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한 컴퓨터로 인해 육필 원고가 밀려난지 오래다. 이미 세상을 뜬 시인. 작가의 빛 바랜 누런 육필 원고를 한장씩 넘길 때는 아련한 향수마저 느껴진다. 잉크를 채워 넣은 만년필로 또박또박 칸을 메꿔나간 원고는 글쓴 이의 내면의 표정까지 읽어낼 수 있을만큼 미세한 울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시단의 원로·중진시인들의 대표시를 육필로 담아낸 대표시집이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김춘수씨의 '꽃'과 신경림씨의 '목계장터', 정현종씨의 '환합니다'(찾을모 펴냄). 자기 대표시를 손수 골라 펜으로 정성들여 한 자 한 자 눌러쓴 시집이다. 시에 대한 시인의 고뇌와 땀, 성격이나 섬세한 감정까지 느껴질 듯한 육필은 독자의 눈에 따뜻하고 푸근하게 때로는 즐겁게 다가선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꽃' 중에서)
육필 원고는 시인이 버린 글자와 시어 마저 고스란히 남겨둔다. 새로 고쳐 쓴 부분에 남겨진 잔해랄까, 얼룩이랄까. 적확한 시어를 골라내고, 반듯한 글자를 적어내기 위해 고심한 시인의 고뇌가 주름살처럼 남아 있다. 세월따라 글씨도 변한다 했던가. 비록 수십년전 젊은 시절에 쓴 초고(初稿)에 녹아 있던 순수함과 힘, 열정이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시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무한 복제시대에 오직 하나만 세상에 존재하는 육필 원고의 희소성도 눈길이 가는 부분이다. 어쩌면 시가 독자들의 입을 떠나고, 묻힐 수도 있지만 시인이 남겨둔 육필 원고는 그 시의 생명보다 오래고 질길지도 모른다. 이번 시리즈 첫 세 권에 이어 문단에 나온지 10년이 넘은 시인들의 육필시집이 계속 출간될 예정이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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