숨이 만들어낸 서러운 꽃송이들. 준희는 꽃을 보던 눈을 감고 눈꺼풀을 살며시 누른다. 눈이 따끔거려 자꾸만 눈물이 난다. 방목한소는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나른나른 졸고 풀밭 여기저기 부스름 딱지처럼 소똥이 꾸덕꾸덕 마른다. 그 곁에 역시 부스럼딱지같은 묘 하나가 엉성한 떼 사이로 붉은 흙을 드러낸 채 엎드려 있다.준희는 어림 짐작으로 혹시 저 붉은 묘가 동네 뒷산에 묻었다던 아이의 할머니묘가 아닐까 슬몃짚어본다. 어쨌거나 산사람의 기억속에서 희미해져가는 건 죽은 자의 운명이다. 그녀는 그대로 지나쳐 바닷가에 임한 넓적한 바위 위에 걸터앉는다. 아이는 금세 여섯살로 돌아가 묏등을 타넘으며 망아지처럼 풀밭을 뛰어다닌다. 아이에겐 '죽은 누구누구의 묘'라는 개념이 없다. 묘도 나무나돌과 다름없는 자연의 부속물일 따름이다. 아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전 사람의 상태 따위에관심이 없듯 죽은 후의 상태에도 역시 관심이 없다. 놀이터 삼아 묏등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만드는 그런 무구함이 비로소 수영이를 아이같아 보이게 한다. 아스라이 내려다 보이는 벼랑가 포석위로 허연 포말이 미끄러져 내리고 파도에 쓸린 돌이 연신자그락 자그락 몸을 부딪는다. 이젠 해가 녹는 시간이다. 먹구름이 말끔히 갠 하늘가로 서서히 어스름히 깔리고 석양이 바닷물에 발갛게 녹아든다.

수영이는 날마다 속옷과 겉옷, 양말, 손수건등이 각각 한벌씩 든 노란 헝겊배낭을 메고 왔었다.등짐처럼 지워진 배낭은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의 등에 붙어다녔다. '텅텅텅텅'매일 아침 일곱시십분 전이면 셔터가 통째로 흔들렸다. 잠이 설깬 아이는 준희가 채 문을 따기도 전에 종종 걸음으로 통근차를 타러 가버린 엄마를 목이 휘도록 돌아보고 있었다. 언제나 '선생님 우리 아이 부탁합니다'라는 소리보다 조급하게 떼어놓는 발소리가 먼저 들려오곤 했다. 준희에게 수영이엄마의 이미지는 그 조급한 발소리로 남아 있다. 아이가 목이 휘게 돌아보던 뒷덜미마냥 서글프게.'색깔도둑이 색깔을 모두 훔쳐가 버렸어요. 빨간색아, 들어가라 하니까 세상의 모든 빨간색이 색깔도둑이 가지고 있는 긴 자루 속으로 사라져 버렸어요. 이번엔 주홍색아, 들어가라 하니까 귤에서 주홍색이 빠져나갔어요. 귀여운 병아리가 노란 옷을 잃어버리고 바다가 남색을 잃었어요. 큰일났죠? 자루 속에 들어간 모든 색깔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색깔도둑은 남몰래 자루를 살며시 열었어요. 그랬더니 어머나! 자루 속의 색깔들이 모여 아름다운 무지개가 되었어요. 이쁘겠죠. 하늘높이 걸린 무지개 본 사람 손들어 보셔요.'

아이는 짧은 동화를 다 읽을 때까지 자리에 앉지 않고 뒤에 멀뚱히 서 있었다. 세상을 한 꺼풀이에 세상을 향하여 경계심을 갖다니, 커다란 눈망울에 유난히 흰 창이 맑은 아이가. 준희는 아이의 눈을 통하여 무지개를 알기 전에 소외감을 먼저 알아버린 인간의 고독한 연민을 보았다. 비슷한 부류끼리는 어디에 섞어 놓아도 용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원래 저렇게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봐요?

-소심해서 그럴 거예요. 늘 혼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눈치만 늘었나봐요. 진작에 이런델 보내서다른 애들과 어울리게 해줬어야 했는데….

-아빠가 수영이와 잘 놀아주지 않나요? 죄송해요. 남의 가정사를 속속들이 알자는 건 아니고 아이를 맡는 이상 어느 정도 사정을 알아두는 것이 아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요.-그 사람은 역마살이 끼여서 한군데 진득이 붙어 있으면 수명장수 못한대요. 점쟁이 말마따나 어느날 자고나면 휑하니 가버리고 없어요. 그러다 지칠만하면 상거지꼴로 돌아오고. 다니다 싫증나면 돌아오겠죠, 뭐. 지 새끼 이만큼 큰 것 보고 갔으니까.

