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우에노(上野)역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동북방향으로 2시간 정도 달리면 온천 관광지 닛코(日光)로 잘 알려진 도치키현청 소재지 우츠노미야(宇都宮)시에 도착한다.
해방후에도 갖가지 사정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이 도시에 남아 살고 있던 재일교포들은 남북한이 분단되듯 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일본 전국에서 가장 치열한 세력다툼을 벌였었다. 그곳에서 지난 50년간 동포들을 위한 열정 하나로 칠전팔기의 인생을 살아왔고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80세 노인이 있다.
경북 고령군 성산면 출신 진동철(陳東徹)씨. 그는 민족금융기관으로써 동포들에게 필요한 사업자금의 신용대출업무로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도치키 상은신용조합의 이사장이며 재일경북도민회 상임고문으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파친코 부품 제작 등 관련 업종으로 연간 외형 약 80억엔의 매상고를 올린다는 우에하라(上原)상사 및 오메가 상사의 사장이기도 하다. 인구 50만의 우츠노미야시 번화가 일각에 자리잡은 도치키 상은신용조합 2층 이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1919년 경북 고령군 성산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독자로 태어난 그는 인근 절에서 한학을 배웠고 소학교를 마친 뒤 안동에서 중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천성이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했던 그는 어느 봄날 새로운 세상을 본다는 목적으로 훌쩍 집을 나섰다.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에 도망치듯이 일본 도쿄로 뛰었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 도쿄 나가노(中野)무선전문학교에 입학, 학업을 계속하면서도 많은 직업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금니 부러진 것을 돌아다니며 사모았다가 팔아 넘기는 금장사였다. 이어서 밀주 제조, 고철장사, 막노동을 계속하다가 중고시계를 팔며 지방을 떠돌기도 했다.
밟힐 수록 더 굳세어지는 잡초처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새로운 일들을 시도했다. 얼마간의 돈을 모은 그는 24세의 나이에 항공기 부품 하청회사인 우에하라(上原)제작소를 창업했다.
극심한 물자부족으로 부품은 만드는대로 실려나갔고 회사는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한번의 시련. 동경 대공습으로 공장은 잿더미로 변하고 부지만 남게 된다. 칠전팔기의 의지로 공장을 인근 야마가타(山形)현으로 이전하여 재기를 다짐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그리고 당시 26세인 그의 젊음은 성공하기 전에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이 사실을 알게된 그의 부친은 외동아들을 만나기 위해 어렵게 밀항선을 타고 찾아와 고향인 고령으로 돌아올 것을 종용했다. 부친의 말을 거역할 수 없게 된 그는 귀국을 결심, 전재산을 정리한 후 히로시마(廣島)에서 소형 수송선을 한척 사서 안개낀 그믐날밤 배를 띄웠다. 그러나 현해탄을 건너기도 전에 시모노세키(下關) 앞바다에서 일본 순시선에 잡혀 밀수 혐의를 받으며 모든 물건을 빼앗기고 체포되고 만다.
조사를 받는 가운데 그는 "내물건 내가 가지고 고국에 돌아가는데 무슨 밀수냐"며 항변했다. 한달간의 조사끝에 풀려난 그의 수중에는 손목시계 한개만 남아 있었다. 젊음을 다 바쳐 땀흘려 모은 전재산이 물거품이 돼 버리고 그는 다시 알거지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손목시계를 판 돈으로 그의 사업 근거지였던 야마가타까지 갈 수 있는 열차표를 손에 쥔 그는 또 다시 재기를 다짐하며 생활 전선으로 뛰어 들었다.
이때부터 그는 종전후 혼란기에 빠져있던 일본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힘이 아닌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때부터 조직활동에 투신하기 시작, 오늘날까지 50여년간 민단과 각종 단체를 설립하며 동포사회를 이끌어 오고 있다. "한번은 전후 혼란기에 일본 동북지방에 몰려들어 귀국을 기다리던 수만명의 우리 동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요. 그래서 박열 민단 중앙단장과 함께 센다이(仙台)시에 주둔하고 있던 미8군 사령관과 담판끝에 패전한 일본군 창고에 있던 약 2만벌의 군복, 군화 내의 등을 기증받아 추위에 떨고 있던 동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지요"
그후 새로운 사업을 통해 재기의 의욕을 불태우며 동시에 31세 나이로 야마가타(山形)현 민단 단장으로 취임, 지역의 동포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도쿄인근 토치키현으로 이사, 민단 조직 강화를 위한 조총련과의 치열한 투쟁이 시작됐다.
1959년 북한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의 북송사업이 추진됐다. 당시 그는 지역 민단의장으로서 북송반대투쟁본부를 설치하고 한사람이라도 더 북송선을 태우려는 조총련과 맞섰다.
"매일 단원들을 동원해 자동차를 빌려서 조총련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찾아 다니며 북한의 비참한 실정과 비인도성을 알렸지요. 다른 지역보다 조총련이 더 득세하던 도치키현에서는 이처럼 목숨을 건 투쟁을 해야 했고 그들과 부딪쳐 피흘리며 싸우기도 했지요"
그후 그는 민단 도치키현 지방본부 단장을 역임하고 도치키 상은신용조합의 이사를 맡아 조직을 정상 궤도에 올려 놓았다."고향이 경상도인 우리 동포들 중에서도 사업 자금조달을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조총련계 조은신용조합으로 넘어가버리는 동포들이 많았지요"
9년째 이사장직을 맡고있는 그는 예금금리가 자유화 되면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금융기관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며 동포들의 소액 예금을 중요시하고 직원들의 교육을 강화하고 조합원들로 하여금 민족 금융기관임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는 이제 남북통일의 촉매제로 재일교포들의 역할을 주장하고 있다. 앞으로 신용조합들의 합병이 늘어나면 조총련계 신용조합과의 통합도 고려해 볼만하다는 것이다. 이념을 초월해 사상은 접어두고 돈벌어 잘살자는 점에 있어서는 한뭉치가 될 수 있다는 것. 사실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관혼상제시에는 조총련쪽 동포들과 함께 모일 기회가 자주 있는데 대화를 통해 돈버는 일부터 같이 해보자는 제안이다. 성묘하러가는 기회가 아니라도 가능하면 자주 고향을 찾고 있다는 그는 대구·경북지역의 많은 상공인들과도 오랜 교분을 계속하고 있다. 80 나이에도 취미로 계속해온 골프는 핸디 80을 넘기지 않는 실력이다. 젊은 한때 금니 부러진 것들을 모아 파는 금장사를 하면서도 늘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는 그는 "국적은 언제라도 바꿀 수 있어도 민족은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朴淳國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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