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慶州남산-佛國土…망각의 세월 (下)

"무지의 울타리에 가려진 진실들" 많은 이들이 남산 40여골짝을 순례하듯 오르내려도 산의 실체는 좀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저밋밋한 외형과 달리 상상할 수 없는 깊은 속내를 안고 있기 때문일까.

짙은 역사의 향기를 뿜어내는 산은 간혹 자연의 조화에 흙위로 살짝 얼굴을 드러낼뿐 온통 제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다. 억겁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속내를 애써 사람들에게 감춰 온 것일지도모른다. 아니 인간의 철저한 망각이 남산의 모습을 온통 가려놓은 탓이리라. 무지와 망각의 울타리에 갇힌 남산의 아름다움을 더듬어내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할까.

대적천(大石責川)의 원(源). 마치 서양기사들이 찾아 헤매던 성배(聖杯)수수께끼의 열쇠처럼 남산의 진실을 밝히는 암호처럼 들린다. 서남산 허리부분 비파골. 이 계곡에는 묘한 이름을 가진 절이있었다. 불무사(佛無寺). 이 절의 유래는 신라 32대 효소왕 6년 망덕사 낙성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이 친히 행차, 공양을 올리는데 누추하고 못생긴 중이 찾아와 재(齋)에 참석을 청하자 언짢아진왕이 중을 말석에 앉으라해놓고 희롱조로 국왕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말하지 말라 고 하자 중은 임금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시라 며 남쪽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놀랍고 부끄러워진 왕은 산에 올라가 스님이 사라진방향으로 수없이 절하고 신하를 보내 진신석가를 모셔오라고 명한다. 신하들이 비파골의 삼성곡또는 대적천원이라는 곳에 이르러 바위에 놓인 지팡이와 바리때를 발견하지만 석가는 바위속으로숨었는지 간 곳이 없다. 이에 효소왕은 할 수 없이 비파암 아래 두 절을 지어 없어진 부처님을공양하며 각기 불무사,석가사라 이름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그러나 천년 세월이 흐르는동안 아무도 불무사를 알지 못했다. 삼국유사 에 보이는 이 구절은감춰진 남산의 진실을 제대로 읽어가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제까지 불무사터는 비파골 어귀에서 2백m정도에 위치한 소나무 숲속으로 알려져왔다. 향토사학자들은 일제때 일본학자들이 지레짐작으로 불무사로 단정한 것이라며 이 곳은 대적천의 끝(원)이 아니기 때문에 불무사터는 더 계곡상류로 올라간다고 말한다.

파골을 따라 개울을 건너지르며 오르다보면 골은 다시 잠늠골과 새롱골로 갈라진다. 모래가 많이쌓여있다는 새롱골로 접어들어 3백여m정도 올라가면 비탈위에 축대를 쌓아올린 흔적이 남아 있는 석가사터를 만난다. 순하던 산세가 갑자기 가팔라지며 산비탈에는 화강석바위들이 누각처럼솟아 있고 계곡의 여울이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높은 바위위에 아슬하지만 평평한 터가 눈에 들어온다. 진신석가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불무사는바로 이곳에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기와조각들이 어렴풋이나마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삼형제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부근에 있어 삼국유사가 전하는 삼성(삼형)곡, 대적천원의 신비가 비로소풀리는듯하다.

85년 사적지 311호로 지정고시된 남산. 하지만 아직도 절터 이름하나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신세다. 역사의 뒤안을 더듬어가지만 산은 그 화려한 빛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의 열과 정성이부족함인가 아니면 너무 깊은 망각의 골때문일까. 세월의 더께처럼 두껍게 내려앉은 망각의 껍질을 벗겨내는데서 남산의 유물유적 조사, 발굴의 절대성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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