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윤기의 세상읽기-기도를 하지 않는 까닭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린 이야기가 나온다. 야이로가 그리스도에게 딸 살려주기를 간청하려하자 그의 친구는 야이로에게 "딸은 죽었으니 선생님께 수고를 끼치지 말라"면서 만류한다. 그러나 야이로는 친구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딸을 살려주십사고 그리스도에게 간청한다.

그리스도가 그 집에 당도하여, "아이야, 일어나거라"하고 명하자 아이는 숨을다시 쉬며 벌떡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 기적 앞에서 얼이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하고 당부한다.

청소년 시절 나는 이 대목을 읽고 혼자서 펑펑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레루야! 그리스도의 간명(簡明)한 말씀이 지니는 힘앞에서 나 자신은 때로는 기적의 간접적인 수혜자 야이로가 되기도했고 때로는 죽음에서 깨어난, 기적의 직접적인 수혜자 야이로의 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시절부터, 야이로의 비극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결방안은 가장 적절한 방법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내 눈에는 야이로가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다. 야이로는 이승과 저승을 사이에 두고 언젠가는 딸과 다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야이로든 야이로의 딸이든 다시 한번 애통해 하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불교 설화에 따르면 석가모니도 똑같은 간청을 받는다. 어떤 부인이 죽은 아들을 안고 석가모니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석가모니는 그 부인에게 아들을 살려줄터이니, 죽음을경험하지 못한 가장의 집을 찾아내어, 아들의 시신을 그집 아랫목에다 눕혀두면 살아날 것이라고한다. 석가모니가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집안을 찾아내고 그 집안의 가장으로부터 겨자씨를좀 얻어오면 아이가 살아나게 해주겠다고 했다는 판본도 있다.

부인은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찾아다녔을 터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을 수소문하면서 이 부인은 무수한 사람들이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부터 왔는데,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소"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니던 부인은 퍼뜩,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절망의 씨를 뿌리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인은 아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받아들이고는 이로써 평화를 얻게 된다.

나는 이 하나의 삽화를 단순하게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보다 석가모니가 훌륭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정한 자유, 진정한 희망은 헛된 자유와 희망 너머에 있다는 '진정한 희망의 종교학'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진정한 기도의 종교학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조직화한 종교가신도들에게 기적의 수혜자 야이로가 되기를 부추기는 기복(祈福)의 종교 환경을 걱정하고 있을뿐이다.

겨울철이 되면 신문에는 아들딸의 합격을 기도하는 부모들 얼굴이 자주 실린다. 서울의 명동성당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부모도 있고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가 기도하는 부모도 있다. 하지만, 내 아들딸은 섭섭하게 여길 지 몰라도 나는 아들딸이 합격하게 해달라고는 기도하지 않는다.왜 하지 않느냐 하면, 영험한 신이 내 기도를 가납한다면 다른 집 아들딸이 내 아들딸을 대신해서 낙방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나느 그런 기도는, 기도의 주체로서도 거부하고 기도의 객체로서도 거부한다.

인간이 신의 제단 앞에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의 물건을 제물로 바칠 수는 없듯이 인간의 한 모듬살이가 섬기는 신은 그 인간들보다 훨씬 더 영리할 수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전능한 신은 없다고 나는 믿거니와, 설사 전능한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사로운 기도를 가납할만큼 유치하지는않을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래서 나는 기도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이윤기〈소설가.미국 미시간 주립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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