여자는 애잔한 눈길로 새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아이의 뒤꼭지를 쓸고 또 쓸었다. 심경의 골골에슬은 녹찌꺼기인양 시름이 뚝뚝 돋아났다. 준희는 촛불처럼 일렁이던 여자의 눈길을 가끔 생각했다. 그 심성으로 자식을 버리고 어떻게 생명을 이어갈까 싶어서 그 눈이 생각날 적마다 마음이쓰렸다. 가끔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솟구칠 때는 목욕탕에 들어가서 센 물살에 눈물을 흘려보내며,가슴에 둥근 공동을 파고 그 속에 자신의 생명을 묻으며 영영 그렇게 세월따라 흘러가려는 걸까.정말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아낙은 굳은살이 박힌 손으로 아이의 둥근 볼을 쓰다듬는다.

"아가, 니 이름이 뭣이여?"

"수영이요. 이 수영"

"그려어, 이름 참 좋다. 너 바다 첨 봤어?"

"그렇지만 우리 아빤 날마다 배 타는데요"

"그럼 돈 많이 벌어오고 참말로 좋것네잉"

먼바다로 나간 아비얘기에 뜻하지 않게 향수를 느낀 탓일까. 아이는 말을 잊고 큰눈을 반짝 거리며 아낙을 빤히 올려다본다.

"모두 바다를 버리고 훌훌 떠났지만 결국은 되돌아왔지라. 아매 너 아부지도 바다에서 자란 천성을 못버리고 배 탔을겨. 그렇지만 널 보고잡으서도 너 아부지는 꼭 돌아올거랑께"아낙은 아이를 톡톡 두드려 재웠다. 돌아올까, 정말 돌아올까? 준희는 그 말이 얼마나 막연하게들리는지 아느냐고 되묻고 싶은 걸 꾹 눌러 참는다.

"수영이 두고 갈께요. 생판 낯선 사람들에 섞여 살기보담 그래도 아빠 고향이 훨씬 낫지 않겠어요?"

"난 아그 키아낼 자신 없으라"

"그럼 어떡해요. 그렇다고 이 어린 것을 두 번씩이나 아동수용소에 보낼 수도 없고요. 전 차마 그짓 못해요"

"나가 대체 얄 우찌게 감당하믄 좋을지 잘 모르것소잉. 한 며 칠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거이 좋것구먼이라"

아낙은 못에 걸린 수건을 벗겨들고 나간다. 열린 문틈으로 캄캄한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후철커덕철커덕 펌프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펌프는 뱃속에서 끌어올린 물을 왈칵왈칵 뱉어낼 것이다. 답답한 속을 찬물로 식히는 중일까. 아낙은 오랫동안 방으로 들어오지 않는다.날마다 아이들은 버려지는 연습을 한다.

수출된 고아들이 장성하여 속속 귀국하고 있지만 이미 그들은 본래의 자기 말을 잊고 오기 십상이다. 숫자도 가늠하기 어려운 부모 있는 아이들이 참사람 실현에 몸이 닳아빠지는 이들의 손에서 자라고 족보잃은 아이들이 짐짝처럼 비행기에 실려 수출되고…. 우리는 이미 그런 일에 무감해진지 오래인 세상을 살고 있다. 오늘도 여전히 역전 대합실에, 보육원 문전에, 혹은 거칠기 이를데없는 세상의 자갈밭에 아이가 버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버려진 아이는 어떻게든 살아낸다. 사람들은 남의 손에 넘겨지는 그 순간에 아이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여명이 창가로 엷게 퍼질 무렵 셔터가 마구 흔들렸다. 다른 날보다 특별히 더 세게 두드리는 것도 아닌데 철렁철렁 흔들리는 소리가 그날은 몹시 귀에 거슬렸었다. 어딘가 애절하면서도 간절한기원이 담긴 듯 떨리는 목소리까지 달리 느껴지던 아침이었다. '선생님, 우리 수영이 좀 부탁드릴께요.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일 갔다 올께요' 다른 날보다 일찍 새벽잠을 깨운 것이 그렇게 죄송한 일이 되는지 그 여자, 수영이 엄마는 죄송하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했다. 그것도 정말이란 수식어까지 붙여서.

그 목소리에서 어떤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그렇지만 준희는 그렇게 무방비한 상태에서 아이가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은 짐작도 못했다. 아무리 절박한 심정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실마리,이를테면 언제고 다시 돌아오리란 희망쯤은 남겨둘 줄 알았다. 설사 그 길이 영영 떠나는 것이될지언정. 그건 자식을 버리는 어미가버림받는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애정이다. 때때로 버림받은 자식은 그 희망으로 인하여 자신을 지탱한다. 적어도 어미가 떠난 자리를 보고 아이가 절망을 느끼게 만들지는 말아야 했다.

