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알제리가 '킬링 필드'로 전락하고있다.
지난 연말부터 현재까지 약 10일만에 1천명이상이 학살되자 안전지대로 탈출하려는 난민대열이줄을 잇고 있다. 종전 수도등 일부지역에 국한됐던 학살이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국민들은 극도의 불안에 떨고있다. 학살에는 이골이 난 알제리 국민이지만 이번 라마단을 틈타 자행된 극악무도한 집단학살에는 두손을 들고 피난처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있다. 이에따라 미국과 유럽연합(EU)은 학살규명을 위한 특별조사단 파견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무엇이 이 가난한 나라의 양민들을 이렇게 괴롭히고있는가.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않다.
알제리는 1962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지만 8년간에 걸친 독립전쟁으로 1백만명이 희생됐고 2백만명이 거리에 나앉아 국토는 폐허화됐다. 독립군이었던 후아리 부메딘느장군의 세력을 등에 업은아메드 벤벨라가 초대대통령에 취임,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 독립단체였던 FLN(민족해방전선)을 유일 정당으로 토지개혁과 재산국유화를 단행,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단숨에 이룩했다.
실업문제를 해결하지못한 벤벨라의 뒤를 이어 부메딘느 장군이 무혈쿠데타에 성공, 초헌법기구인'혁명위원회'를 만들어 65년부터 78년까지 철권을 휘둘렀다. 그는 경제개발에는 다소 성공했지만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외면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권력은 후계자인 육군대령 차들리 벤제디드에게 넘어갔다. 벤제디드는 자유화정책으로 알제리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 재선에 성공했으나 결국 그도 군벌 FLN의 꼭둑각시에 불과했다.
80년대 후반들어 지구촌에서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알제리 내부에서도 사회주의 정권에대한 질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반대세력들은 알제리를 더이상 세속정치인에 맡기지 말고 회교이념에 따라 통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85년 벤제디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과거 독재자들을 처단하는등 민주화에 불을 지폈으나 사태를 진정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88년10월 마침내 알제리에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의 주체는 시민들. 알제리정부는 FLN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을 인정하는 선에서 폭동을 진정시켰다.
이렇게해서 조직된 이슬람행동주의자들의 모임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은 90년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국민의 열망으로 보아 91년 총선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것은 뻔한일. 이에 불안을 느낀 FLN측은 선거일정을 일체 중지시키고 국회를 해산시킨후 '최고회의'를 구성, 모하마드부디아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해버렸다.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반발은 시민전쟁으로 확산됐다. 92년내전으로 6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디아프 대통령도 그해 10월 암살됐다. 그의 뒤를 알리 카피가이었으나 2년뒤 최고회의는 당시 국방장관인 리아민 제루알을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의 주된임무는 FIS와의 협상이었다. 94년부터 시작된 협상은 정부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지난해6월5일 이슬람 과격단체들의 출마가 원천봉쇄된 가운데 실시된 총선은 잠잠하던 테러에 또다시불을 당겼다. FIS는 10월1일 휴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회교극단세력인 이슬람무장그룹(GIA)은 이에 반발, 끝까지 투쟁하겠다며 대국민테러라는 잔인한 방법으로 지금까지 저항하고있는 것이다.알제리 내분의 핵심은 정치개혁보다는 권력층에 부(富)가 집중돼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알제리 정부가 집단학살에 시달리면서도 외부의 간섭을 단호히 배제하는 것도 그들의 특권을 노출시키지 않기위해서다. 이통에 선량한 국민들만 내전의 희생물이 되고있다. 서방세계는 "알제리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라는 교훈만 얻은채 '피의 향연'을 지켜보고있을 뿐이다.
〈尹柱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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