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지사후보 인물탐험-자민련 이판석 후보

"강한 추진력은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배웠다"

경북지사에 또다시 도전한 이판석(李判石·64) 자민련 후보가 사석에서 가장 즐겨 쓰는 얘기다. 그만큼 강한 소신과 추진력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운다.

실제로 그는 박전대통령이 많은 관심을 보였던 주택 개량 사업의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에있었다. 이후보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1년 6개월 동안 내무부 새마을 과장으로 있으면서주택 5만호 개량사업을 성실히 수행, 박전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이후보의 여러 강점은 막노동,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한 어린 시절이나 말단공무원에서 시작해 도백까지 오른 인생역정에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이후보가 공무원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6·25때 친구 형님 소개로 잠시동안 경북도청에서아르바이트를 하면서부터다. 그후 그는 구 대구대학(영남대학) 상과에서 학업을 하다 지난58년 현재의 9급에 해당하는 5급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했다.

경북도청에서 일하다 64년 내무부로 발탁된 이후보는 3백65일중 하루도 쉬지 않는 공무원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시절 그가 타 부서로 옮겨가면 그 부서직원들은'이제 고생이 시작됐다'고 서로 위로할 정도로 일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일 욕심만큼이나 부하직원에 대한 정도 깊어 공무원사이에는'내무부의 맏형'이라는 얘기를 들었다.이후보는 내무부의 여러 요직을 거쳐 89년말 기획관리실장을 맡으면서 대구시장이나 경북도지사로 나갈 우선 순위가 됐다·그러나 그 당시 실세인 박철언(朴哲彦)의원이 90년 12월 내무부에서 순위가 훨씬 뒤지던 이해봉(李海鳳)의원을 대구시장으로 내 보내 이후보는 분루를삼키고 1년여를 기다려야 했다.

92년 1월 마침내 경북도지사가 돼 금의환향했다. 도지사 시절에 대한 평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갈린다. 소신있고 추진력있게 일을 했다는 평가와 부하직원·출입기자 등과 사사건건 부딪혔다.

당시 이지사는 비판성 가십기사를 쓴 모 일간지 기자를 불러 해명할 것을 요구했는데 지사의 성격을 아는 이 기자가 피해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도지사실 앞에서 이지사와이 기자가 우연히 만났는데 이지사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두 사람이 험악하게 말싸움을 벌여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93년 3월, 차관급의 말석인 농촌진흥청장에 임명돼 사실상 좌천됐다. 수개월을 참고 지내다그해 12월, 항의(?)의 표시로 사표를 내고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95년 자민련 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던 시절 주위의 입당 권유와 유혹을 뿌리치고 소신껏무소속으로 도지사에 출마했으나 결국 고배를 마셨다. 지난 3년동안 친구·친지들에게 두루인생의 조언을 듣다 지난해말 뒤늦게 자민련에 입당했다. 때늦은 선택이 그를 영광의 자리에 올려 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朴炳宣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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