그날 아이는 종일 서럽게 울었다. 한나절을 울어제친 수영이는 밤이되자 겨우 그친 울음을 또 훌쩍거렸다. 울다 자다 간혹 잠결에 울음을 흘리는 아이를 보며 준희는 부질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 '제발 이쯤에서…'라는 생각만 했었다. 이미 버림받아본 사람은 그 빈자리에 감도는 냉기로황황히 떠난 사람이 비맞은 새 꼴로 다시 돌아오리란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바람인지 알고 있다.그렇지만 그들은 기다리는 일을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좀처럼 울음이 가시지 않는 아이를 안고기억에도 아득한 그 어느날처럼 또 기다렸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날마다 수영이는 훌쩍거렸다. 난데없이 색깔을 잃어버린 세상과 맞부닥친 아이는 겨우 잠재워 둔 준희의 가슴을 골골이 헤집으며 그 지독한 경험을 익혀갔다. 슬픔이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금세 무감해지겠지만 반쪽 세상을 잃은 그 경험만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준희는 바위덩어리가 굴러 떨어져도 결코 바닥에 닿는 일이 없는 상실의 깊이를 새삼 가늠해 보았다.

무채색의 암울한 삶을 예감한 아이는 밤새 준희의 앙가슴으로 작은 손을 밀어넣었다. 그녀는 눈물자욱이 남은 아이의 동그란 뺨을 만지며 폭닥하게 먼지가 이는 묵은 일기장을 들추었다.'소녀는 마루에 가만히 엎디어 연두색 잎사귀에 붙은 애벌레를 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지. 애벌레는 어디론가 열심히 기어가고 있었어. 아무리 기어도 푸석하게 먼지가 이는 척박한 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데도 쉼없이 꿈틀거렸어. 간혹 천둥처럼 지나치는 발 소리와 자동차 소리에몸을 움츠리면서도 애벌레는 움직이는 것을 그만둘 줄 몰랐어. 보다못해 소녀는 애벌레에게 나비처럼 고운 날개를 달아주기로 했지. 날개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소녀는 조그맣게 색종이를 오려 애벌레의 작은 몸에 달아주었어. 그랬더니 정말 애벌레는 종이 날개를 훨훨 저어 날아올랐어. 그것 봐. 누구나 날 수 있다니까. 이젠 어디든 갈 수 있을 거야. 소녀는 설핏 잠에서 깼다가 다시 혼곤히 잠들었어. 종이날개를 단 애벌레는 어딘가로 날아가 영영 보이지 않았어.

그날 밤, 할머니는 긴 한숨을 뱉으며 밤을 지샜어. 신음처럼 몹시도 고통스럽게 뱉으며…'준희는 아이가 잠든 곁에 새우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다. 희부옇게 날이 밝아올때 쯤 살며시 몸을일으킨다. 발로 차낸 이불 자락을 당겨 아이의 배에 덮어주고 한참 그 얼굴을 내려다본다. 불현듯치통처럼 가슴 한자락을 베고 지나가는 싸아한 통증을 느낀다. 이건 예기치 못한 반향이다. '떠나는 사람도 그냥 떠나진 못했겠구나. 가벼운 몸무게 때문에 너무나 쉽게 훌훌 떠나버릴 것처럼보이더니 그렇지를 못했어. 자꾸 마음에 밟혀오는 어둔 구석때문에 뒤로 목이 휘어져서 한없이발걸음이 무거웠겠구나' 준희는 비로소 아주 오랜 그 때, 소녀를 재워두고 황망히 떠난 여인의 모습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절인내 나는 옷을 윗목에다 밀쳐두고 곤하게 잠든 아낙은 긴 밤 동안에 한번도 깨지 않았다. 구멍이 쑹쑹 뚫린 문살 너머로 물결이 쉴새없이 찰싹거렸다. 밤새 엎치락뒤치락 하며 준희는 줄곧둥지에 엎드려 있을 십자매를 생각했다. 모이통에 껍질이 수북한 걸 보고도 그냥 집을 나와버렸다. 지금쯤 껍질 속에 머리를 박고 살기위하여 필사적으로 애쓸 것이다. 몹시 배가 고플땐 하다못해 알이라도 깨어먹고 목숨을 부지하면 좋으련만 그 끔찍한 본능이 과연 그런 일탈을 허용하기나할는지.

