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달의 문학-사람에 정직한 자들의 특권

'속도'에 지배당한 현대사회 난만한 정보 중심의 후기자본주의사회에 돌입하면서 사람들은 '속도'의 비인간적 속성과 무서움에 대해 심심찮게 이야기한다. 우리의 일상이 아무런 반성이나 조절없이 속도의 컨베이어벨트에실려 살인적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쉽게 묵도할 수 있다. 산업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고 가는이 속도의 원리를 경배하면서 적응하느냐 아니면 일탈하여 사회 부적격자로 낙인 찍혀 살아가느냐 하는 차가운 갈림길만 우리 앞에 있을 뿐이다.

범박하게 말해 문학은 이 속도 중심의 단선적이고 협애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는 많지 않는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문학 행위도 어느덧 이 광포한 속도의이데올로기에 함몰된 것 같다. 우리문학은 70년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이래 계간지 위주로 흘러왔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이 계간지들이 여성지나 황색잡지들이나 보일 법한 상업주의의 행태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다.

경쟁지보다 출간시기를 조금 앞당겨 판매에 승부를 걸겠다는 얄팍한 상술을 문예지들이 아무런생각없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문제이다. 가령 서점에 나가보면 이미 가을이 오기 전에 가을호잡지들이 대거 시판대 위에서 나뒹굴고 있다. 이 정신의 영역들이 보이는 일탈은 하우스재배나속성재배로 철없이 나오는 과일이나 농산물들의 반문명성에 견줄만하다.

오늘 구제금융체제라는 우리 현실이 직면하고 있는 이 총체적 난맥상도 따지고 보면 60년대 이래반성할 줄 모르는 박정희식 경제개발 속도전의 산물이다.

◆성실한 삶은 아름답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늦게(?) 나온 몇몇 계간지와 10월호 월간지들을 읽었다.구미에 거주하고 있는 노동자 시인 육봉수의 '세상의 장기근속자들은 다 위대하다'(사람의 문학가을호) 영천에서 농사짓는 이중기의 '장엄한 하루'(같은 지면), 박진형의 '쇠비름에게'(같은 지면) 그리고 '불교문예'가을호에 신인으로 첫선을 보인 김순정의 '겨울 폭포에게'는 힘든 세간에도불구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것'의 아름다움과 넉넉함을 보여주는 시이다. 육봉수는 '무너지고 나자 비로소 들어난 속속들이/껍데기뿐인 기적의 고도성장 온몸으로/떠받치며 공장에서 집으로 집에서 공장으로/십, 십오, 이십오 년 쳇바퀴질 걸음으로' 살아온 세월이 졸지에난폭한 현실의 재앙에 말려 '불안히도 흔들리는 자리지키느라 짐짓/늘어난 눈치, 때로는 미리부터알아서 기기도/수구리기도 굽히기도 하'지만 종래 '나 아직 안죽었다고 팽팽하다고 물에/물탄 듯술에 술탄 듯 더 이상은 밋밋하게/당하지만은 않'고 살겠다는 장기근속 노동자의 결의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형편없이 위축되고 있는 노동운동의 현실에서 시인의 이런 결의는 외도된 과장으로도 읽힐 위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축되지 않으려는 그의 각오는 '위대하고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육봉수의 시가 노동자의 삶에 대한 결의를 직접적인 발화로 드러내고 있다면 이중기의 시는 그야말로 시적이다. 그는 나태한 일상의 비유로 흔히 쓰이는 매미의 삶에서 '장엄한 하루'를 읽어 내고 있다. 전복적 상상력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매미가 맹렬하게 뙤약볕을 쳐부수며/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장엄하다/그렇다. 나는 반성해야한다/창자 끝을 비트는 지독한 허기처럼/한량없는 그리움이 불타올라/아편같은 사랑에 취해 산 넘고/물건너 갔다가 인생을 다쳐보지 못한' 삶에 대한반성을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독한 연애시다. 그러나 자신을 파탄에 이끄는 투쟁도 연애도 삶에 정직한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나태한 日常과 희망의 詩學

삶에 대한 이런 격정이나 정직은 박진형에 이르면 '깨진 병조각에/맨발 갈갈이 찢길지라도/땡볕에 온몸 바스라질지라도/가던 길 잠시 멈추고/마디마디 새싹 내밀어/불구덩이 세상 감싸안'는 넉넉한 대자 대비를 더하고 김순정에게서는 '굵은 소금 알갱이 켜켜이 쏟아져 내려/이미 숨죽인 것들의 부패를 막기 시작한다/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절벽의 갈라진 등줄기/맨살 부비며 흰비늘 돋아내는 폭포여/슬퍼마라/귀 기울여 네 심장소리 듣는/산짐승이 아직 있다'는 부패를 막기위한 겸허한 반성과 얼어붙은 폭포의 심장소리를 들을 줄 아는 따뜻한 희망의 시학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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