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97매일신춘문예-시 당선작

의자·계단·창문

낡고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그녀는 창 밖을 건너다 보며

태양의 느린 걸음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지겨워, 라는 중얼거림이

하루종일 구름 몇 송이로 떠 다녔다

암수 붙어 해롱대며 날아가는 잠자리들이

엑스트라처럼 그녀의 창문을 지나갔다

은빛 날개 번쩍이며 하늘의 전령사라도 되는 듯

비행기 한 대가 바쁘게 비명 내지르며 달려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은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떠나가는 뒷모습처럼

하늘 깊숙이 점점이 침몰해갔다

모든 것들, 그렇게 아무 일 아닌 듯 그녀의 창문을 다녀갔지만

그녀의 창문 같은 수많은 창문들을 지나 발랄하게 제 갈 길 떠나겠지만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할 키 큰 나무 한 그루,

사랑이란... 그 끔찍하게 지겨운 기다림?

지겹고도 지겹게 그녀는 그 곳에 앉아 있었다

마치 못박혀 있는 듯, 정물처럼

어쩔 수 없이!

키 큰 나무,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줄 때까지

〈내 몸 속의 무수한 계단들, 하늘이 날 부르면

난 매일 휘파람 불며 그 계단들 오르며 내 얼굴을 버리지

내 몸의 창문들, 그 수만 개의 이파리들 활짝 열면

바람과 햇빛들 놀러와 나를 투명하게 반짝여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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