텅빈 바다위에 새벽달이 기울고 있지 않을까. 묵직한 머리만큼 무거운 몸을 일으켜 마당에 내려선다. 마당귀를 가득 채운 이 눅진한 공기, 아! 안개였구나. 태양이 뜨면 엷게 흐려져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질 터인데 언제나 아무도 보는 사람없는 틈을 타 이슬처럼 또는 는개처럼 촉촉이 이렇게 오는구나. 검은 바다에서 피어오른 귀기서린 꽃구름이 온통 준희를 휩싸고 돈다. 그녀는 적요속에 후줄근히 서서 자욱이 밀려드는 안개를 마신다. 숨을 깊게 쉴적마다 짙은 갯내음이 폐부깊숙이까지 넘나든다. 이처럼 생목이 아리도록 비린 안개는 처음이다. 그녀는 비린안개 때문에 눈아낙과 아이는 마주 껴안고 서로의 잠든 얼굴에다 푸푸 입김을 내뿜는다. 인간의 정이 그리운 사람들은 잠결에도 사람의 살을 맞대고 싶은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준희는 마치 피붙이를 대한듯뭉클하게 가슴을 적셔오는 뜨거움을 느낀다. 잠결에 껴안아줄줄 아는 따사로움이면 아이를 키워낼 수 있을지 몰라. 무심코 하는 행동이란 언제나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인간 본연의 정에서 우러난 마음이다. 저 마음이면 결코 아이를 도로 버리진 않을 거야.

"니놈이 달고 온 상판대긴 그대로 살아있는 이씨 집안 족보랑께. 부리부리한 눈하며 네모로 깎은거튼 이마빼기, 영락없는 니 아부지 얼굴인겨. 그랑께 씨도둑질은 못한다고 했제"살며시 바람이 불자 안개가 구름처럼 흐른다. 짙은 안개에 가려 수면이 보이지 않던 바다가 서서히 깨어난다. 안개에 묻힌 바다는 야성을 잠재우고 뜨거운 해를 품는다. 언덕위에서 해장죽이 바람결에 마른 몸을 비비며 부르르 떨고 동백은 눅진한 안개의 힘으로 마지막 봉오리를 터뜨린다.부두에 매인 고깃배는 연한 물살에 채여 가만가만 일렁인다. 저만치 먼바다에서 오징어배가 암갈색 바다를 환히 비추며 들어오고 있다. 준희는 오징어배의 환한 불빛을 따라 천천히 흐르는 안개를 본다. 그리고 바다가 품은 해의 태동을 느낀다.

준희는 다시 한번 방쪽을 돌아본 후 가방을 움켜쥐고 몸을 돌린다.

인생이 한바퀴 뒤집혀도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엔 어쩌면 아주 잊을 희망이 있는 전환기의 나이 여섯살. 그러나 준희는 여섯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준희는 죽포를떠남으로써 자신의 서럽던 여섯살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다. 더이상 춥고 시리기만 하던 그 여섯살이 무겁게 엉켜오는 것을 참고 견딜 이유가 없다.

세 밤만 자면 정말 할머니가 데리러 올줄 알았었다. 날마다 하얗게 비어있는 길을 보며 엄마를기다리던 것처럼 할머니를 기다렸다. 보육원 담장에 붙어서서 기다린 사흘이 세번, 또 세번이 지나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청송할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와 소녀를 데리고 갔다. 문간을 들어서며 벌써 반가움에 울음보가 터져 '할머니! 할머니!' 크게 불러댔다. 그런데 할머니는 숱한 원망과 슬픔을 바리바리 쌓아둔채 상두가소리와 초라한 상여로 준희를 맞이했다. 무덤가에 핀 들꽃같은 그리움과 푹 삭은 한숨을 등짐처럼 지고 간 외롭고 삭막한 인생! 그토록 쉽게갈거면 끝까지 곁에 두기나 하지 왜 어설픈 종이날개 따위를달아줘서 세상을 믿지 못하게 했을까. 할머니를 절대로 용서않겠다고 무섭게 다짐했던 여섯살이었다.

이제부턴 잊을 게 많다. 준희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듯이 헤아려 나간다. 때묻은 인형을 껴안고찢어진 치마폭 사이로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거리를 배회하는 여인의 머리에 꽂힌 꽃송이를. 또는 가식적인 웃음을 흘리며 새로 만난 남자의 가슴팍으로 기어드는 의혹에 찬 눈빛들을…. 우선자신의 생명을 파묻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만의 무덤과 차마 눈을 감고 죽지 못한 할머니의 애달픈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러운 여섯살의 기억을 버려두고 황급히 달아나는 사람은.준희는 갑자기 가벼워진 등짝이 미심쩍어서 자꾸만 휘청거린다. 뜻밖에도 무게의 중심이 흔들리며 허방을 짚듯 자꾸만 발이 헛놓인다. 끝내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던 여섯살이 저만치 안개 속에 묻힌다. 이제 다 끝났어! 정말 이젠 다 끝난 거야! 준희는 더딘 걸음을 재촉한다.이른 새벽, 갈매기가 낡은 뱃전을 기웃거리고 늙은 어부는 어깨에 그물을 메고 바다를 향한다.모든 길이 바다로 열려 있고 한시도 바다를 떠나서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 실오라기같은 길이 있다. 사람들은 이 외길을 따라 외발로 길을 걷는다.

준희는 이슬비처럼 번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안개에 싸인 돌산대교에 발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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