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되, 인간 내면의 정서나 사상을 규율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양심의 자유의 요체다. 중세 종교재판이나 20세기 전체주의의 공통점은 바로 그 양심의자유를 부정한 것에 있다. 그렇다면 '나의 사상은 잘못되었으며 앞으로는 대한민국에 충성하겠다'라는 과거 전향서의 내용이나, '대한민국의 국법질서를 준수하고 폭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준법서약서에 차이가 있는가?
새 정부가 앞으로 공안사범들에게 가석방 등의 조건으로 요구하겠다는 대한민국의 국법질서에 대한 충성과 비폭력에 대한 동의는 언뜻 시민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국법질서를 준수하는 행동'을 넘어서 그에 대한 '충성의 맹서'를 처벌여부의 조건으로 삼는순간, 그 국법질서는 이미 민주질서이기를 포기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민주시민에게 충성맹서를 요구할 자격을 상실한다. '전체주의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이다.
실정법은 과거의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에 만족해야 한다. 과거의 위법행위에 대한 처벌을통해서 미래의 위법행위를 예방하는 것이다. 전향서나 준법서약서는 그 서약의 문장은 달라도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한 인간의 생각의 표현방식을 구속함으로써 미래의 실정법 위반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발상에 기초한다.
사상범은 그 사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발상이냉전 매카시즘의 핵심이다. 그것은 사상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범죄라는 인식을 내포한 점에서 가공할 함의를 지닌다. 대한민국의 국법질서를 위반하면 실정법에 따라 처벌하면 된다.그러나 그가 대한민국의 국법질서의 성격에 대해 비판할 사상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한다.그것이 민주주의다.
전향서나 서약서의 구실은 미래 재범의 방지에 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 효과 또한 의심스럽다. 대한민국의 국법질서를 준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쓰지 않고도 간첩이나 이른바 좌익사범으로서의 행동을 중지할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런 것을 쓰고도 실제 행동은 폭력적일수 있다. 그런 서약서를 쓰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비밀리에 파괴적 행동을 할 가능성이 더높을 수 있다. 공작은 원래 비밀스럽고 기만적인 행동을 내포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각종서약서의 근본적 기능은 그 사람의 차후의 이른바 '국법질서문란행위'를 미연에 방지하는것에 있다고 하기 어렵다.
공항의 검색대는 무기나 마약을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전향서는 결코 그 사람의 미래의파괴적 행동을 가려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전향서의 목적은 검색 그 자체라기보다는 정신적테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 정신적 테러가 그 사람의 향후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점에서 앞으로 새정부가 택하겠다는 준법서약서라는 것도 그 근본기능은 달라진 것이 아닌 것이다.
전향서나 준법서약서는 사상 그 자체가 범죄라는 사고방식, 그리고 사상의 결과로서의 어떤행동뿐만이 아니라 그 사상 자체까지 처벌해야 한다는 관념을 밑에 깔고 있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심의 자유에 반하는 비민주적인 것인 동시에 실제 그 사람의 향후 실정법 위반행위 여부에는 아무 관련없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남한과 북한의 공통된 특징인 도처에 휘날리는 관공서의 요란한 선전간판과 플래카드들이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유일한 기능, 즉 사람을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만들면 무언가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형식주의의 또다른 표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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