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소설에 20세기의 영광과 아픔을 모두 담아내면 어떤 이야기 모음집이 될까. 이런 궁금증에 답하는 소설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됐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의 '나의 세기(민음사 펴냄)'. 노벨문학상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세계 27개국에서 동시에 출간된 그라스의 최신작이다. 서울대 안삼환교수와 전 동의대 장희창교수가 함께 우리말로 번역했다.
이 소설은 1900년부터 1999년까지 매년 한 이야기씩 도합 100편의 이야기들로 구성돼 있는 일종의 '틀소설'. 소설의 각 이야기는 출신계급과 어법이 각기 다른 화자를 등장시켜 그 해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보여준다. 화자들은 궁극적으로 작가가 역할과 시각을 바꾸기 위해 설정한 인물들이다. 종군기자나 화랑 주인, 세 아들이 경찰·공산주의자·나치 당원이었던 여인, 조개탄·계란을 들고 암시장을 헤매는 아낙네, 노인, 구두가게 여점원, 어린아이…. 작가는 역사를 직접 체험한 다양한 사람들의 눈을 모아 한 세기를 더듬어 보고 있다. 이 화자들은 위대한 행적을 남긴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들러리이자 희생자들이다.
1927년. 그라스가 태어난 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화자는 작가 자신. '황금의 시월 중순까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배고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보자면 내가 태어난 해만이 황금색이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난 해가 광휘를 발하도록 도와준 것은 무엇이었던가? 차차 안정되어 왔던 제국의 마르크가 그것인가? 아니면 고상한 말의 장식으로 시장에 나오자 문예비평란의 온갖 건달 기자들이 수준 이하로 하이데거식으로 철학을 하기 시작하도록 만든 책, 즉 '존재의 시간'이란 말인가?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각 해의 이야기에서 작가는 학문의 발전에 따른 문명의 진보, 문화적으로 의미있는 사건들, 정치적 비극, 역사의 전개 등 다양한 테마로 시간을 이어간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그라스는 빛나는 발전과 영광 못지않게 상처와 아픔이 많았던 한 세기를 따뜻한 긍정으로 감싸 안는다. 독일어판에는 각 이야기마다 그 해의 사건을 암시하는 작가의 수채화가 딸려 있으나 번역판에는 일부를 소설 앞머리에 화보로 담았다.
작가는 얼마전 '포커스'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들(화자)의 입을 빌려 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무미건조한 역사를 형형색색의 이야기로 가까이 가져다주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문학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사람들을 계몽하는 것. 언제나 그것을 위해 글을 쓰는 귄터 그라스의 글쓰기론을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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