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대표팀 차범근 감독(44)은 한국을 4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킴으로써 30년 축구인생의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작년 말 아시안컵에서 8강 진출 실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거둬 만신창이가 된 대표팀을 맡은 지10개월여만에 차 감독은 한국 축구를 다시 아시아 최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불세출의 스타에서 명지도자로 화려하게 변신한 차 감독은 어느새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의 베켄바워'라 부르기도 한다.
차범근 감독이 축구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8년.
초등학교 시절 육상을 한 차 감독은 서울 영도중에서 하키선수로 활약하다 3년때 경신중으로 전학하면서 축구에 입문하게 됐다.
차 감독은 축구입문 3년만인 경신고 3년 때 청소년대표로 뽑혔다.
고려대에 진학한 그는 이듬해 대학 1년 때인 72년 사상 최연소(19세)로 국가대표에 발탁돼 제5회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72년부터 시작한 국가대표 생활은 장장 7년간 계속됐다.
79년 6월 독일로 건너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고 4년 뒤 프랑크푸르트 생활을 마감하고 레버쿠젠에서 새 둥지를 틀었다.
다름슈타트에서의 1경기를 포함, 89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뛴 10년간 차범근 감독은 총 3백8경기에 출장, 98골을 터뜨려 외국선수로는 최다 경기출장에 최다 득점의 기록을 남겼다.이때 얻은 애칭이 바로 지금도 유럽축구팬들에게 기억되고있는 '차붐'이다.
그에게 이같은 애칭이 붙여졌다는 것은 바로 그가 스타의 반열에 들었다는 반증.레버쿠젠에서의 첫 시즌인 83~84시즌에는 34경기에 모두 뛰었을 뿐만 아니라 80년(프랑크푸르트)과 88년(레버쿠젠)에는 팀을 달리하며 유럽대륙내 3대 컵대회 가운데 하나인 유럽연맹(UEFA)컵을 두 차례 안기도 했다.
'프로는 곧 돈' 10년간의 분데스리가 시절에 축구로만 차 감독이 벌어들인 액수는 10억대. 그는명예로나 금전적으로나 성공한 프로였다.
89년 분데스리가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차범근 감독은 어린이를 상대로 '차범근 축구교실'을개설, 유소년축구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귀국 1년 뒤 그에게 첫 기회가 찾아왔다.
프로축구단 울산 현대에서 감독직을 제의한 것. 고심 끝에 현대 지휘봉을 잡았지만 축구인생을통틀어 가장 힘든 시련을 겪게 된다.
4년간 팀을 한 차례도 정상에 올려놓지 못하고 불명예 퇴진. 94년 11월26일이었다.지난해 12월 아시안컵에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자 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을 경질하고 차 감독에게 SOS구조신호를 보냈다.
몇차례 대표팀 감독직을 사양했던 그도 이제는 대표팀을 맡을때가 됐다고 판단했음인지 어렵지않게 한국 축구의 재건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떠안았다.
2년여의 야인생활(?)은 그렇게 끝났고 명예회복의 기회를 잡은 그는 만신창이가된 한국 축구에 '실리축구'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뿌리내리며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을 이뤄냈다.마음 한 구석에 '오는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고국에서 세계 4강을 이루고 싶다'는 큰 포부를 가진 차범근 감독.
그는 요즈음 "한국 축구가 달라졌다"는 평가를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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