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상상이 그리는 무한의 세상-만화

저녁밥이 다 식도록 나타나지 않는 아이. 어머니는 놀이터, 전자오락실을 돌아 만화방 미닫이를열어젖히곤 했다. 수북이 쌓인 만화책 더미와 주인 아주머니에게 번갈아 눈흘기시던 어머니. 그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던, 밥보다 만화가 좋았던 기억을 사람들은 참 흔하게 갖고 있다.그러나 훌쩍 커버린 기성세대에게 만화는 천덕꾸러기일 뿐. 오죽한 이름도 만화(漫畵), '게으른그림'으로 붙여졌을까. '삼국지'도 '마르크스'도 만화로 읽을 수 있는 시대, 한쪽에선 '21세기 첨단산업이다' 치켜세우지만 '불량'이라는 딱지가 실처럼 붙어다닌다. 그래도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있다. "우리나라 만화가가 받는 대접은 조선시대 '환쟁이'에도 못 미친다"고 말하는 사람들. 프로 만화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캔버스 가득 이야기보따리를 펼치는 곳을 찾아가 봤다.예비만화가 모임 '에픽(Epic, 782-7302)'의 화실이 있는 수성구 지산동. 화실을 찾았을 때는 마침19일 시작된 정기전시회(동아백화점 7층 갤러리, 23일까지)에 내걸 작품 마무리에 바빴다. 자신의캐릭터 '영웅'에 몰두하고 있는 전기순씨(26). 슥삭 슥삭 사사삭… 연필심이 모조지를 한참동안갉아먹고 나면 밑그림 완성. 그위에 잉크를 묻힌 펜으로 선을 입힌다. 강약과 속도감이 필요한 부분은 보통펜으로, 일정한 두께로 강한 느낌을 줄 때는 제도용 로트링펜으로. 잉크가 마르면 연필자국 지워내기. 명암이 들어가야 할 곳은 붓으로 터치. 아직은 끝난 게 아니다. 투명지에 갖가지문양이 프린트된 '스크린톤'을 그림위에 대고 필요한 부분을 잘라붙인다. 칼을 비스듬히 세워 긁으면 하얗게 일어난 부분이 하이라이트가 된다. 이런 식으로 A4크기의 만화 한 페이지를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하루. 공모전에라도 출품하려면 장편소설 한권을 탈고하는 것과 맞먹는준비시간이 필요하다.

"만화가는 종합예술인입니다. 소설가처럼 스토리도 만들어야 하고 그림을 그릴 때는 화가가 돼야해요. 제일 힘든 작업은 '연출', 한 컷에 어느정도의 스토리를 담을 것인가 지면마다 컷을 어떤모양으로 배치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죠"

만화가로 '등단'하려면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하든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정기공모전의 경쟁률(가장 최근의 공모전에서는 2백40대 1)을 뚫어야 한다.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스토리 작가(그림은 그리지 않고 만화의 시나리오를 만드는 사람)를 꿈꾸는 이현석 회원(24)도 '쓴 물'을 먹은 경험이 있다.

"꼬박 3개월 걸려서 시나리오를 만들었어요. 지구연합에 반기를 든 혹성에서 벌어지는 전쟁이야기…. 월남전을 빗댄 내용이었는데 출판사에선 떨어졌다는 연락도 안오더군요" 현석씨가 추측하는 실패의 원인은 '오락성 부족'. "출판사 사람들은 일본만화에 길들여진 독자들의 입맛을 너무잘 알아요. '이게 아니다'싶으면 아닌거죠. 작가의 창의성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너무 적어요"에픽 회원들처럼 데뷔를 꿈꾸는 아마츄어 작가들에게 매년 정기적으로 여는 전시회는 무엇보다중요한 행사다. 예비 독자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미리 평가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픽에 앞서 동아백화점 갤러리에서는 대구·경북 만화동아리연합체인 '053'(381-4537)과 '코프'(953-6988)의 정기 전시회가 이어졌다. 보통의 미술전시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053의 전시회장.

"멋있잖아요. 잘 생기고 또….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좋아요. 나도 저렇게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또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만화예찬론을 펴는 강효신양(16)처럼 전시장에는교복을 입고 친구와 팔짱을 낀 여중고교생들이 대부분. 053회원 60여명 대부분이 여자인 까닭에서인지 그림들이 다분히 소녀취향이라는 점도 일조를 했다. 삼삼오오 몰려온 구경꾼들은 각자가좋아하는 '스타일'에 대해서 수다를 떨고, 보는 것만으로 성에 안 차 사진까지 찍는 열성파도 있다. 전시된 그림마다 관람객들이 한마디씩 거들 수 있도록 붙여놓은 낙서장에는 "어쩜 너무 멋있다"는 내용이 제일 많고 "색채가 너무 강해 보는 이로 하여금 경악을 느끼게 하는군요"따위의 조언도 있다. "조금 괴물같아요"는 엄마 손을 끌고 온 꼬맹이가 썼나 보다.

"만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분위기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전시회를 갖는 것도점점 힘들어질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우리같은 아마추어 작가들이 여는 전시회에도 교복 입은학생들의 출입을 금한다고 하더군요" 053 회원들은 관람객의 쇄도에 즐거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걱정이다. 만화가들이 화실이 아닌 거리로 나와 구호를 외치는 현실이 결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과의 화해무드를 해친다며 '전쟁만화'를 금지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동물이 말을 하지 못하게 했던 70년대의 악몽이 바로 지금 되살아나고 있다고 그들은 입을 모은다."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구요? 그럼 뉴스도 못 보게 해야죠. '청소년용' '성인용' 만화의 구분은 왜 있나요. 한국 작가들을 기죽이기 전에 불법유통되는 일본 만화부터 잡아야죠" 또다른 만화가모임 '코프(Comics People)'김은주 회원(27)의 말처럼 우리나라 만화가들은 상상력을 펼치기도 전에 날개를 꺾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만화'만 그리기는 싫다. 그릇의 모양만 조금 다를 뿐, 그들은 소설이나 회화처럼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그속에 담고 싶다. '만화(漫畵)'가 아닌 '만화(萬話)'를 그리고 싶다.

〈申靑植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